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애통해 할 것은 영성 부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애통해 할 것은 영성 부족한 것이 아니다
  • 권영진
  • 승인 2017.12.1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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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어도 덮어 놓고 자기 마음대로 읽는 것이다
Jean II Restout  (1692–1768), 오순절 성령강림(1732), Louvre Museum.
Jean II Restout (1692–1768), 오순절 성령강림(1732), Louvre Museum.

신약시대에도 그러했지만 구약시대의 고대 근동은 그야말로 예언과 점술이 난무했던 곳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이스라엘의 공식 제의에도 점술(우림과 둠밈) 제의가 있었을까요. 이런 부분은 시대적 정황이자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죄다 이런 것으로 '신의 뜻'을 확인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정말 다양한 형태의 예언과 그런 예언을 하는 예언자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구약 시대 고대 근동에서 있었던 각종 점술(예언) 행위들만 모아서 분류하고 연구한 것이 책으로 나올 정도니까 그 사례는 정말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성경에도 나오지만 수많은 형태의 예언자들과 예언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무엘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 신접한 여인(무당)을 찾아 사무엘의 영을 초혼하는 장면까지 나옵니다(삼상 28장). 일반 백성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이런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였습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쉽게 근절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수 많은 형태의 다양한 예언과 예언자들이 난무했음에도 언제나 구약의 정경 [예언서]들과 그 속에 나오는 [참 예언자]들은 언제나 일관성 있고 동일한 내용들을 전하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이는 훗날 구약 성경이 정경화 될 때 이스라엘 공동체는 [일정한 기준(여기서의 기준은 토라(오경)를 의미)]에 따라 거기에 부합한 것만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수많은 예언들 가운데서도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명확히 구분하여 그것을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은 확고한 기준(토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실 신약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이후, 사도들의 시대에도 수많은 예언과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은 그것이 성경(구약)과 그리스도의 교훈에 합당한 것만을 제한적으로 교회 내에서 받아들였습니다(다양한 서신서들이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니 신약 성경 역시 훗날 정경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당연히 온갖 형태의 [예언]과 [예언자]들이 난립해 있습니다. 조금만 신경써서 검색해 보면 정말 많습니다. 저마다 이것이 진짜라고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선전하고 선동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혹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고 진짜 [예언]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명확한 기준만 있으면 되고 그 기준의 내용과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면 됩니다. 네, 맞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의 진위와 올바름을 알고 싶다면 [더 깊은 영적 세계]로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럼 절대로 흔들리지도, 속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로 애통해 할 것은 우리의 [영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일단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고, 혹은 성경을 읽어도 덮어 놓고 자기 마음대로 읽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했던 일을 본받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문제입니다.

 

글쓴이 권영진 목사는, 정언향(正言香: 바른 말씀의 향기) 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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