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러가 서 있는 자리, 내가 떠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자리
켈러가 서 있는 자리, 내가 떠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자리
  • 정한욱
  • 승인 2018.03.18 10: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한욱의 팀 켈러 읽기' 후기
ⓒ정한욱

팀 켈러를 다 읽었습니다. 다섯 권으로 마치려고 했는데, 막판에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가 추가되는 바람에 총 여섯 권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괜찮았던 책은 <탕부 하나님>이었고, 가장 흥미가 덜했던 책은 <센터처치>였습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따로따로 가장 얇은 책과 가장 두꺼운 책이로군요! 각 책과 저자인 팀 켈러에 대한 간단한 감상평을 남기는 것으로 이번 탐사 여행을 마칠까 합니다. 물론 이번에도 신학 문외한이 쓴 단순 관전평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 그리고 켈러가 지은 두 권의 변증서를 이해하는 데 도서출판 100에서 나온 <신학 공부를 위해 필요한 101가지 철학 개념>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켈러의 책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평

두 권의 변증서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한다><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팀 켈러는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와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현란한 인용과 함께 다채롭게 제시합니다. 그리고 현대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세속주의보다 정통 기독교가 우주의 존재와 삶의 의미, 윤리의 필요를 훨씬 잘 설명해 주는 말이 되는종교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이 책들에서 세속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이성이란 없으며 이성적인 것은 전이성적 믿음과 전제들 때문에 조건 지워져 있다는 전제주의 변증학,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합리적이 되기 위해 증거의 지지나 논거가 요청되지 않는다는 개혁주의 인식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변증하기 위해서는 모든 증거를 취합하여 볼 때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해야 세상이 가장 잘 설명된다는 확률적 우위혹은 누적사례 논증을 사용합니다. 공격을 위해서는 개혁주의 변증학에, 입증을 위해서는 C.S. 루이스에게 많이 빚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권의 강해서 마가복음 강해서인 <왕의 십자가>에서 팀 킬러는 예수님의 삶을 만왕의 왕으로서의 정체성(성육신하신 하나님)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목적(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두 가지 화두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다룬 강해서인 <탕부 하나님>에서는 이 본문을 유랑과 귀환의 모티프,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구원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이 두 권의 강해서는 복음서 본문에서 역사적 예수의 삶이나 하나님 나라와 같은 성서 신학적 주제를 탐구하기보다, 성육신이나 구속 혹은 구원의 서정과 같은 고전적인 개혁신학의 교리를 읽어내는 데 훨씬 관심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살았던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삶의 현장 안으로 깊이 파고들기보다, 21세기 뉴요커들의 삶 안으로 구원과 관련된 교리적 가르침을 세련되게 번역해 들이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팀 켈러는 공의를 추구하기 위해 교리를 뜯어고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이며, 지극히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리라도 올바르게 이해만 한다면 그 길을 쫓는 자들도 세상에서 공의를 추구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정의의 실현이 아닌)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며 건전하게 양육하는 것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공의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강인한 의지를 갖추고 정의를 추구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센터처치 목회자가 아닌 제게 <센터처치>는 솔직히 그다지 흥미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신학적 비전을 보여준다는 처음 몇 장과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다루는 장, 선교적 교회를 다루는 장 등 몇몇 부분만 읽고 많은 부분을 건너뛰었습니다. 한 가지 눈에 띄었던 것은 복음이란 한 개인이 구원받았다는 기쁜 소식이며, 사회변화는 오직 복음전파의 결과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팀 켈러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1. <탕부 하나님>의 마지막에 나오는 "신학적으로 건전하고 철저히 정통적이면서도 동시에 (지적으로 세련되고) 한결같이 은혜로운 상태가 가능하다"는 말이 그의 책과 사역의 지향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톰 라이트를 자주 인용하지만 전통적인 바울 이해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새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고, 선교적 교회 운동을 자세히 설명하지만 이머징 교회나 에큐메니컬 운동, 칼 바르트와 관련이 있고,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에게 공감하며, 복음서를 강해하거나 정의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보편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너무도 복잡한 주제여서 제한된 지면에 다룰 수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자신의 논의에 도입하는 것을 끝끝내 피합니다. 그러면서 대속, 중보, 은혜를 통한 구원과 같은 전통적인 교리만 가지고도 이 모든 주제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옥에 대한 생각은 정통신학보다 C.S. 루이스의 견해에 더 가까워 보이고, ‘창조과학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네요!)

켈러는 선하고 신실하며 지적일 뿐 아니라 균형 감각과 정의감까지 갖춘 훌륭한 목회자요 변증가인 것으로 보이지만, 김영민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긴 다리로 물가를 노닐면서 물고기만 쪼아 먹는 학과 같은 분이지, 결코 아가미가 생길 때까지 타자의 물에 몸을 담그거나 익사의 공포를 뚫고 범람하는 타자의 강물 속으로 몸을 담글분 같지는 않습니다. 상대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며 관중들의 피를 뜨겁게 가열하는 인파이터라기보다는, 상대와의 거리를 유지한 채 툭툭 유효타를 던지면서 철저히 안전 위주로 경기를 운영하는 아웃복서 스타일이랄까요? 아직도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보수적 교단에 몸담은 초대형교회의 목회자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행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관전자의 입장에서는 좀 답답해 보일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3. 책을 읽어가며 가장 편안하지 않았던 부분은 반성의 부재였습니다. 이 부분은 비단 켈러뿐 아니라 미국의 복음주의권 저자들에게 전반적으로 느끼는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그는 서구 세속주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확신에 찬 어조로 정통 기독교야말로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제(답이 되는 기독교)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그 답이 되는기독교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요? 노예제도와 인종차별과 식민주의를 하나님과 성경의 이름으로 지지했던 과거의 서구 백인교회를 말하는 것인가요? 지금도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그가 속한 미국의 보수장로교단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트럼프에게 80%의 지지를 보냈다는 미국제 복음주의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그 건전하고 정통적인 신학으로 빚어진 과거와 현재의 교회 중 도대체 어떤 교회가 그 답을 보여준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4. 물론 그는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기독교에 대해 여기저기서 비판합니다. 그런데 정통 기독교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그의 비판은 적어도 제가 본 책에서는 두 문장 이상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과연 그 훌륭하다는 답이 되는 기독교는 그가 그렇게도 비판하는 세속주의자유주의 신학그리고 현대성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하는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예를 들어 이머징 교회)만큼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와 왜곡된 현재에 대한 치열하고 정직한 반성의 과정을 거쳤거나 거치고 있을까요? 세속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그가 인용하는 저자 중 많은 분이 세속주의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21세기의 다원적인 사회이자 세계역사의 변방인 한국에서 살아가는 저는 저자에게서 은연중 느껴지는 좋았던 과거의 기독교 세계(Christendom)’에 대한 향수와 순진한 서구(미국)중심주의가 그다지 편안하지 않습니다.

ⓒGoogle

5. 결론적으로 켈러는 여러 이유로 진보적인 신학을 수용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상태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변화를 갈망하는 많은 목회자나 평신도들이 심각한 위험을 감수하거나 지나친 모험을 감행할 필요 없이 접근하기에 최적화된 저자 중 한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리를 지적이고 세련되며 균형 잡힌 방식으로 정황에 적실하게 풀어내는 그에게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꼈지만, 애석하게도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는충격이나 존재의 심연을 직접 건드리는심오함까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로 좋은 저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멘토인 C.S. 루이스나 조나단 에드워드처럼 시대를 초월한 최고의 저자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약간 부족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명민한 인식이 그의 공부의 본질이자 성공의 비결이라는 한 페이스북 친구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어쩌면 바로 그 명민함이 그가 당대를 넘어 오랫동안 기억될 저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6. 현재의 제 관심은 세계기독교입니다. 팀 켈러는 존경할 만한 목회자요 탁월한 변증가이자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제가 떠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자리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제게 와 닿는 말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보다, “기독교의 모든 교회적, 신학적, 도덕적 범주는 역사적이고 상황적이지만 동시에 참다운 기독교 진리에 온전히 참여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역사는 모든 시대의 족속과 민족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는 세계기독교의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는 복음주의 역사신학자 마크 놀의 말과 나는 이제 나 자신의 교회 내에서만, 나 자신의 땅 위에서만 신학 하지 않고,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 신학하기를 시작했다. 나의 뿌리는 개혁교회이지만, 나의 미래는 하나의 교회다라는 거장 위르겐 몰트만의 말입니다.

 

글쓴이 정한욱 원장은, 우리안과 원장으로 일터에서 복음을 품고 살아가고자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