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첫 예수 공동체의 미투 운동
[곽건용] 첫 예수 공동체의 미투 운동
  • 곽건용
  • 승인 2018.03.09 23: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곽건용 목사의 바울과 그의 복음을 묻는다 2-4 - 엡 5:22-25 딤전 2:18-25

너무 시대를 앞서간 아모스

Gustave Doré, 아모스(1865)
Gustave Doré, 아모스(1865)

아모스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를 누렸던 시절이라 할 수 있는 기원전 8세기 초 여로보암 2세 시대를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문헌에 남긴 최초의 ‘문서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남 유다의 드고아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이자 목동으로서 거친 광야에서 양떼를 몰고 다녔던 그는 남 유다뿐 아니라 북 이스라엘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온몸으로 비판했습니다. 끝없는 탐욕으로 겨레를 착취하는 왕족을 비롯한 특권층과 사제계급을 가차 없이 비판했던 겁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너희가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그들에게서 곡물세를 착취하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는 못한다. 너희가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는 못한다. 너희들이 저지른 무수한 범죄와 엄청난 죄악을 나는 다 알고 있다. 너희는 의로운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법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였다(5:11-12)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사람을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기껏 한다는 말이 “초하루 축제가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 수 있을까?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낼 수 있을까?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자.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자. 찌꺼기 밀까지도 팔아먹자.”하는구나(8:4-6).

아모스 선지자의 고향 드고아 전경

매우 신랄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 중 권력자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이 아모스였습니다. 이런 비판을 들은 왕족과 특권층과 제사장들은 둘 중 하나였을 겁니다. 양심이 좀 있는 사람은 속이 뜨끔했을 터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저 놈을 얼른 없애버려야겠는데 야훼의 예언자라니 이를 어쩌나…….’하며 속상해했을 터입니다. 반면 그들에게 착취당하던 서민들은 말만 들어도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시원했겠지요.

하지만 이 메시지의 내용은 그리 놀랍거나 새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이미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계명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계명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기본정신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지켜야 할 자들, 특히 권력자들이 지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권력자와 서민 모두를 막론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깜짝 놀라게 한 선언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아, 나에게는 너희가 에티오피아 사람들과 똑같다. 나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내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블레셋 족속을 크레테에서, 시리아 족속을 기르에서 이끌어 내지 않았느냐? 나 야훼 하느님이 죄 지은 이 나라 이스라엘을 지켜보고 있다. 이 나라를 내가 땅 위에서 멸하겠다……. 나의 백성 가운데서 ‘재앙이 우리에게 덮치지도 않고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하고 말하는 죄인은 모두 칼에 찔려 죽을 것이다(9:7-10).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선민의식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그 선민의식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위기상황이 아니라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를 누리던 때에 그 시대를 이끄는 권력층을 신랄하게 나무라면서 ‘이스라엘이 이방족속과 뭐가 다르냐, 다 똑같다, 너희들은 선민이라서 재앙이 겪지 않을 거라고? 웃기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 선언이 대수롭지 않게 들리지만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선민이란 자의식과 자존감이 최고의 가치였던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들과 에티오피아가 뭐가 다르냐고? 게다가 오랫동안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블레셋과 다를 게 없다고?’라며 아모스에게 돌멩이를 던지려 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야훼를 자기들만 위하고 돌봐주고 보호해주는 종족신(tribal god)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이 야훼를 모든 종족의 하느님, 곧 보편신(universal god)으로 믿게 되는 획기적인 전환은 아모스 시대로부터 적어도 3백 년 후에나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아모스는 시대를 3백 년 이상 앞서 갔던 선지자였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메기지는 그 시대에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 시대에 목자는 천한 신분이었다. 예수 시대는 그 차별이 더욱 격해졌다.
아모스 선지자 시대에 목자는 천한 신분이었다. 예수 시대는 그 차별이 더욱 격해졌다.

바울로부터 뒷걸음질 치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3:26-28)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5:1)라고도 선언했습니다.

저는 이 선언이 바울 서신 일곱 권을 관통하는 중심사상이라고 믿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바울 서신 일곱 권은 이 선언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까지 말하겠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더불어 우리 옛사람이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열린 새로운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서 참여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렇게 열린 새로운 시대, 새로운 현실을 바울은 두 단어, ‘해방’과 ‘자유’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첫 예수공동체는 이 해방과 자유를 지키고 보존하지 못하고 옛 시대로 회귀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라고 선언하고 바로 다음에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했지만 첫 예수공동체는 그 당부를 지키지 못하고 종의 멍에에 다시금 자신을 옭아매고 말았습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와 디모데전서는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쓴 걸로 되어 있지만(1:1) 사실 이 서신은 바울보다 후대를 살았던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빌려서 쓴 서신입니다. 에베소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바울이 직접 쓴 서신들과는 다른 내용을 말하는데 오늘은 거기에 대해 얘기할 여유는 없고 다만 한 가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얘기만 보겠습니다.

그는 아내들에게는 “아내 된 이 여러분, 남편에게 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몸의 구주이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남편들에게는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니 아내는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하랍니다. ‘모든 일에’ 라는 대목에 주의를 기울여주십시오. 이 말은 공연히 붙여진 의미 없는 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모든 일에’ 아내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얘기입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랍니다. 이 말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균형을 맞추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내주심 같이’라는 말이 붙어 있지만 에베소서의 저자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상하관계입니다. 따라서 그와 유사한 관계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 역시 상하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긴 그걸 따지기 전에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므로 모든 일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으니 둘 사이의 관계의 불평등성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없다는 바울의 주장과 명백히 상반됩니다. 아내와 남편 관계는 가정 안에서 실현되고 구체화된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 다름 아닙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모든 일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에베소서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열린 새로운 세상에 부합하지 않는 가치관이요 다시금 종살이의 멍에를 짊어진 것일 따름입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다음으로 디모데전서는 이 관계가 교회에서 어떻게 변질됐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디모데전서 역시 바울이 쓴 걸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에베소서보다 더 후대의 문서입니다. 이 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바울의 메시지가 어떻게 왜곡되고 퇴보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디모데전서는 여자들더러 “소박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몸을 꾸미라고 했습니다. 화려하고 값비싼 장신구로 치장하지도 말랍니다. 편지의 저자는 여자의 외모와 치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런지 궁금한데 그 이유를 짐작할만한 구절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한다면서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답니다. 갈수록 태산 아닙니까. 하지만 결정판은 그 다음입니다. 여자가 조용해야 하는 이유는 하와가 아담보다 나중에 지어졌고 또 아담 아닌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졌기 때문이랍니다. 에덴동산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후자는 그렇다 칩시다. 아담이 아닌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먹자고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먼저 지어졌으니 여자는 조용해야 한다는 얘기는 또 뭡니까? 먼저 지어진 게 무슨 벼슬이라고……. 여자에 대해 마무리 짓는 말이 제일 가관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너무 터무니없어 웃음도 안 나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에베소서와 디모데전서의 주장은 바울의 그것에서 명백히 퇴보했습니다. 바울이 너무 앞서 나갔던 걸까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없다고 말한 바울은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지나치게 앞선 주장을 했을까요? 에베소서는 바울에게는 없던 위계질서를 다시 세웠고 순종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니 아내는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는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여자는 교회에서 절대 나서지 말아야 하고 남자를 지배하려 해서도 안 되고 구원을 얻으려면 아이를 열심히 낳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으로부터 명백한 퇴행입니다.

1974년에 발견된 일본군 패잔병, 2005년 Yoshio Yamakawa(87), Tsuzuki Nakauchi(85)이 최종적으로 발견된 일본군 패잔병을 기록되었다.

2005년에 2차 대전에 중에 탈영한 일본군 두 명이 전쟁이 끝난 줄 모르고 필리핀 밀림 속에서 숨어살다가 60년 만에 발견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달라진 줄 모르고 무려 60년을 살아왔던 겁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여자들은 디모데전서가 가르치는 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으면 이 일본 군인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 바뀐 줄 모르고 밀림 속에서 수십 년 살다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문명세계와 동떨어져 사는 아미쉬 교도도 아니고 배움의 기회도 갖지 못한 것도 아닌데 여자는 나서면 안 된다고, 여자는 집과 교회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잠잠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여성에게 목사와 장로로 안수하지 않는 교단이 안수하는 교단보다 많습니다. 여성목사, 여성장로가 있는 교단에서도 여성들은 엄청난 성차별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피해자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화계, 연극계, 문단 등 예술계는 물론이고 교육계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검찰도 성범죄 청정구역이 아니란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교회는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2015년 가을에 가톨릭 보스턴교구에서 다수의 신부들이 저지른 아동성추행 사건을 그린 영화 <스포트라이트>가 나왔는데 그 정도는 일부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한국교회 안에서의 성범죄도 엄청날 걸로 짐작됩니다. 그 동안은 밝히면 덕이 안 된다느니, 전도에 해가 된다느니 하며 쉬쉬하고 숨겨왔지만 그러다가 지금은 곪을 대로 곪아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젠 늦었지만, 그리고 아프지만 있는 그대로 샅샅이 밝히고 근본대책을 세워 실행해야 할 때입니다. 늦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때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투 운동은 곧 예수 운동

오늘 설교제목이 ‘첫 예수공동체의 미투 운동’입니다. 제목만 보면 초대교회에도 미투 운동이 있었나, 하고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린 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때 미투 운동 같은 게 있었는지, 우린 알 수 없습니다.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겠습니다. 저는 시리즈 설교에서 바울이 이중으로 오해를 받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걸 오해라고 부르기보다는 의도적 왜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 정당할지 모릅니다. 바울은 교회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제국과 그의 영향을 받은 로마교회에 의해 비정치적인 사도로 채색됐습니다. 그 얘기는 전에 했으니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Times

첫 예수공동체는 예수님과 바울의 급진적인 비전을 받아들였고 그 비전의 토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그가 세리든 여자든 이방인이든 율법적으로 정결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죄인이거나, 그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 바깥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느님은 그들 모두를 사랑으로 품으신다는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복음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여자나 남자의 차별이 없다는 바울의 선언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첫 예수공동체는 모두가 자유하고 모두가 서로에게 종인 해방의 공동체였던 겁니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의 모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권력으로부터의 압력은 다양한 모양으로 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벌거벗은 폭력으로만 오지 않았습니다. 회유와 유혹과 왜곡의 시도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기존질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자유로운 체제가 아니라 위와 아래가 분명한 위계 위에 서 있었고 복종을 강조했습니다. 그 질서의 꼭대기에 있던 권력이 해방과 자유가 최고 가치인 예수공동체를 가만히 뒀을 리 만무합니다.

교회 안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벌어진 일은 바울의 서신에 가필이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쓴 일곱 서신에 바울의 본래의 메시지와 양립할 수 없는 내용이 덧붙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름으로 바울의 본래 정신과는 일치하지 않는 내용의 서신들이 작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런 행위들이 모두 저작권 위반이나 지적소유권 위반의 범죄이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스승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일은 일종의 스승에 대한 오마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에베소서나 골로새서가 그런 서신들입니다. 물론 이 서신들이 바울의 사상을 보수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쓰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서신의 저자들은 바울의 급진적인 사상을 소화하지 못했고, 그것이 현실에 맞지 않다고 봤던 겁니다. 그 후에 쓰인 디모데서나 디도서 등 이른바 ‘목회서신’(pastoral epistles)은 보수화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서신들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첫 예수공동체의 미투 운동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역사라는 것이 언제나 강자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첫 예수공동체의 리더는 남자였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과 바울의 정신을 따라 위계가 없는 평등한 공동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동체 안에 위계가 세워졌고 남자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게 됐으며 그에 따라 순종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여자들에게 침묵이 강제됐습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와 디모데전서는 그런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Guercino(1591~1666), Jesus and the Samaritan Woman at the Well(1640~41)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이렇듯 위계가 강조되고 여성에게 침묵이 강제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평등과 여성의 발언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안 그렇습니까. 첫 예수공동체에는 시간이 흘렀지만 예수님과 바울의 정신을 굳세게 보존하고 실현하려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초대교회에서 미투 운동의 목소리는 사라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2천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교회는 위계질서의 바탕 위에 존재했고 여성들의 목소리와 권리는 억압받아왔습니다. 이제 그 목소리가 아주 조금씩 강고한 벽을 뚫고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에베소서나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복고적인 말씀들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게 아닙니다. 비록 성서에서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오랫동안 억압되어 잘 들리지는 않지만 해방과 자유의 목소리를 되살려 내는 일이,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이 예수의 제자의 삶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서를 바르게 읽는 것은 글자를 따라가면 읽는 게 아닙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간의 글입니다. 성서를 바르게 읽는다는 것은 인간의 글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내는 것이고 거기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인종과 피부색과 문화와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온갖 굴레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뜻이 때로는 인간이 세운 질서 아래 갇혀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걸 찾아내서 오늘에 맞는 언어로 선포하고 실천하는 일이 예수의 제자의 삶이 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오랫동안 묻혀온 미투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