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 영적부흥은 어떻게 오는가?
[장일] 영적부흥은 어떻게 오는가?
  • 장일
  • 승인 2019.03.16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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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 목사의 설교 - 느 8:1-12

얼마 전 유튜브에서 영상을 하나 봤습니다. 이 영상은 글로벌 브랜드 랭킹 곧 세계 기업 순위를 보여주는 영상이었습니다. 특별히 근 10년간의 순위를 역동적인 영상으로 보여줬기에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단연 세계 기업 순위의 변화였습니다. 여러분께 한번 묻겠습니다. 2008년도 세계 기업 순위 1위는 어디였을까요? 바로 코카콜라입니다. 그 뒤를 이어 마이크로소프트, IMB, GE(제네럴 일렉트릭), 노키아가 선정됐습니다.

그렇다면 10년 후인 2018년에는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을까요? 매우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2008년 기업 순위 1위였던 코라콜라는 무려 5위로 추락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명예의 1위 자리를 차지했을까요? 바로 아이폰으로 유명한 애플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어서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가 선정됐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기업인 삼성은 6위에 머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애플은 어떻게 세계 기업 순위 1위를 차지할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2007년에 출시된 아이폰의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알다시피 아이폰은 ‘손바닥 안의 혁명’ ‘스마트폰의 역사를 바꾼 제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여러분 아이폰과 갤럭시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뭔지 아세요? 바로 스마트폰 안에 들어있는 스포트웨어 즉 프로그램의 차이입니다. 갤럭시는 하드웨어 곧 기계만 삼성에서 만들고 소프트웨어는 미국 구글의 제품을 사용합니다. 그렇기에 별도의 로열티를 지불합니다. 반면에 애플은 아이폰과 함께 독자적인 소프트웨어까지 만들고 있습니다. 세계 기업 순위 변화에 나타난 특징은 분명합니다. 이제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웨어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 이야기 많이 듣고 계시죠? 맞습니다. 이제 우리의 미래 먹거리는 이 소프트웨어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현재 판교를 중심으로 네이버, 카카오 등 주요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작가 미상, 목판화(1886)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가 어떤 인물입니까? 바벨론 3차 포로 귀환을 이끈 인물입니다. 학개를 통해 살펴봤듯이 1차 포로귀환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이 재건되었죠? 성전이 재건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귀환한 백성들과 함께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성전과 성벽 즉 하드웨어가 완성된 셈입니다.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드웨어 곧 건물 안에 담길 소프트웨어를 준비하십니다. 이 소프트웨어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영적부흥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영적부흥의 원리를 깊이 깨닫기를 권면합니다. 동시에 우리 팔로우교회가 이 영적부흥을 꿈꾸며 경험하는 공동체로 서기를 축복합니다.

 

1. 말씀의 종을 통해 옵니다.

영적부흥은 어떻게 오는가? 첫 번째는, 말씀의 종을 통해 옵니다. 1절 말씀은 오늘 본문의 장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입니까? ‘수문 앞 광장’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한꺼번에 모인 것을 보면 이 수문 앞 광장이 집회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던 것 같습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에스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에스라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기에 에스라 7장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에스라가 무엇에 능통한 사람입니까?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자입니다. 동시에 제사장입니다. 그는 주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지켰으며, 이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에스라는 일곱째 달 초하루에 회중 앞에 서게 됩니다. 참고로 이 날은 유대인의 명절인 나팔절입니다. 나팔을 불어 이 날을 알렸기 때문에 나팔절이라 불립니다. 이어서 수문 앞 광장의 모습이 나옵니다. 현재 모습이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인산인해입니다. 왜냐하면 이 집회에는 성인 남자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까지 모두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에스라는 임시로 만든 나무 강단 위에 올라섭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율법을 낭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현재 한국에 있는 신학교가 대략 몇 개인지 아십니까? 약 60개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인가 신학교까지 더한다면 아마도 수백 개가 될 것입니다. 지금도 한 해에 수천 명의 목회자 후보생들이 쏟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던져봐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위기는 정녕 목회자의 수가 부족해서일까? 과연 지금보다 더 많은 목회자가 필요한 것일까?” 저의 대답은 ‘NO’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의 생각만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목회자의 수가 아닌 목회자의 자질이 문제의 본질로 대두됐습니다. 한마디로 자격미달의 목회자가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공부했던 대학원 이름이 공교롭게도 에스라입니다. 정확히는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입니다. 저희 학교에는 에스라 정신이 있습니다. 에스라 정신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이 시대에 에스라와 같은 지도자를 훈련시켜 세우는 것입니다. 또한 이 정신이 바로 학교를 세우게 만든 설립이념이기도 합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현재 한국교회 위기는 결코 목회자의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라는 속담처럼, 목회자는 많으나 에스라와 같은 말씀의 종은 희귀한 상황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위기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시간이 날 때 기독교 방송을 봅니다. 방송을 보는 목적은 은혜 받기 보다는 설교의 동향을 살피기 위함입니다.

대부분의 방송이 대형 교회의 설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방송을 내보내는 기준이 후원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척교회 목사님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대형교회라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말씀에 충실한 좋은 설교보다는 그렇지 않은 설교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다른 설교방송들을 추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계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영적부흥의 현장들이 있었습니다. 이 역사들을 살펴보면 놀라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영적부흥의 현장에는 신실한 말씀의 종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있었습니다. 영국에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가 있었습니다. 19세기 미국에는 D.L 무디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구두 수선공 출신이었지만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영적 부흥에 앞서 먼저 신실한 말씀의 종들을 준비시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도 이러한 신실한 종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말씀의 종들이 아닌 말씀을 팔아 영광을 취하고 자기 왕국을 세우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현재 ‘개독교’라는 치욕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구하는 것이 진정 영적 부흥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말씀이 선포되는 이 강단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하나 더 부탁드립니다. 목회자로 하여금 다른 사역이 아닌 오직 말씀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십시오. 말씀 사역이 아닌 행사나 프로그램에 매달리는 목회자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때로는 단 기간의 성장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부흥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부흥은 말씀을 통해서만 오기 때문입니다. 에스라의 정신이 저와 팔로우 강단을 지켜가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이것이 영적부흥을 위한 최우선 순위의 기도입니다. 

 

2. 말씀의 백성을 통해 옵니다.

영적부흥은 어떻게 오는가? 두 번째는, 말씀의 백성을 통해 옵니다. 이제 에스라의 율법 낭독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지금 수문 앞 광장의 열기가 어떻습니까?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부흥회보다 매우 뜨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책을 폈다’고 번역되어 있는데 당시는 책이 아닌 두루마기 형태였습니다. 어쨌든 백성들은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어서 에스라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어떻습니까?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나타냅니다. 7-8절에 보면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할 때 열세 명들의 레위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다름 아닌 통역과 율법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시간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페르시아의 공용어인 아람어에 더 익숙한 상황입니다. 교포 2세들이 모국어인 한글을 모르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율법을 통역하고 해석하는 일을 맡은 것입니다.

9절에는 비로소 율법을 깨달은 백성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반응이 어떻습니까? 모든 백성들이 울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율법을 통해 자신들과 조상들의 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율법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모습을 깨달으니 회개의 눈물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레위인들이 이 통곡의 장면을 모두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타이릅니다.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무엇을 멈추라는 것입니까? 울음을 멈추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일인 나팔절은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는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즐거워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는 ‘자발성’이며 다음은 ‘사모함’입니다. 먼저 자발성입니다. 여러분 수문 앞 광장집회는 에스라가 기획한 것이 아닙니다. 1절을 보면 백성들이 먼저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부탁했습니다. 또한 말 뿐 아니라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알아들을만한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넘치는교회 안내 동영상 화면 갈무리

다음은 사모함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대목에서 사모함이 느껴집니까? 3절에 보면 수문 앞 광장집회의 시간이 나옵니다. 이게 얼마 입니까? “새벽부터 정오까지 큰 소리로 율법책을 읽어 주었다” 여기 새벽부터 정오란 ‘약 여섯 시간’에 해당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여섯 시간도 중요하지만, 그 시간 내내 아멘으로 화답하며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사실입니다. 서울 서초동에 가면 시계를 가리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이름이 ‘넘치는 교회’인데 이 교회는 주일에 총 2부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시간은 1부가 3시간 30분이고 2부는 몇 시간인지 아세요? 놀라지 마십시오. 2부는 평균 5-6시간 예배를 드립니다. 이 교회 담임목사님이 순복음교회 출신인데 목사님의 지론은 간단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러 나오는데 예배가 영화 한편보다 짧아서야 되겠는가?”

여러분 이렇게 6시간 예배드리는 교회에 누가 갈까요? 여러분이라면 가겠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역동적인 예배를 드리니 수많은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자폐증과 우울증을 겪는 아이들이 치유를 받고 회복된 것입니다. 현재 교회는 300여명의 성도들이 출석하는데 대부분이 20-40대의 청년들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시간은 길어야 90분입니다. 평균 예배시간은 60분-70분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어디는 30분 드리는 곳도 있다고 하고, 심지어 영국에는 15분 드리는 곳도 있습니다. 물론 예배시간이 반드시 길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점점 짧아지는 예배의 분위기는 교회의 영적 쇠퇴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회심을 했습니다. 이때가 저의 첫 번째 영적부흥의 시기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시기에 제가 하루에 설교만 몇 시간을 들었는지 아세요? 6-8시간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영적부흥을 경험해봤기에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영적부흥을 찾아볼 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의 백성이 멸종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멸종이란 단어가 의미하듯이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팔로우교회 모든 성도들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 앞에 ‘자발성’과 ‘사모함’을 갖춘 말씀의 백성들로 서기를 축복합니다.

 

결 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영적부흥은 어떻게 오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오늘 포로귀환 공동체는 놀라운 영적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이 중심에는 말씀의 종과 말씀의 백성이 있었습니다. 물론 부흥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습니다. 부흥은 결코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교회사를 살펴보면 늘 부흥의 현장에는 말씀의 종들과 말씀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0절에 느헤미야가 말합니다. “이제 돌아가서 살진 짐승들을 잡아 푸짐하게 먹고 마십시오. 만약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그 몫도 챙겨주십시오” 이후 백성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놀랍게도 그 말씀 앞에 순종했습니다. 변화의 원인은 말씀의 회복 즉 말씀에 대한 깨달음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순종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요 이웃과 함께 즐기는 기쁨도 회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부흥의 본질입니다. 이번 한 주는 영적부흥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권면합니다. 더불어 이 질문도 함께 묵상하십시오. “나는 어떻게 신실한 말씀의 종이 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진실한 말씀의 백성이 될 것인가?” 이 거룩한 묵상이 우리 공동체를 영적부흥 앞으로 이끌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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