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옮길만한 믿음', 공적 신앙의 고백이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 공적 신앙의 고백이다
  • 김동문
  • 승인 2018.03.11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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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산을 옮길 만한 믿음' 다시 읽기
겨자꽃이 가득한 들판

성경에 일반 명사로 보이는 적지 않은 사물이나 사람, 장소나 시간, 공간, 사건이 사실은 특정한 고유 명사인 경우들이 많다. 같은 단어이지만, 그 대상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표현과 실제적인 뜻을 담고 있는 것을 원론적으로, 추상적으로 해석함으로, 그 메시지의 어떤 힘을 소멸시키는 경우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중 하나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에 관한 것이다. '산'을 어떤 난관, 장애, 어려움 등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산'은 특정한 산, 장소를 뜻하는 것이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는 비슷한 듯 다른 배경에서 주어진 메시지이다. 그것은 말씀하신 장소와 대상, 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태복음 21:21)

이 산' 그리고 바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는 주제로 많이 애용되는 본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 메시지에 나오는 을 넘어서야할 장벽, 어려움 등으로 풀이하곤 한다. 그런데 겨자씨 만한 이 본문은 예루살렘 지역에서 예수가 전한 메시지이다. 그리고 이 산’, ‘바다등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은 어떤 산일까? 이 산은 감람산 맞은 편 모리아산에 자리한, 예루살렘 성전이다. 이 이야기의 무대는,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에서 감람산을 거쳐서 예루살렘 성으로 가는 길, 즉 예루살렘 성전 동쪽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성을 마주한 자리였다. 오늘날 성전산으로도 불리는 예루살렘 성전 자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그곳 모리아산 자리다. 예루살렘성의 지형을 봐도 산이다.

기드론 골짜기(시내) 하류에서 가까운 사해

바다는 어떤 바다일까? 그것은 소금 바다, 아라바 바다, 동쪽 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해로 볼 수 있다. 감람산과 예루살렘 성전 사이에 기드론 골짜기의 기혼 샘은 흐르고 흘러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에스겔의 47:8~12절은 이것을 더욱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에스겔 47:8~12절, 개역개정

예루살렘 남동쪽, 감람산 서쪽에서 시작되는 기드론 골짜기, 사해까지 이어진다.
예루살렘 남동쪽, 감람산 서쪽에서 시작되는 기드론 골짜기, 사해까지 이어진다.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이 사해 바다에 이르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이처럼, 예루살렘 지역에서 감람산 지역에서 모리앗산(예루살렘성)을 바라보면서 예수가 이 말씀을 하실 때 사람들 눈에 들어온 '이 산'은 모리앗산 아니면 감람산..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하는 이 산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다'는 기드론 골짜기 길을 따라가면 이어지는 사해(염해 = 소금 바다 = 동해 바다 = 아라바 바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루살렘에서 사해까지 (구글지도 갈무리)
예루살렘에서 사해까지 (구글지도 갈무리) ⓒGoogle

마태복음 21:21은 예루살렘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이다. 모리아산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들어 소금 바다에 던지라 하여도 그 일이 이뤄진다는 것은, 입체적인 메시지였다. 죽은 종교 예루살렘 성전 제사는 죽은 바다, 청산하여야할 적폐로서의 산은 아니었을까? 그곳에서 사람들은 에스겔의 환상을 꿈꾸고 있지 않았을까? 이루어지면 좋은데 이뤄질 것 같지 않은 그 날, 여호와의 날을, 성전의 회복과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날을. 마치 죽음의 바다가 생명의 바다로, 죽음의 종교의식이 생명의 예배로 회복되는 것을 꿈꾸면서도 절망하는 이들에게, 이 메시지가 다가갔다.

이런 점에서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단지 삶의 어려움,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메시지 그 이상이다개인적으로 가져야할 적극적인 믿음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추상적인 어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져라 하는 식의 원론적인 메시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성, 역사성 가득한 그 시대 현실 한복판에 던져진 시대의 음성이었다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언적 선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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