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강간당했다고 몰살해? (2)
[곽건용] 강간당했다고 몰살해? (2)
  • 곽건용
  • 승인 2018.03.20 06: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디나 강간과 세겜 몰살 사건(창세기 33:18-34:31)
이 글은 꽃자리(2015년 2월 27일)에 실렸던 글로, 글쓴이 곽건용 목사의 동의를 얻어 두 번에 나눠 게재합니다.1번재 글에 이어 두번째 글을 올립니다. - 편집자 주

 

©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3.

이젠 이 얘기가 뭘 말하려는지 따져볼 순서다. 이 얘기도 유다와 다말 얘기(창세기 38)처럼 뭘 말하려는지, 무슨 교훈을 전하려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딱히 전하려는 교훈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 사건의 결과로 뭔가 이뤄졌다는 말도 없다. 창세기 35장은 이런 사건이 없었다는 듯 야곱이 하느님의 명을 받아 베델로 올라가 제단을 쌓았다고 말한다. 텍스트는 디나가 아기를 낳았는지 안 낳았는지도 밝히지 않는다. 이후로 디나가 다시는 등장하지 않아서 우린 그녀가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대체 이 얘기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이 얘기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의 공존(coexistence)과 동화(accommodation)의 문제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니까 얘기의 핵심은 강간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 금지라는 말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통혼은 결국 이스라엘과 가나안이 공존하고 동화하는 한 방법이다.

강간사건 후 하몰과 세겜이 청혼했을 때 야곱이 취한 태도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청혼을 받겠다는 건지 받지 않겠다는 건지 아리송하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남자들을 몰살한 후에도 야곱은 그 때문에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보복 당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는 시종일관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반면 아들들의 태도는 분명하고 단호했다. 적대적이고 호전적이더니 결국 시므온과 레위가 직접 칼 들고 나가서 그들을 도륙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보인 상반된 태도는 가나안에 정착한(또는 정착하려는) 이스라엘의 딜레마를 상징한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고립되고 적대하느냐, 그들 사이에 섞이고 공존하고 동화하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었던 거다. 이 고민은 디나가 강간당한 걸 종교적 의미가 담긴 타메느발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과 할례라는 종교의식을 도륙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과 동화되는 두 가지 길은 서로 통혼하는 것과 하나의 경제단위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몰이 야곱에게 했던 제안, “우리 사이에 서로 통혼할 것을 제의합니다. 따님들을 우리 쪽으로 시집보내어 주시고 우리의 딸들도 며느리로 데려가시기 바랍니다.”(9)라는 말과 우리와 함께 섞여서 여기에서 같이 살기를 바랍니다. 땅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자리를 잡고 여기에서 장사도 하고 여기에서 재산을 늘리십시오.”(10)라는 말에 잘 표현돼 있다. 야곱이 보인 애매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는 동화될 걸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고, 아들들의 단호한 태도는 섬처럼 고립되어 살겠다는 입장의 표현이다. 특히 시므온과 레위의 살육행위는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고 땅을 독차지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의 표현이다. 그들이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요구한 건 자기들에게 동화되라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고립이냐 동화냐 하는 데는 종교적 동기와 경제적 동기가 작용한다. 그들은 디나가 당한 일이 은 오십 세겔과 결혼으로 해결되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은 그게 이스라엘 안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이방인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민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였다는 거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이 통혼의 전제조건으로 할례를 내건 건 속임수가 아니라 그들을 자기 방식으로 동화하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다.

한편 경제적 동기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몰이 청혼할 때 섞여 살면서 장사도 하고 재산도 늘리라고 한 제안뿐 아니라, 세겜 사람들을 도륙한 후 성읍을 약탈한 데서도 드러난다(“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죽은 시체에 달려들어서 털고 그들의 누이가 욕을 본 그 성읍을 약탈하였다. 그들은 양과 소와 나귀와 성 안에 있는 것과 성 바깥들에 있는 것과 모든 재산을 빼앗고 어린 것들과 아낙네들을 사로잡고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다 약탈하였다”(27-29). 이걸 보면 두 집안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건 경제적 이득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얘기를 읽으면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받아가면서 팔레스타인 땅을 독차지하려는 현재 이스라엘의 막가파식 만행이 오버랩 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다. 안 그런가?

Nicolas Poussin (1594–1665), The Abduction of the Sabine Women(1633–34)

4.

이 얘기를 읽고 나면 과연 이래도 되나? 누이가 강간당했다고 성읍 남자들을 몰살하는 게 정당한가? 그렇게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게 옳은가?’라는 의문이 안 들 수 없다. 보복이 됐든 종교적 열정이 됐든 경제적 이득이 됐든 대량학살을 해가면서 목적을 이루는 게 과연 정당할까? 그걸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걸 우린 신앙의 이름으로 용인해야 하나? 야곱의 아들들은 끝내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보복이 두려운 야곱에게 아들들이 퉁명스럽게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하는 데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31)라고 대꾸하는 걸로 얘기는 끝난다. 여기서 그들이 자살테러로 우리 동족을 죽이는데 그걸 그대로 두란 말이냐?”면서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는 현재 이스라엘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과거 그들이나 현재 그들이나 할 것 없이 경제적 이득에 눈이 멀어 자기들이 세계평화에 어떤 위기를 초래하는지, 공존과 협력의 가능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못 보고 있다. 훗날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두고 한 시므온과 레위는 단짝 형제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은 난폭한 무기다. 나는 그들의 비밀 회담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들의 회의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고 그 분노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들을 야곱 자손 사이에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흩어 버릴 것이다.”(창세기 49:5-6)라는 예언조차 자기들이 한 짓에 대한 추상같은 질책이 아니라 엄청난 상처를 내놓고 일회용 반창고 붙여주는 정도로밖엔 들리지 않는다.

이 얘길 세겜 사람 입장에서 읽으면 어떻게 될까? 바룩 할페른(Baruch Halpern)은 다윗 왕에 관한 책 <David's Secret Demons: Messiah, Murderer, Traitor, King>에서 다윗 왕의 일대기를 그의 입장(또는 그의 입장이 반영된 사무엘서의 입장)이 아니라 그의 적대자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이와 비슷하게 디나와 세겜 얘기를 야곱 집안사람들 관점이 아니라 세겜 집안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역사서로서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쓰인 책이다. 거기엔 이집트나 가나안이나 아시리아나 바빌론, 페르시아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후대로 가면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의 입장과 지위가 약화되긴 하지만 여전히 역사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걸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얘기다.

우리도 그 관점으로 구약성서를 읽어야 할까? 그들이 저지른 온갖 좋고 나쁜 짓을 그들이 평가한 대로 평가해야 하나? 야곱의 아들들이 행한 잔인한 살육과 약탈을 단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하다고 봐야 할까? 또는 판단을 유보하는 게 옳을까? 나는 과거에 이 처참한 얘기에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그게 옳은 태도일까? 그걸로 만족하는 게 성서를 바르게 읽는 걸까? 하느님 이름으로 자행된 살육과 약탈을 하느님 구원역사의 일환으로 보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

과거에 알라의 이름으로 자행됐고 현재도 자행되고 있는 폭력이 정당하지 않은 것처럼 야훼의 이름으로 과거에 자행됐고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살육과 약탈 역시 정당하지 않다. 이 판단은, 현재 내가 믿는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넘지 못할 장벽을 쌓아놓고 그들더러 동화되지 말라고 명령하는 하느님, 곧 이스라엘이 과거에 믿었던 하느님이 아니란 사실에 근거한다. 특정 종족 안에 갇혀 있는 신, 자기를 믿는 종족만 위해주고 그들을 적대하는 자들은 대적하는 신, 자기 말 잘 들으면 달라는 걸 모두 내주는 신, 나는 이런 신을 믿지 않는다. 자기를 믿는 자들의 실수와 죄는 적당히 견딜만한 징벌을 내려서 퉁치고 자기를 믿지 않는 자들의 실수와 범죄는 돌이킬 수 없이 멸절시키는 걸로 다스리는 신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텍스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안다. 거룩한 책인 성서가 옳다고 하는 얘기는 뭐가 됐든 옳다고 판단하라고 텍스트는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독자를 강요한다. 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읽는 독자는 이 강요에서 자유롭지 않다. 성서는 야훼가 한 일은 무조건 옳다는 입장에서 쓰였다. 안 그런가? 하지만 성서가 야훼가 한 일이라고 전하는 게 정말 야훼가 한 일일까? 혹시 이스라엘이 야훼가 한 일이라고 믿었던 일이 아닐까? 야훼가 한 일이라는 판단은 야훼 자신이 내린 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내린 게 아닐까? 그래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건 죄다 야훼가 했다고 강변한 게 아닐까? ‘죄다란 부사어는 과장일 수 있겠지만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야훼가 한 일, 또는 야훼가 허락해서 한 일이라고 주장한 경우도 있을 거다. 그렇다면 진짜로 야훼가 한 일과 야훼가 했다고 이스라엘이 주장한 일을 구별하는 게 문제가 아닐까? 나는 이게 구약성서 신학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 본다.

야훼 입장에서나 이스라엘 입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이 얘길 그들은 왜 후대에 전했을까? 무슨 목적으로, 왜 이 얘길 기록해서 전했을까 말이다.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다. 이 얘기가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계명의 본보기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 얘기의 기원을 이방인과의 결혼이 불가피했던 바빌론 포로시기에서 찾는다. 다른 학자들은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창세기 49장이 묘사한 대로 여타 지파에 비해 안 좋은 조건 속에서 살았는데 이 얘기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레위 지파가 사제의 지위를 누리는 걸 설명하지 못한다는 거다.

일부 학자들은 이 얘기가 특별한 메시지를 전할 목적으로 전승된 게 아니라고 본다. 특별한 뜻이나 목적 없이 밑바닥 히브리인들이 일상에서 겪은 얘기를 전한 것이란 얘기다. 가장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인 주장이지만 한번쯤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대부분의 역사는 권력 가진 자들이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자기들이 사건을 이끌어가는 걸로 서술된다. 이름 없는 민초들은 그들 행위의 대상일 뿐이고 그들이 이끌어 가는 역사에서 수동적 역할을 하는 데 머문다. 구약성서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지만 거긴 드물지만 민초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얘기가 있다. 대개는 히브리 민초들이 객체에 머물고 수동적인 역할을 하지만 간혹 그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얘기들이 있다는 얘기다. 디나 강간 및 세겜 학살 사건이나 지난 글에서 다룬 유다와 다말 얘기가 그 예가 된다.

이런 얘기의 특징은 겉으로 드러난 특별한 교훈이 거기엔 없다는 점이다. 특정한 도덕이나 윤리를 지키라고 하지도 않고 전통적인 관습을 따르라 하지도 않는다. 여기선 종교적, 도덕적인 교훈을 찾기 어렵다. 그런 게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이거다. 이 얘기들이 하고 싶은 말은, 역사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신들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게 아니라 갖은 욕망과 탐욕이 이글거리며 분출하고 분출하면서 속이고 빼앗고 상처 입히고 죽이는, 그러기에 신음하고 탄식하며 기다리고 갈망하며 하늘을 보는 민중들과 그러한 민중들의 삶 속에서 꿈틀거리는 신이 역사를 굴리는 세력”(이정희, 살림의 상상력, 51-52)임을 말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이 얘길 전한 사람들이 다양하기에 각각의 전승자가 다른 생각으로 얘길 전했을 수 있겠다. 이 얘길 여러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이유가 이거다. 통혼과 동화 금지가 중심 메시지일 수도 있고, 시므온과 레위 지파의 형편을 설명하는 게 하고 싶은 말일 수도 있으며, 메시지가 첨부터 없는 게 메시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육당한 세겜 사람들을 제외하면 여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강간당한 디나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사건 전체를 통해서 철저하게 침묵당하는 객체요 대상이니 말이다. 그녀는 한 순간도 주체였던 적이 없다. 그녀는 강간당했고 세겜 집으로 끌려갔으며 오라비들이 그들을 살육했을 때 다시금 집으로 되돌려졌다. 모두 수동적이다. 그는 행위의 주체였던 적이 없다. 그녀가 이 사건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쉽게도 구약성서엔 다시는 그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밑바닥 히브리인들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던 사람, 그것도 이방인에게 강간당한 여자였던 거다. 사람은 자기의 억울한 사정은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자기보다 더 처절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억울한 사정은 눈에 안 들어오는 걸까? 정말 그런가?

 

글쓴이 곽건용 목사는 LA 지역의 나성향린교회 담임목사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