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 자비의 예수를 경험하라!
[장일] 자비의 예수를 경험하라!
  • 장일
  • 승인 2018.12.15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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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 목사의 설교 - 요 5:1-9

20142월 대한민국 사회복지 제도의 허점이 드러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송파 세 모녀 사건입니다. 기억나시나요? 송파 세 모녀 사건은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던 세 모녀가 생활고로 고생하다 결국 방 안에 번개탄을 피워놓고 동반자살한 사건입니다.

MBC 뉴스 갈무리
MBC 뉴스데스크(2014.02.27) 갈무리

당시 60세인 어머니와 35세의 큰딸 32세의 작은 딸이 지하 셋방에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큰딸은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있었으나 비싼 병원비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작은 딸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생활비와 언니의 병원비를 대느라 이미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인근 놀이공원 식당에서 일을 하던 어머니가 사실상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건 발생 한 달 전에 어머니가 식당에서 넘어져 다치는 바람에 실직을 하게 됩니다. 이 일 때문에 생활고를 겪다가 결국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 70만원, 그리고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국가와 자치단체가 구축한 사회보장체계의 도움도 받지 못한 현실이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나 가슴 아픈 대목입니다.

이뿐 아니라 매년 겨울철이 되면 독거노인 고독사도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독거노인은 약 138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정부와 지자체는 이러한 복지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 찾아가는 복지 서비스를 신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영적 사각지대에 놓인 한 사람을 직접 찾아가십니다. 참고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신앙의 연수가 있으시다면 아마도 여러 차례 설교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설교의 초점은 대체로 38년 된 환자의 치유에 맞춰져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환자의 치유보다는 그 사람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신지를 함께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1. 찾아오시는 예수님 자비의 예수를 경험하라 첫 번째는, 찾아오시는 예수님입니다.

1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베데스다를 방문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방은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 4장의 사마리아 여인에 이어 계속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직접 베데스다까지 오셔야만 했는가?” 이어서 우리가 던져봐야 할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베데스다의 상황을 살펴볼 때에 그 힌트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3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5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현재 베데스다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참고로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이 등장합니다. 다른 사본에 보면 의사에게 재산을 모두 탕진했지만 고침을 받지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베데스다에 진을 치고 있는 환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제는 현실적인 희망마저 모두 포기한 채 베데스다의 기적 아니 베데스다의 미신만을 붙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베데스다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생기가 없고 우울하며 매우 침통한 상황입니다. 더불어 냉혹한 경쟁의 상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데스다의 미신은 천사가 물을 움직인 뒤에 들어가는 사람이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사람이 치유를 받습니까? 가장 먼저 들어가는 단 한 사람만이 치유를 받습니다. 이러니 그 분위기가 오죽 하겠습니까?

여러분, 신촌 세브란스나 아산병원, 분당 서울대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각 진료과 마다 명의가 있는 병원들은 적어도 몇 개월 전부터 예약을 해야 진료를 볼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반면에 베데스다의 상황은 단 한 사람만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으로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베데스다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자비의 집에서 정작 자비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베데스다는 어디일까요?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사회가 영적인 베데스다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부터 대한민국을 부르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바로 헬조선입니다. 들어보셨나요? ‘헬조선이란 “‘지옥조선의 합성어인데 한마디로 한국에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왜 이러한 신조어가 생겨났을까요?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은 답이 없는 현실 때문일 것입니다.

알다시피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돈이 많을수록 교육과 입시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대학등록금은 갈수록 비싸지고, 취업과 결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내 집 장만을 하려면 월급 한 푼 안 쓰고 9년을 모아야한다고 합니다. 아이들 교육은 어떻습니까? 직장이나 사업장의 불안정성은 어떻습니까? 은퇴 이후에 삶은 어떻습니까? 결론은 이렇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생활기반을 마련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오직 한 곳으로 쏠리는 거에요. 베데스다의 환자들이 못 한곳만을 바라봤던 것처럼, 한국사회도 오직 성공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한번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우리가 겪고 있는 대부분의 어려움들이 뭐만 있으면 해결되는지 아세요? 바로 돈만 있으면 해결됩니다.

돈이 많으면 부부간에 경제적인 이유로 다투는 일은 없어집니다. 자녀들 교육, 입시, 취업, 결혼을 남보다 머리 아프지 않게 밀어 줄 수 있습니다. 현재 직장이나 사업장 그리고 은퇴 이후의 삶까지 뭐 고민할 필요가 있나요? 은퇴 이후에 어떻게 편안하게 보낼까에 대한 고민이지, 어떻게 먹고 살까에 대한 고민은 없어집니다. 참 불편하지만 현실이 이러하니 한국사회가 오직 성공에 함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들이 인정하는 성공의 자리에 올라섰다할지라도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됩니까? 하나님을 떠난 죄로 말미암아 절대적 구원이 필요하다는 진리가 쓸모없게 되나요? 아니에요. 우리 사회가 여기서 더 후퇴하든 진보하든 상관없이 진리 되신 그리스도는 언제나 역사의 끝 날까지 필요합니다. 오늘 38년 된 중풍병자와 같이 인간은 자비로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런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 풍성한 자비로 우리를 찾아오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결핍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찾아오셨던 주님께서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자비를 오늘도 풍성하게 경험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2.알아주시는 예수님  자비의 예수를 경험하라 두 번째는, 알아주시는 예수님입니다.

6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오늘 설교의 초점은 38년 된 환자의 치유가 아닌 그 사람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물음과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선포 이전에 38년 된 중풍병자의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니다. 6절에서 밑줄 그으실 부분은 예수께서 누워 있는 사람을 보시고에 밑줄,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에 밑줄입니다. 본문에는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한마디로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는 분입니다.

대한민국청와대
대한민국청와대

작년 5월에 제37주년 5.18기념식이 있었습니다. 9년 만의 정권교체 이후에 열린 기념식이기에 이전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여러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었지만 저는 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바로 5.18 유족인 김소형씨의 편지 낭독입니다. 편지의 제목이 슬픈 생일인데 이유인즉 자신이 태어난 생일이 바로 아버지의 기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편지 낭독은 많은 국민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정에 없던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낭독을 마친 김소형씨를 안아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이후에 김소형씨는 인터뷰를 통해 대통령의 품이 마치 아버지 품처럼 따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아픔에 공감해주는 이 포옹만으로도 김소형씨의 상처가 상당 부분 치유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우리 주님께서 38년 된 중풍병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계십니다.

Jesus Mafa
Jesus Mafa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 사건이 나옵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고 무덤에 들어간 후였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서 왜 이렇게 늦게 오셨냐며 통곡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1: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제 나사로는 얼마 안 있으면 살아날 텐데 굳이 예수님이 우셔야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신앙의 본질은 어쩌면 문제해결보다 산적한 문제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삶에 있습니다. 기도응답, 문제해결이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와 문제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아파하며 공감하는 분이심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난주에 후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쉽게도 좋은 연락은 아니었습니다. 가정에 생긴 큰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연락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이나 도움은 없었습니다. 그저 후배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칠 때쯤 후배가 고맙다고 합니다. “내가 뭘 한 게 있냐고 물었더니 이야기를 들어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동일한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어제 오늘만의 외침이 아닙니다. 위기 맞습니다. 여기서 위기란 교회가 줄어들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예수의 자비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교회 밖에는 예수의 자비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 이것이 위기의 본질입니다.

 

올 해 저희 교회에 여덟 분의 새가족이 등록했습니다. 한 사람이 귀한 개척교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에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새가족이 오는 일은 분명 기쁜 일이지만 동시에 저는 마음에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부담감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진실하게 다가서고 사랑하기 위해 얼마만큼 힘쓰고 있는가?” 이러한 고민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대부분 찾아오시는 예수님, 알아주시는 자비의 예수님을 경험하신 분들입니다. 우리 팔로우교회는 Follow! Jesus!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습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처럼 영적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듯이 인생의 문제에 눌려 눈물 흘리며 아파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곁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순서가 교회 밖이 아닌 교회 안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8년을 마무리하며 올 한해 우리 공동체에 보내주신 새가족들을 사랑으로 돌아보기를 권면합니다. 뭐 거창할 필요가 있나요? 먼저 주일에 따뜻한 미소로 담은 인사로 맞아주십시오. 또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 구체적으로 섬겨야 할 부분이 보일 겁니다. 지난주에 등록하신 장ㅇㅇ 형제님은 1인 가구이십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1인 가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먹거리입니다. 주중에 정ㅇㅇ 안수집사님이 시골에서 받은 김장김치를 전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제가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이 관심을 낳고 이 관심이 구체적인 섬김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공동체를 찾아온 사람들은 영적인 베데스다 냉혹한 경쟁과 상대적인 박탈감에 지쳐서 온 분들입니다. 동시에 진실한 사랑과 격려, 따뜻한 공감이 필요한 분들입니다. 자비의 예수를 먼저 경험한 우리가 주님을 닮은 따뜻함으로 그들을 품어주고 세워주는 공동체로 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자비의 예수를 경험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은 분명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를 직접 찾아오셨고 그의 처지와 아픔을 공감해주셨습니다. 나아가 그를 치유하심으로 새로운 삶까지 허락하셨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우리의 경험은 모두 다릅니다. 우리 삶의 정황들이 다르기에 주님을 만난 경험도 모두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우리가 만난 그리스도가 자비에 풍성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주님의 자비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평생토록 경험하고 붙잡아야 할 은혜인 것입니다.

따뜻해야 할 연말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주님의 풍성한 자비에 흠뻑 잠기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자비가 우리 공동체를 가득 채우고 밖으로 흘러나갈 것입니다. 한 주간 자비의 예수를 깊이 묵상하고 경험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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