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바 아들의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리스바 아들의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 김동문
  • 승인 2018.11.23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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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속 성경 본문 다시 읽기
"설교자의 설교 속 성경 본문 다시 읽기"는 설교의 논지, 전달 방식 등에 대한 비평이 아닙니다. 설교 표절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설교 속 성경 본문(내러티브 등) 해석의 적절성을 다시 읽는 것입니다. 성경 배경연구에 바탕을 둔 설교 다시 읽기입니다. 가능한 한 설교를 교정 없이 그대로 옮깁니다. 설교문의 단락 나누기 등은 반영했습니다. - 편집자 주)
The Kindness of Rizpah, James Tissot

성경은 모든 것을 꼼꼼하게 다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독자는 그 여백과 틈새는 건강한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본문이 설정한 시대 배경에 대한 통찰력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본문 속 인물과 사건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하는 성경 읽기여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 독자로서 '그때 그 자리'에 서는 수고를 하여야 합니다. 본문의 맥락은 물론이고 시대적 맥락과 행간을 읽어내야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행위는, '지금 이 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이들 가운데는, '기-승-전-예수' 식으로 본문의 맥락에 대한 고민 없이 예수를 찾아 묵상하는 것이 집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경우입니다.

오늘은, 사무엘 하 21:10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주제로 진행한 A 목사의 설교를 다시 읽습니다. 아래 인용문은 그 설교의 결론 부분입니다. 설교에서 소개되는 '리스바'는 누구이고, 리스바의 어떤 행동을 설교자는 이렇게 해석한 것일까요?

“... 처음이 끝보다 아름다운 인생이 다윗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여쭤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까? 처음이 끝보다 좋은 인생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끝이 처음보다 좋은 인생이 좋겠습니까? 한 번 대답해보세요. 처음이 좋으면 좋겠어요? 끝이 더 좋으면 좋겠어요? 끝이 더 좋아야 됩니다. 이에 끝이 더 좋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지요. 처음과 끝이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이에 이 리스바의 이 여인의 이 모습, 보십시오, 10장? 10절 말미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하는.. 이 리스바의 이 모습, 이게 뭐죠? 야웨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리스바가 행한 이 모습은, 사실은 누가? 다윗이 이렇게 했어야만 했다 라는 것입니다.“

아랫글은 설교 중 관련 내용에 대한 녹취입니다. 가능한 한 설교자의 설교 자체를 옮기고자 노력했습니다. 전체 40분 설교 중 7분 정도의 분량입니다. 이 글은 A 목사의 설교 논지나 설교 방법을 살핀 글이 아닙니다. 단지 그가 본문으로 삼은 해당 성경 본문의 배경 이해에 대해서만 짚어보려는 것입니다.

 

1. A 목사의 설교 다시 듣기

이해가 되십니까? 그저 바른 길을 걷지 않고 행실이 바르지 않은데, 주일날 교회 와서. “나는 예배 드렸잖아” “나는 예배 드렸어”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왔잖아.” 이렇게만 말하는 이들, 여러분 아무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이 예배당 바깥에서 바른 길을 행하고 바른 행실을 살아서 정의를 온전히 행하지 않고서는, 여러분 아무리 와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 예배는 의미가 있다? 없다.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그저 예배당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그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참된 예배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에 9절까지는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왜 재앙이 임하였는지?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 맹세를 어겼기 때문이고, 왜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를 어겼습니까? 기브온 족속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데, 여호와 앞에 서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서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서 있지 않을 때는, 여호와의 맹세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무죄한 자들에게서 피를 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에 일곱 명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서 이제 기브온 족속들의 손에 의해서 나무위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게 되어 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이 사건은 끝나지 않습니다. 2110절입니다. 같이 읽죠. 시작!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 이 리스바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군인이 들이닥쳐서는, 자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기브온 족속들에게 주고, 기브온 족속 손에 들어간 자기의 두 아들은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게 되죠이때, 여러분, 어미인 이 리스바의 마음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이 리스바가 어떻게 합니까? 그 시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그렇게 애를 씁니다. 무려 6개월가량이나 갑니다. 여러분 왜 이 리스바가 대략 6개월 가량이나, 낮에는 공중의 새를 밤에는 들짐승을 쫓아내면서 왜 이렇게 있을까요? 왜 이렇게 할까요? 단순히 두 아들을 향한 모정일까요?

여러분 그 그림 하나를 보여주죠. 굉장히 사실적이죠. 나무에 아들들이 매달려 시체로 있습니다. 이에 한 여인이 손에 뭔가를 쥐고는 들짐승들 그리고 공중의 저 새들 범하지 못하도록 쫓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모습, 이 리스바의 모습은 단순히 모정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속사의 중요한 한 말씀을 이제 한 번 볼 것입니다. 신명기 212223절입니다. 같이 한 번 읽죠. 시작!.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가 죽을 죄를 범하여서 나무위에 달려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경우, 자기가 잘못해서 나무위에 달려 죽임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23절 시작.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라.“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날에 장사하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 일곱 아들들은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이에 죽고 나서 이 일곱 명의 아들들은 밤이 지기 전에 내려 내려서 장사를 지내야 됩니까? 아니면 나무위에 시체 그대로 둬야 됩니까?

Rizpah, George Becker

이게 어렵습니까? 다시 이야기 하죠. 신명기 21장에, 나무에 매달린 이 시체를 밤새 두지 않고 내려야 되는 경우는, 자기가, 자기가 죽을죄를 범하여서 나무에 매달렸을 때에는, 그냥 곧장 내립니다. 그런데 이 두 이 일곱 아들들은요? 이 일곱 아들들은, 자기가 죽을죄를 행했습니까? 행하지 않았습니까? 행하지 않았습니다. , 지금 나무에 달려있습니까? 자신의 선조였던 사울왕의 그 잘못, 좀 더 크게 보면, 이 이스라엘 온 땅에 내려진 하나님의 재앙을 지금 풀어버리고, 그 하나님의 재앙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지금, 이 일곱 명의 아들들이 대신하여서, 대신하여서, 지금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들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곧장 내려야 됩니까? 내리지 않습니까? 내려서는 안 됩니다. 내려서는 안 됩니다. 계속 나무위에 그대로 시체로 그대로 둬야합니다. 언제까지 둬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내린 가뭄을 끊어 버리고, 비를 내리실 때까지 비를 내리실 때까지, 그 일곱 명의 아들들의 시체는 나무 위에 매달려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낮에는 자꾸 누가 옵니까? 공중의 새가 옵니다. 밤에는요? 자꾸 들짐승이 옵니다. 아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비가 올 때 까지는 이 시체가 나무위에 매달려 있어야 되는데,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뤄지기 까지, 이 시체가 나무 위에 매달려 있어야 되는데, 낮에는 공중의 새가, 밤에는 들짐승이 자꾸만 해하려 합니다. 이에 누가, 누가? 리스바가 낮에는 공중의 새를 쫓아내고, 밤에는요? 들짐승을 쫓아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내린 이 가뭄을 끊어버리고, 재앙을 끊어버리고, 비가 올 때까지 이 리스바라는 한 여자가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때까지, 뭐합니까? 밤낮으로, 밤낮으로, 공중의 새와, 공중의 새와 들의 들짐승을 쫓아냅니다. 언제까지요? 비가 내릴 때까지요.

이에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이와 같이 공중의 새와 들짐승을 쫓아내는 이 일은, 리스바가 해야 할 일입니까? 아니면 다윗, 이스라엘의 왕인, 이스라엘의 왕인 사실은 다윗 왕이 해야 할 일입니다. 누가 해야 될 일입니까? 사실은, 다윗 왕이 해야 할 일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이것을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하지 않습니다.

 

2. 설교 속 성경 본문 다시 읽기

이제 해당 성경 본문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사무엘상 21장과 신명기 21장입니다. 하나씩 읽어 보겠습니다. 길게 다가올 지 모르지만, 설교자가 설교에서 언급한 해당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성경 읽기 1 사무엘하 21:5-14

1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5 그들(기브온사람)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6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7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8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9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10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11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12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거리에 매단 것을 그들이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13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Rizpah, George Turnner
Rizpah, Joseph Turner

본문을 보면, 14절을 보면 다윗 시절 어느 때의 가뭄이, 목 매어 달려 죽은 일곱 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 묘실에 장례를 치룬 다음에 끝이 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의 자녀들 일곱 명이 같은 날 목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그런데 사람들은 그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가족도 그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다윗 왕의 강제 조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당일 해지기 전에 장례를 치루는 것이 법도였고, 율법이었습니다. 우리말에 인륜, 천륜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넣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그러나 그것을 누구도 실천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거의 6개월 정도였습니다. 죽임을 당한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였습니다. 우리의 날짜 개념으로 5월 하순 정도로 볼 수 있는 보리 수확할 때인 칠칠절 무렵입니다. 언제까지 나무에 매달려진 채로 방치되었습니까?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였습니다. 이른비가 내리는 시기 즉 늦가을 또는 초겨울에 이를 때기까지 그리하였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일종의 다윗 왕 시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성경 저자의 묘사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천륜과 인륜이 사라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신명기 21장 본문ㅇ[서 언급하겠지만, 장례는 죽은 자와 그 유가족, 지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담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의 방치 또는 장례를 제댸 치루지 못하는 상황은 심각한 모욕이며 불명예였습니다. 즉 치명적인 수치를 안겨준 사건입니다. 조심스럽지만, 마치 조선시대의 부관참시 같은 사건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그 죽은 자들의 장례가 마치자 그 땅의 가뭄이 멈추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본문 표현에 혹시 저자가 독자에게,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어떤 의도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고온 건조한 날씨와 메마른 땅과 기근, 그리고 리스바의 애간장 끓는 마음과 흐르지 않는 눈물, 다윗 왕의 메마른 마음이 은근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장례를 치룸과 이른비가 내리는 늦가을, 초겨울이 시작된 것은 또 다른 복선인 듯도 싶습니다.

 

성경읽기 2 - 신명기 21:22, 23

이 본문의 맥락을 이해하기에 좋은 본문이 있습니다. 신명기 2122, 23절입니다. 물론 설교자가 인용하고 해석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2, 23)

Elie Posner © The Israel Museum, Jerusalem
Elie Posner © The Israel Museum, Jerusalem

죽을죄를 저지르고 처형당한 사람이라도 해도, 그 시체를 그날에 장사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의 하나입니다. 죽은 자를 두 번 죽이지 않도록 명령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한, 장례를 치르지 못한 죽은 자는 내세가 위협받는다는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범죄로 인해 처형당한 이조차도 당일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앞서 말한 천륜이고, 인륜입니다.

그러나 오늘 살펴보는 설교자의 설교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1장에, 나무에 매달린 이 시체를 밤새 두지 않고 내려야 되는 경우는, 자기가, 자기가 죽을죄를 범하여서 나무에 매달렸을 때에는, 그냥 곧장 내립니다. 그런데 이 두 이 일곱 아들들은요? 이 일곱 아들들은, 자기가 죽을죄를 행했습니까? 행하지 않았습니까? 행하지 않았습니다. , 지금 나무에 달려있습니까? 자신의 선조였던 사울왕의 그 잘못, 좀 더 크게 보면, 이 이스라엘 온 땅에 내려진 하나님의 재앙을 지금 풀어버리고, 그 하나님의 재앙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지금, 이 일곱 명의 아들들이 대신하여서, 대신하여서, 지금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설교자는 시신을 수습하지도 장례도 치르지 못한 상황, 그로 인해 고통받는 리스바, 그런 상황을 일으킨 다윗의 어떠함에 다가서지 않습니다. 시신이 나무 위에 매달려 있는 상황을 두고, 무죄한 자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재앙을 끊어 버리기 위한 '대신 죽음', 일종의 대신 속죄의 죽음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아래 본문을 다시 살펴보면 더 충격적인 현실이 드러납니다.

12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거리에 매단 것을 그들이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13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거의 죽은 지 10여 년 된 사울 왕과 요나단 왕자의 뼈와 거의 6개월이나 나무에 매달려 있던 일곱 왕자의 뼈가 함께 합장되는 장면입니다. 유대인들은 1차 장례와 2차 장례 풍습을 이어왔습니다. 당시 가나안, 블레셋, 고대 이집트의 장례풍습도 제각각이었습니다. 1차 장례는 시신을 흙에 묻지 않고 다양한 재질의 관에 넣어 석회암 바위 굴 등에 1차 안치하였습니다. 시신이 다 부패하고 난 다음에는 뼈를 추려서 가족 납골함에 합장하는 두 번째 장례를 치르곤 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열조에게도 돌아갔다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49:29)라는 야곱의 유언도 그런 뜻입니다. 한 편 6개월간 밖에 방치되었던 일곱 왕자의 시신은, 이미 살점은 다 사라지고, 완전히 뼈만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이 짧은 본문 안에 다양한 장소가 언급됩니다. 요단강 동편, 오늘날 요르단 북쪽 요단강 가까운 쪽의 길르앗 야베스(데가볼리 도시의 하나인 따바까트 파흘Tabaqat Fahl 또는 펠라Pella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갈릴리 호수 남쪽의 벧산, 베냐민 땅 '셀라'가 그것입니다. 여기에 일곱 왕자의 시신이 매달려있던 기브아 등입니다. 셀라와 기브아는 그렇게 거리가 떨어져 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급작스럽게 이런 합장 행사를 치른 것일까요?

 

3. 짧은 생각 : 예수 묵상?

설교자는, 본문 속 사건으로 들어가서 리스바의 애통해 하는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에 더 충실하여 대신 속죄의 죽음의 열매, 즉 재앙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는 믿음의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일곱 왕자의 죽음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이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본문인가요? 혹시 설교자가 자신만의 자유로운 묵상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설교자는 성경 본문의 행간을 자연스럽게 읽어나가는 것에 소홀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맥락없이 대속을 떠올리는 것은 다소 지나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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