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의 기도 - 정말로 무속인가?
지렁이의 기도 - 정말로 무속인가?
  • 윤상원
  • 승인 2017.11.30 0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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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목사님의 포스팅과, <지렁이의 기도>무속으로 염려하는 포스팅을 둘 다 읽어보았습니다. 염려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이해되었고,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염려되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그 염려란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원리로 확대하거나, 특수한 경험을 일반적으로도 가능한 경험으로 확대할 것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그러나 그 염려는 잠시였습니다. ‘진정한 염려는 다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도님들로 하여금 이 < 지렁이의 기도>를 읽게 하되, 어떻게 하면, 내가 염려하는 바를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서도, 이 소중한 책을 읽게 할 수 있을까?”하는 염려였습니다.

저는 사실상 실천적으로는 거의 은사중지론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의 목회자입니다. 저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100% 말씀하시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라는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는 목회자입니다. 저는 본래 어려서부터 <성령의 은사>가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분위기에서 성장했습니다. 저는 4.5세쯤 어릴 적부터 기도로 병 낫는 일을 보거나, 또는 제 몸의 병이 낫는 일들을 수차례 경험하였습니다. 가장 많은 경험은 중학교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신유의 은사를 받으신 정 권사님께로 저를 곧잘 데리고 가셨습니다. 정 권사님께서는 제 몸의 아픈 부위에 손을 얹으신 채, 어머니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신 후에, ‘기도합시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제 몸의 병은 나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제가 4,5살 어릴 적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였습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거의 매일 빠짐없이 학교를 오가며, 교회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제 입의 혀가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방언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쯤 까지, ‘오산리 금식기도원의 기도굴에서 신비한 황홀경’(?)을 사모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심령이 답답하고, 내 영혼이 컬컬하면, 이러한 황홀경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엄격한 율법주의에 매여서, 내 영혼이 지칠 때면, 더욱 이러한 신비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황홀경한방’(?)이면, 마치 무슨 강력한 영양제 주사 한방을 맞은 것처럼, 또다시 교회에 헌신할 마음이 새롭게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내 신앙생활은 율법주의에 매우 얽매여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두려운 분이었고,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어떠한 분인지를 바르게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분명히 질병의 치유'방언황홀경을 경험하였지만, 내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내가 왜 죽을 죄인이란 말입니까? 왜 내가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라고,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반항심을 여전히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내 영혼을 가장 괴롭혔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답변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었고, ‘내가 왜 죽을 죄인인가? 라는 인정할 수 없는 의문이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참된 평안을 찾은 것은, 대학교 3학년 이후 어느 날,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인격적으로 영접한 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내게 두려운 분이 아니셨고, ‘나의 아버지이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예전처럼 율법에 억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내가 더 이상 무슨 황홀경이나, 무슨 방언이나, 무슨 치유를 사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에게 점차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대신에 나에게는 성경이면 충분하되, 100% 충분했습니다. 제가 지금 최소한 목회적-실천적(?)으로 은사중지론의 입장에 서 있는 원인은, 바로 성경의 그 충분함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더욱 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100% 말씀하신다>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이러한 저에게 김요한 목사님의 지렁이의 기도는 매우 도전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저의 신학적 입장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제가 목회자로서 부족한 부분을 더욱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이 책을 읽은 후에, 김요한 목사님처럼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를 바라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성도님들에게 그러한 은혜들이 수동적으로 임하는 것이라면 누릴 찌라도, ‘능동적으로 찾아다니는 것..은 매우 주의시킬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저는 실천적으로는 <은사중지론자>와 사실상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경이면 100% 충분하다라고 고백한 이후에도, 여전히 내 삶 속에서는 초자연적인 기적에 속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때로는 내가 하나님께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는데도, 그러한 기적들이 하늘로부터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 1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가난’(?)해서, 기숙사에 들어갈 돈도 없었습니다. 교과서도 다 구입하지 못했으니까요. 학교 강의실에서 침낭 하나로 매일 추위 속에 잠들었습니다. 매일저녁 나의 기도시간에 고열의 아픈 몸으로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 아픈 몸을 손으로 누르며, ‘낫게 해 주세요라고 첫 마디를 한 후, 그냥 일상적인 기도를 다른 날처럼 하다가 마쳤을 때였습니다. 그 때 내 몸의 병이 그 자리에서 다 나아 있었습니다. 가장 서럽고, 너무 힘든 시기였습니다. <>란 존재는 하나님의 관심 밖에 놓여 있다라고 스스로 느낄 때였습니다. 그 일은 나에게 너무나 큰 하나님의 위로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100%’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전히 이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날 예배당에서 도서관을 향하여 걸어가면서, “상원아! 왜 내가 너를 내 관심 밖에 버려두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은혜를 베풀어주심으로 또한 나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물론 다음번에 똑같이 아파서, 다시 기도했을 때, 그때는 낫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하나님께서 같은 말씀을 해 주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편이 성경외에 또 다른 것이 있다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그 충분함을 알수록, ‘진실로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과 다른 것이나, 또는 또 다른 방편이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윤상원
ⓒ 윤상원

과연 신약시대에 예언과 치유무속이라고 해야 하는가?

저는 무속이라고 할 만한 경우를, 교회 안에서 너무나도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 중직자들과 많은 성도님들이, <목사>샤먼처럼 여기면서, 저에게 <무당>과도 같은 역할을 해 달라고 졸라대거나, “그런 것을 안 해 줄려면, 왜 목사가 되었느냐?”라며 사직의 위협을 하는 경우도 겪었습니다. 그 분들은 윤상원 목사는 만 읽고, ‘공부만 많이 해서, 성령의 신비한 역사는 알지 못한다. 신령한 목사가 아니어서 그런 것이다”..라고 그릇된 비방을 빈번히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것에 대한 반발때문이었을까요? 어느덧 저는 더욱 실제에 있어서는 은사중지론의 입장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김요한 목사님의 <지렁이의 기도>, 지금 이러한 저에게 필요하며, 또한 매우 유익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로서 저의 부족함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어떻게 성도님들을 더욱 온전히 섬길 수 있는지를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김요한 목사님의 <지렁이의 기도>무속’(巫俗)에 빗대어 말씀하는 것은, 저에게는 타당성 있게 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거의(?) ‘은사중지론자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오순절 은사주의복음주의 은사주의를 동일시하지 말며, 둘을 구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미국의 칼린주의 신학자인 B.B.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은사중지론부터 철저히 파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였던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을 제대로 공부하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입장인데, 성실하게 공부해야 하는 것이 기본인 것 같습니다. 이한수 교수님의 <성령론>과 영국의 신약학자 막스 터너(Max Turner)<성령론>은 읽어도, 내게는 생소하고 어려워서, 그리 쉽게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충 읽어버렸는데, 저에게 성령론의 지식이 매우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미국의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Wayne A. Grudem)의 견해가 저에게 가장 궁금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예언의 은사’(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 1988, rev. 2000)를 원서로 구입해 놓고서, 띄엄띄엄 읽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뜻밖에 이 책이 번역되어 있네요. 121일이면, 내 손에 들어오게 됩니다. 한글로 편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현재로서는 웨인 그루뎀의 견해가, ‘은사중지론은사지속론을 통합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계시적 차원에서는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는 예언의 은사도, 치유의 은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저에게는 이를 신학적으로 통합하여 진술할 만한 지식은 없습니다. 다만 김 요한 목사님의 <지렁이의 기도>무속과 관련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글쓴이 윤상원 목사는, 부안읍교회 담임목사로 최근 '십일조가 알고 싶다'(넥서스, 2017년)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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