탕감받은 은혜의 복음
탕감받은 은혜의 복음
  • 권영진
  • 승인 2017.12.19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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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진 목사의 정언향 칼럼

 

예수님의 비유 중에는 유난히 [무거운 빚을 탕감받은 사람]의 비유가 많습니다. 특히 구원에 관한 부분에서 그러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빚을 많이 진 사람을 불성실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많아서 이 비유는 사실 그다지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그렇게 긍정적으로만은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자본주의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보편적인 한국교회 현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될 무렵의 당대(주후 1세기)에 무거운 빚(채무)에 시달리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의 의지와 능력과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권력자들과 소수의 시민권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작농(오늘날로 따지면 슈퍼 을)들이나 일당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수고의 대가를 거의 받지 못하고 대부분 소작료로 뺏기거나 가혹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물론 당시 로마의 [공식적 세금 제도]는 그렇게 가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법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는 로마가 제국화 되면서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특히 돈을 주고 총독의 자리에 오른 자들의 수탈은 매우 가혹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권리는 인정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도 결국은 땅도, 재산도 가진자들에게 뺏기다시피 바쳐야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 그 시대의 [가난한 자(무거운 채무를 진 자)]들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신음하던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위로부터) 탕감받은 은혜]는 그야말로 뼈에 사무치는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게 어떤 고통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특히 가난한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누가복음의 소위 '평지설교'에 그야말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하나님의 나라)이 있을 것이다!"(6:20)

당시의 수많은 '가난한 자'들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서 고통당한 사람들이기에 역설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의 의미를 부자들보다 더 쉽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구원과 천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고착시키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약한 자들을 수탈하고 빼앗는 '부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탕감받은 은혜]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사람들은 너무 욕심이 많아졌고 가진 것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복음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고 전해야 하는 교회는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오히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신 '부자'의 위치에 있는 곳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정말 오늘의 교회들이 두려워하고 회개해야 할 현실입니다. 심판을 선언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할 대상을 오히려 본받고 닮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복음은 결국 힘 있는 불의한 자들의 권세에 억눌려 있고 억울하게 고통받는, 자신의 힘으로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수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밍밍한 소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 잘 모릅니다. [탕감받은 은혜]를 글로만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과 지식이 괴리되어 있다면, 입으로 말하는 것과 실제가 같지 않다면 그곳에는 천국(하나님 나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글쓴이 권영진 목사는, 정언향(正言香: 바른 말씀의 향기) 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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