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구유에서 예수 탄생을 떠올리다
동굴 구유에서 예수 탄생을 떠올리다
  • 김동문
  • 승인 2018.01.25 0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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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과 양의 우리 '구유'는 무엇을 뜻하였을까?
동굴 구유와 우리에 들어가 있는 양떼들

(서안지구=데일리투게더) 김동문 = 지난 역사를 안다는 것은 그 때 그 자리에 살던 이들의 일상을 헤아리는 수고를 뜻합니다. 그런데 지극히 평범하거나 평범한 삶조차 누리지 못했던 이들의 삶의 흔적을 따라잡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그런 이들의 삶의 흔적이 기록이나 건물의 잔해 같은 유적지로나, 유물과 유품으로도 남아있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흔적 없이 살다간 이들 가운데는 천한 사람으로,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받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고용된 목자가 대표적입니다. 이 목자들은 유대인 성인 남자면 의무적으로 주어지던 증인의 책무도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목자들의 삶의 자리도 천막이나 동굴, 움집 같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정치적, 경제, 종교적 기반을 둔 권력자들의 양떼를 치던 이들이 베들레헴 주변에 자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베들레헴 지역을 목자들의 들판으로 불렀습니다. 마치 조선시대 한양에 가까운 곳에 자리한 도축자들(백정들)이 살던 마장동 같은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곳에는 목축하는 이들의 삶의 터전이 자리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서민 지역, 광야에 목자들의 임시 거처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천막이나 천막과 함석 등을 뒤섞은 집에 사는 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 시대에 고용된 목자들, 우리가 아주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마주하는 삯군 목자들이 치는 양떼는 많은 경우 권력자들의 음식과 유월절 절기와 희생 제물로서의 제수용()이었습니다.

그런 베들레헴에 사관이 존재할 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가 걸어서 두 시간 정도 거리인데, 굳이 이 곳에 머물 여행자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저마다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것입니다. 같은 단어로 다양한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 단어가 일반 가정집의 숙소를 뜻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맥락에서는 그런 단순한 뜻을 넘어서곤 합니다.

동굴을 삶의 보금자리로, 양뎨의 우리로 사용하는 목자들이 있다.

오랜만에 유대 광야를 둘러보았습니다. 어제 비오는 날 오전에 목자의 삶과 마주했습니다. 특별히 동굴을 우리로, 구유로, 자신들의 집으로 사용하는 유목민 가정을 만났습니다. 책이나 글로 지난 시대의 삶을 배우는 것에 머물지 않는 습관이 제게 있습니다. 목자들을 통해 목자의 삶을 듣는 것이 늘 새로운 깨달음과 궁금함을 자아내곤 합니다.

어제도 목축 생활에 얽힌, 그리고 동굴 구유, 우리에 관한 이야기도 보고 듣고 나누었습니다. 목자로 태어나 목자로 살고 있는 라미 그리고 왈리드를 만났습니다. 고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였던 디르사 가까운 마을에 살면서 목축을 하며 살았지만, 새로운 땅주인이 그 주변 땅을 사들이고, 울타리를 치는 바람에, 양떼를 풀어놓을 공간이 사라졌습니다. 그레서 요단 들녁, 지금의 삶의 터전으로 옮겨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자연 동굴을 건초와 구유가 놓인 양떼의 우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다른 칸에는 목자들의 생활공간으로서의 동굴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풍경을 마주하면서 다시금 예수 탄생 이야기가 다가왔습니다.

예수 시대에 구유는 동물, 양이나 염소 집을 뜻하는 특징적인 그림 언어였습니다. 구유에 누인 존재 즉 양과 염소 같은 존재는, 우리말로 바꾼다면 개, 돼지 같은 인생으로 태어난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사진 속의 오늘날의 어떤 목자들의 삶의 터전이 동굴이고, 구유이고, 우리인 것처럼 말입니다. 움집, 초가집, 기와집이 어떤 대상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듯이, 판잣집과 양옥집이 특정인의 경계가 되었듯이 말입니다.

동굴이 양떼의 우리가 되고, 구유가 된다.

예수 시대에 사관은 사람, 여유 있는 사람이 머무는 일시 거처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층에 연결된 특징적인 그림 언어입니다. 사관에 머물 수 있는 존재는 명예, 부귀, 권세 등을 누리는 그들만의 사람 같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사관에 누이지 못하고, 구유에 누였습니다. 그렇게 낮고 천한 존재로, 낮고 천한 곳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는 가이사와 그리스도를 계속하여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사관과 구유도 그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베들레헴 지역은 물론 헤브론 지역의 유다 광야에도 자연 동굴과 동굴 주거 문명을 이어가던 목자들이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삶을 이어가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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