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나무)을 뽑을 만한 믿음, 공적 신앙의 고백이다.
뽕(나무)을 뽑을 만한 믿음, 공적 신앙의 고백이다.
  • 김동문
  • 승인 2018.03.1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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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에서 뽕을 뽑을 만한 믿음 다시 읽기

같은 말도 듣는 사람, 장소, 때에 따라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의미일 때가 많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 그 두 번째 이야기는 갈릴리 버전이다.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청중과 예수 앞에 있던 특정 산과 장소로서의 바다(갈릴리 호수)가 있었다. 또한 특정한 나무(들)가 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존재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담겨있다. 함께 성경 속으로 들어가보자. 성경 읽기를 하면서 현지 지도를 곁에 두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누가복음 17:6)

 

가이사랴 빌립보 상상도, 맨 왼쪽에 가이사 아구스도 신전

이 산, 여기, 저기?

마태복음 17:20의 '이 산'은 어떤 산이었을까? 예수와 무리들 앞에 자리한 특정 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산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막고 서 있던 그 산이었는지, 다른 산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여기'는 어디였을까? 이 메시지를 주고받은 지역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이었다. '저기'는 어디였을까? 가이사랴 빌립보 북쪽 산지는 아니었다. 가이사랴 빌립보 남쪽 고원 평야지역 아니면 그보다 더 남쪽에 자리한 메롬 물가(훌라 분지), 아니면 '갈릴리 호수' 방향을 뜻한 것이었을까? 이 대화 이후 예수와 그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지방)로 내려갔다.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 '저기'는 갈릴리 호수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메시지에서 이 산은 어떤 방해나 삶의 어려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은, 가이사 아구스도 신전이 자리한 가이사랴 빌립보의 바니야스 지역의 언덕이나 산으로 보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또한 갈릴리 지방에 자리한 갈릴리 호수를 '저기'로 지목한 것으로 보는 것도 자연스럽다. 

텔 단에 자리한 상수리 나무 곁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신전 터

이 뽕나무, 바다?

같은 메시지임에도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본문이 누가복음 17:6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산' 대신에 여기서는 '이 뽕나무가 언급된다. ‘이 뽕나무는 돌무화과나무(Sycamore Tree)로, 진짜 뽕나무와는 무관하다. 마을의 중앙 또는 입구에 우리나라 마을에 자리하던 그 정자나무처럼 심겨져 있던 나무가 있었다. 다른 나무들로는 그런 분위기를 자아낼 수 없다. 돌무화과 나무는 아무데나 서식하는 흔한 나무는 아니다. 큼지막하게 자란 돌무화과 나무는 예수 시대에 특정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넉넉하였을 것이다.

또한 돌무화과나무(뽕나무)가 단순히 나무일 수도 있지만, 이 나무가 상징하는 실제적인 어떤 존재 또는 장소가 있었을 것이다. 상수리나무는 전통적으로 산당, 제단()을 뜻하였다. 돌무화과 나무(뽕나무)가 가이사 아구스도(황제)와 그 신전, 그를 떠받드는 체제와 어떤 상징적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전통적으로 중근동에서 돌무화과 나무는 신령한 나무로 간주되었다. 이집트나 앗시리아 문명에서는 생명의 나무로 인식되었다. 주술적, 신비로운 능력이 나오는 나무로도 인식했다.

돌무화과나무, 그 열매 모양이 무화과를 닮은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로마 황제를 위한 아구스도 신전이 자리한 곳은, '상수리나무'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을 돌무화나무로 빚댄 것이다. 예수의 어법에서 종종 조롱섞인 풍자를 느낀다. 헤롯을 여우로, 헤롯의 화려한 궁궐을 여우굴로, 로마 황제를 공중의 새 즉 까마귀로, 그의 궁궐을 까마귀 둥지로 조롱하는 것 같은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누가복음 9:58)

해롯을 로마 제국의 직간접적인 극심한 압제와 친로마 입장에서 타협하는 종교 지도자들로 고통하던 갈릴리인들에게, 그 압제의 상징적인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예수의 메시지를 따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산은 어떤 장벽이나 극복하여야할 과제 그것을 넘어서는 공적 청산대상일 수 있다. 내가 바라봐야할 절망의 그 어떤 것... 절망, 희망... 비관적 희망, 비관적 낙관... 많은 느낌들이 다가온다.

공중의 새, 공중나는 새는 까마귀를 의미한다.
공중의 새, 공중나는 새는 까마귀를 의미한다.

역사성을 배제하고 읽는 성경은 개인의 영적 도전이나 유익에 집착하곤 한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는 공적 신앙, 역사속에서 살아내기를 도전하고 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 '뽕나무를 뽑을만한 믿음'은 단지 삶의 어려움,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메시지 그 이상이다. 단지 추상적인 어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져라 하는 식의 원론적인 메시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성, 역사성 가득한 그 시대 현실 한복판에 던져진 시대의 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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