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 다시 보는 달란트 비유
[장일] 다시 보는 달란트 비유
  • 장일
  • 승인 2018.12.23 05: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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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 목사의 설교 - ​​​​​​​마 25:14-30

얼마 전 일입니다. 장모님과 통화를 마친 아내가 한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보니 역시나 사연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희 장모님은 아직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찾는이입니다. 아내를 한숨짓게 한 사연은 이렇습니다5년 전 장모님께서 한 펀드상품에 가입했습니다. 펀드가 뭔지 다들 아시죠? 투자전문기관이 일반인들로부터 돈을 모아 증권투자를 하고 여기서 올린 수익을 다시 투자자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들어보니 큰 금액은 아니고 월 20만원씩 넣으셔서 곧 1000만원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최근 들어 여러 경제상황의 악화로 펀드 수익률이 나빠진 것입니다. 당시 원금에서 약 20%정도의 마이너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모님께서 남은 돈을 빼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아내에게 전화로 물어온 것입니다. 저희 아내가 투자전문가가 아닌데도 말입니다아내는 그저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다시 회복될 수도 있으니 좀 지켜보는 게 어떻냐?”고 답했습니다. 이후에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다행히도 수익률이 반토막 나거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원금에 가까이 회복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펀드에 투자할 돈이 없는 저희 가정으로서는 간접적으로나마 펀드의 실상을 체험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서론에서 제가 펀드, 원금, 수익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오늘 본문이 달란트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도 재산, 원금, 수익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연수가 있으신 분들은 이미 여러 차례 설교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비유들 가운데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다시 보는 달란트 비유. 오늘은 설교의 제목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정말 그러한가?’라는 경건한 물음으로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달란트 비유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분명히 깨닫고 우리 삶의 자리까지 가져오는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1.달란트 비유에 대한 오해

다시 보는 달란트 비유 첫 번째는, 달란트 비유에 대한 오해입니다오늘 본문인 달란트비유는 마태복음에서 가장 긴 비유에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깁니다. 총 세 명의 종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참고로 예수님 당시 한 달란트는 성인 노동자의 약 20년의 임금에 해당됩니다. 오늘날 연봉을 3000만원으로 잡았을 때 6억원에 해당되는 매우 큰 금액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여행을 마친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종들에게 맡겼던 재산 즉 달란트를 결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얼마를 남겼습니까? 다섯 달란트의 수익을 냈습니다. 두 달란트는요? 역시 두 달란트의 수익을 냈습니다.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얼마를 남겼습니까? 단 한 푼의 수익도 내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한 달란트 즉 6억원의 돈을 배추밭인지 고추밭인지 아무튼 밭에 그냥 묻어두었습니다결론은 수익을 냈던 두 종 곧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모두 주인의 칭찬과 신임을 받습니다. 반대로 아무런 수익을 내지 못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는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자 이제 달란트 비유에 대한 오해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달란트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본문처럼 돈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대체로 달란트를 개인이 갖고 있는 재능으로 이해합니다. “집사님은 찬양의 달란트가 있으신 것 같아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달란트가 있는 것 같아요많이들 들어보셨던 멘트이지요또 다른 의미로는 달란트를 교회 안의 직분과 연결시켜서 이야기합니다. ‘어둔 밤 쉬 되리니찬양을 부르며 우리가 받은 직분에 충성하라는 가르침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달란트의 원의미는 우리가 가진 재능이나 직분에 대한 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적용 부분에서 연결 지어 볼 수도 있지만 오늘 비유의 중심 가르침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달란트 비유에 대한 오해가 달란트 자체에 대한 오해였다면 또 다른 오해는 1세기 공동체에 주는 교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른 성경들도 마찬가지지만 마태복음의 1차 독자는 오늘날 우리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주후 70년 이후에 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를 위해 쓰여졌습니다당시 마태 공동체는 두 가지 위기에 봉착해있었습니다. 먼저 외부적으로는 유대교의 거센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 핍박 앞에 타협하고 굴복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교리적인 혼란이 있었습니다. 율법경시론 즉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행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과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분리한 것입니다그래서 마태는 신앙을 포기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킨 왜곡된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강한 경고와 교훈을 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달란트 비유를 대할 때 우리는 오해 없이 이 비유를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2.주인을 오해한 종

다시 보는 달란트 비유 두 번째는, 주인을 오해한 종입니다앞서 이야기한대로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의 수익을 낸 종들은 모두 주인의 칭찬과 신임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내쫓김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여러분은 아무런 수익도 내지 못한 이 종의 문제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26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27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합니다. 단순하게 보면 이 종의 문제를 게으름의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종의 문제는 단순한 게으름이 아닌 주인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주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십시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의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지독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을 더 화나게 만들었던 이유는 이것입니다. 분명 자신을 그러한 지독한 사람으로 이해했다면 종은 이자놀이를 해서라도 수익을 남겨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성격상 원금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을 뻔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그저 손을 놓고 아무런 행동도 어떠한 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갖고 있었기에 그저 원금만 잘 남겨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 내용입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실 줄 믿는다여기까지만 보면 뭔가 은혜스러운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편지를 보낸 어머니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교회의 사모이고 편지를 받는 아들은 모 언론사의 회장입니다. 이 아들은 당시 횡령 및 탈세 혐의로 수감 중이었습니다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신앙을 떠나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봐도 큰 범죄로 회사와 교회에 피해를 준 아들에게 회개를 권유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전무하고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기만을 믿는다니.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분들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정녕 같은 분일까?”

오늘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물론 우리 예수님은 지독한 사채업자가 아닙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은 왜곡된 하나님 이해에 기댄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에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마지막 때에 심판하실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구약의 역사를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선명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샬롬 안에 거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곡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타락했고 결국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독교는 내가 믿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 계시의 말씀을 믿는 종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 내가 믿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안타깝지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새해에도 성경통독은 계속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전 성도가 참여해주시기를 권면합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충만해져서 우리 공동체 안과 밖으로 아름답게 드러나기를 소망합니다.

 

3.하나님 나라 제자도

다시 보는 달란트 비유 마지막은, 하나님 나라 제자도입니다.

14 또 하늘 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달란트 비유의 핵심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 알려면 비유의 첫 시작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제가 상반기에 전한 막1:15절 강해에서 마태복음의 천국, 하늘 나라는 무엇과 동의어라고 말씀드렸죠? 하나님 나라와 같은 의미임을 줄기차게 강조했습니다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무엇과 연결 지어서 이야기합니까? “또 하늘 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바로 하나님 나라와 연결 지어서 이야기합니다. 한 마디로 달란트 비유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비유라구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공간적인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을 의미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마태는 달란트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 제자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 나라 제자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수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수고와 헌신이 따라야합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침노한다는 것은 군사가 타국의 성을 뚫고 들어가는 적극적인 능동성을 뜻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제자도에 대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오늘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치명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어떠한 위험부담도 없는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자신의 안전과 편안함만을 우선으로 하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입니다주일성수, 십일조, 교회봉사, 금주, 금연 이상 다섯 가지만 이행하면 교회 안에서는 A급 신자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제자도는 결코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 제자도가 구현되어야 할 진짜 무대는 교회 안이 아닌 밖입니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여러 관계들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구별된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지난 화요일에 기프트 박스를 전달하러 정종수 안수집사님과 광천동 주민센터에 다녀왔습니다. 직원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사회복지 공무원인 장집사님께 여쭤보니 규모와 상관없이 구제사역을 하는 교회들이 매우 적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교회가 그 지역에 속한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는 것이 교회의 큰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솔직히 저희 같은 미자립교회는 돈 들어갈 곳이 정말 많습니다. 이번 주에도 예산이 없어서 카드로 결제해야 할 항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순간 교회의 영광은 사라집니다. 오늘 종들이 받은 달란트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의 재능이 아닌 하나님 나라 제자도를 실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산상수훈에 기록된 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이 제자도는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우리의 존재 밖에서 착한 행실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주인이 돌아왔을 때처럼 장차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받은 달란트 즉 하나님 나라 제자도를 실천하는 삶을 주님 앞에서 결산해야 할 것입니다.

 

Giovanni Lanfranco, The Miracle of the Bread and Fish(1620~23)
Giovanni Lanfranco(1582~1647), The Miracle of the Bread and Fish(1620~23)

결 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다시 보는 달란트 비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들었던 개인의 재능이나 직분에 대한 충성보다 하나님 나라 제자도의 관점으로 말씀에 다가섰습니다오늘 본문이 있는 마24-25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설교의 주제는 심판입니다. 살펴본 것처럼 달란트 비유의 교훈도 종말에 있을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연말입니다. 갖은 행사와 연말의 분위기가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점에서 개인적으로 또한 공동체적으로 한 해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고 결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비단 이러한 종말론적인 삶은 연말 뿐 아니라 우리 매일의 삶에 반드시 있어야 태도입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극심한 핍박을 뚫어낼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종말론적인 삶에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일이라도 개인의 종말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야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겼던 종들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일을 목표로 삼겠습니까쉽진 않겠지만 저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일을 목표로 삼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 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다시 삶을 정비하고 달려가는 팔로우 공동체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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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혜 2018-12-23 18:41:05
달란트의ㅡ의미가 은사 재능만이 아닐꺼라는 생각에 늘 궁금했는데 퀘스쳔이ㅡ해결이 되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