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진 목사님의 비평에 대한 답변
이국진 목사님의 비평에 대한 답변
  • 김요한
  • 승인 2017.11.29 21: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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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새물결플러스, 2017년

우선, 이국진 목사님과는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신학교 선후배 사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렁이의 기도> 내용과 관련하여 예상치 못했던(저로서는) 논쟁이 벌어졌지만, 서로 예의와 존중을 유지하면서 이 목사님이 제기한 비판에 대해 간단히 답을 하고자 합니다. 한편, 사실 이런 글은 안 쓰는 것이 더 좋은데 미국의 데일리투게더란 인터넷 신문에서 이 목사님의 글을 게재한 후에 제게 반론을 하겠냐고 질문을 해서, 고민 끝에 아주 간단히 답하기로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도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위 은사중지론과 지속론 사이의 논쟁은 좀처럼 접점을 찾기 어려운 이슈입니다. 제가 평소 농담처럼 말하는 것처럼, 아마 은사중지론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 오셔서 기적을 행하셔도 그 행위가 바알세불에게 붙들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갖고 해묵은 논쟁을 되풀이하며 서로 감정 싸움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은사지속론자이고, 이국진 목사님은 은사중지론에 가깝기 때문에, 이 목사님이 제기한 첫 번째 문항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이야기하는 예언이란 것이 (전형적인 은사중지론자들의 설명처럼) 성경을 잘 풀어 설명하는 해석적 능력을 의미한다는 주장에 대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오는 방언과 예언은 말 그대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경험하는 방언과 예언을 뜻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예언적 기도는 단순히 미래를 맞추고 보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의 삶 전체를 초지일관 꿰뚫어보시고 잘 아시고 계신다는 통전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국진 목사님은 <지렁이의 기도>에 나오는 몇몇 예언적 사례라는 것이,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종교 혹은 무속 종교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류의 것으로 간주하시는 데, 물론 많은 종교에 그런 현상들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은사의 기능이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가령 무당의 것과는 달리, 신자의 삶에서 꼭 필요한 윤리적 결단이나 성품의 변화 및 인격적 성숙에 초점을 맞춥니다. 저는 지렁이의 기도 13"오직 사랑하게 하소서"14'지혜롭게 하소서"에서 (제한된 지면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내용들이 분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생략한 채, 책에 등장하는 예언적 사례에만 초점을 맞춰 이런 현상을 무속이나 타종교의 현상과 동치에 놓는 것은 저자로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비평자는 <지렁이의 기도>가 개인의 체험을 위주로 쓴 책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에 대해서도 동의가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비록 고등학교 졸업생 이상의 독자가 무난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서술방식과 구성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기도에 대해 먼저 신학적 정의, 그리고 성경 해석을 제시한 후에, 그리고 말미에 그에 대한 체험적 사례들을 예증으로 제시하는 형식을 일관되게 유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자의 개인 체험을 위주로 서술하면서 필요한 경우 마치 프루프 텍스트처럼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면, 비평자의 비판이 충분히 타당하겠으나 오히려 책이 그 반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튼 이 주장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비평자는 저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데, 실제로 6,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의 내용은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할의 의미를 믿고 신뢰하기, 둘째,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중보하고 계심을 믿고 신뢰하기, 셋째, 예수님의 이름의 권능을 사용하기로 서술되어 있고, 스탠리 존스의 이야기는 이중 세 번째 대목을 예증하기 위한 한 가지 예화입니다. 그리고 그 책은 스탠리 존스가 직접 쓴 <하나님의 예스>라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참고로 스탠리 존스는 타임지가 뽑은 최고의 선교사이자 지성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다양한 측면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중 한 대목을 따서 예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쓰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전체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비판으로 여겨집니다.

비평자는 성령의 탄식을 따라 기도함을 방언 혹은 방언통변과 연결시킨 것이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는데, 저자는 그렇게 직접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책에도 분명히 나와 있지만 로마서 8:26을 둘러싼 저명한 신학자들의 해석을 간단히 소개한 후에, 거기에 더해 개인적 경험에 비춰볼 때 방언이나 방언 통변 등이 성령의 깊은 탄식이 무엇인지를 (어쩌면) 힐끗 엿볼 수 있는 통로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고, 그에 대한 사례로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저자와 비평자의 이런 미묘한 이해의 차이는 기실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차이와 오해를 빚어낼 수 있습니다.

비평자는 저자가 한편으로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신실하신 성품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가지고 책의 내용이 이율배반적이고 자기모순적이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성경은 서로 외관상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한둘이 아닙니다. 일례로 성경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전적 주권을 강조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책임과 의지를 강조하는 대목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이런 긴장을 억지로 조화시키기 보다는 겸손히 인정하고, 우리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그 두 가지 요소를 골고루 균형을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따라서 저는 기도응답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동시에, 인간의 순종과 인내의 결과 혹은 믿음의 결과라는 것이 둘 다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평자는 저자가 믿음의 개념과 기능을 큰 고민 없이 오해하여 일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책에서, 믿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먼저 마태복음 8-9장에 나타난 믿음의 사례와 기능에 한정하여 서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마가복음(3:1-5)과 요한복음(9:1-7)의 말씀을 끌어다가 비판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성도들에게 기도생활을 권면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하지, 기도할 때 믿음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적절히 알아서 하신다, 이렇게 가르치지는 않지 않습니까?

또한 저자는 비평자의 주장대로 믿음으로 기도한 것은 다 응답받는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의 뒷부분으로 갈수록-일부러 문학적 효과를 위해 그렇게 배치를 했습니다- 기도가 거절될 때, 기도해도 고난이 그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신자들의 실제 모습이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16"항상 기뻐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에서는 기도응답과 상관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것과 상관없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앙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기도만능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수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거절당하고 응답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삶의 순종을 통해 어떻게 믿음의 신실한 여정을 계속할 것인지를 이야기하려고 나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끝으로, 비평자는 저자가 무조건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능사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하며 이로써 오히려 신자들이 좌절하게 될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하지만 24"포레스트 검프'에 보면 실제로는 기도의 위인들의 사례를 간단히 언급한 후에, 그런 모범을 우리의 삶에 실제로 적용하려고 할때 얼마나 부담스럽고 어려운지를 분명히 적시하고 있으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뛰는 것조차 힘들었던 포레스트 검프가 마침내 잘 달리는 사람이 되었듯이, 우리들도 당장에는 기도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 해도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도생활에 정진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한 자리에서 몇 시간씩 머물면서 기도하는 것을 제안하기 보다는 일상의 삶에서- 걸으며, 운전하며, 지하철 안에서, 설겆이하며- 틈틈이 계속 기도함으로써 기도가 생활화되는 연습을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제가 굳이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인 이국진 목사님의 비평에 이토록 구구절절 반박 글을 쓰는 이유는, 이 목사님의 비판이 책을 통전적으로 파악한 상태에서 일리 있는 지적을 하셨다고 느껴지기 보다는, 본인의 신학적 입장과 맞지 않는 대목만 문맥과 상관없이 따내서 거기에 모종의 해석을 가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페이스북에서 둘 만의 건강한 대화 내지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인터넷 언론에 기사화됨으로써 이슈가 커져버렸기에 저자로서 부득이 자기변호 내지 변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이 목사님의 애정 어린 지적과 비평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이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서로에 대해서 갖고 있는 존경심과 애정에 대해서는 한치의 변화도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신 벗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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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lawo 2018-10-06 14:38:36
서로를 향한 존경심과 애정이 한 치의 변화도 없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