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흥 운동의 부정적 영향
대부흥 운동의 부정적 영향
  • 옥성득
  • 승인 2018.01.1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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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득 교수의 한국사 - 111년 전 평양대부흥과 오늘의 과제 (2)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지 장대현교회의 당회원
1909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지 장대현교회의 당회원

(1) 정교 분리 문제

선교사 중에는 서울의 헐버트와 같이 적극적인 정치 참여 신학을 가지고 반일 운동을 한 자도 있었고, 평양의 장로교 의사 웰즈나 북감리회 해리스 감독처럼 노골적으로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찬양한 선교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 중간노선을 유지했다. 정교 분리라는 이름으로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고, 근대화된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는 것을 환영하는 것이 선교본부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부흥 운동과 함께 교회 조직기에 들어가면서 선교사들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비정치화 노선을 택했다.

반면 한국 교인들의 신앙 노선은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먼저 진보 진영에서는 애국계몽운동과 항일민족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민족주의 우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나라를 구원하는 사회 정치 윤리를 정립해 나갔다. 전국적으로 구국 기도회가 실시되었고,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여자 교인들은 성미회 운동, 금은 가락지와 비녀를 바치는 탈환회 운동을 적극 전개함으로써 애국 부인의 상을 형성했다. 구국 비밀결사인 신민회도 기독교인이 주도했으며 각종 교육회가 조직되었다. 다만 무력 투쟁인 의병 운동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시장세 반대 데모, 을사조약 반대 상소 운동, 항의 거리 데모에 참여했다. 1907년 전후 한국교회 사진들을 보면 태극기와 십자기를 함께 게양하고 있다. 교회 옆에 학교를 세우고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 부흥을 경험한 한국교회의 주류 신앙이었다. 부흥파와 애국계몽파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1세기 유대교 민족주의와 20세기 초 한국기독교 민족주의의 지형도, 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새물결플러스, 2016), 371.
1세기 유대교 민족주의와 20세기 초 한국기독교 민족주의의 지형도, 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새물결플러스, 2016), 371.

이와 달리 소수의 과격한 기독교 민족주의 좌파가 등장했다. 이들은 을사오적 암살이나 친일파 제거 운동을 테러로 보지 않고, 국권 수호 차원의 '정당방위'와 '저항' 곧 일제 침략에 대한 국권 회복 차원의 개념으로 매국노 '처단'에 참여했다. 테러란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이지만, 레지스탕스란 침략의 원흉이나 대표자에 대한 응징을 말한다.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며 술 취한 운전사에게 운전을 맡기는 것은 우리 모두의 죄악이라고 본 것과 상통하는 입장이다. 1905년 전덕기와 정순만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평안도 장사들을 모집했다. 정재홍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자결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9083월 장인환과 전명운은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저격 살해했다. 190910월에는 동양 평화를 위해 안중근과 함께 우연준은 대한 독립군의 일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신민회 회원이던 청년 이재명은 190912월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을 칼로 죽이려고 했으나 상해만 입혔다.

이상의 민족주의에 대해 점차 사회 개혁이나 나라의 독립보다 사후 천당만을 바라보는 도피적 신앙도 자라나게 되었다. 그러나 기울어가는 국운을 보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신앙과 애국을 분리한 자는 아직 없었다. 일부 선교사는 친일적이었으나, 한국 교인 중에 친일파라고 할 만한 자는 아직 없었다.

이로써 교회 보존과 개인 영혼 구원을 중시하는 부흥운동 노선, YMCA를 중심으로 하는 애국계몽 교육운동 노선, 항일운동을 통해 민족 구원을 추구한 신민회 노선, 매국노 처단을 위한 무력 항쟁 노선 등이 발전하면서 기독교 운동의 네 가지 노선 분리가 일어났다. 마지막 노선의 기독교인은 만주와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의병 세력과 손잡고 기독교 무장 독립 운동을 발전시켰다.

 

(2) 부흥회 유형의 신앙

1935년 길선주 목사가 설교 중에 사망하고 장례식이 끝난 후 김교신은 한국 교회에 부흥회가 그 나름대로 공헌한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이후의 기독교는 부흥회적 신앙 형태, 곧 '성신 타입' 신앙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20년대부터 한국 교회 부흥회가 인위적인 집단 흥분 상태를 조장해서 감정적인 '성신 열병 환자'를 양산한 것을 비판하고 성령이란 전적으로 하늘에서 임하는 것으로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윤리적인 행위가 동반하지 않는 죄의 고백은 "마귀 하나를 쫓아 낸 후에 일곱 마귀가 도로 들어와 거하는" 것과 같으므로, 냄비가 끓듯이 '부흥회'에 의해 일시적으로 뜨거워졌다가 식어버리는 종교심은 신앙생활 속에 반영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부흥의 불만 바라는 자들은 현실을 떠나 도피하는 신앙이 되고 현실의 불의나 허위에 대해 개혁하는 예언자적 책무를 외면한다고 엄중히 비판했다. 특히 성신 타입 신앙의 비이성적, 반학문적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고, 19362<성서조선>에 다음과 같이 썼다.

금후 50년은 이성의 시대이며 연구의 시대이다. 냉수를 끼쳐 열을 식히면서 학구적인 양심을 배양하며 학문적 근거 위에 신앙을 재건할 시대에 처해 있다. 지난 50년간 조선 기독교가 대체로 성신 타입이었다면 금후에는 학구 타입이 되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학문과 신앙이 완전히 합금을 이룬 것이라야 금후에 닥쳐 올 순교의 시대에 능히 견디어 설 것이다.”(김교신, “금후의 조선 기독교,” 김교신 전집1, 124.)

​​​​​​​그러나 이후 한국 교회 50년은 거듭된 전쟁과 분단, 독재 정치 등 외부 상황과 내부의 부흥회 타입이 서로 합금하여 성장은 했지만 이제 그 비만 성장의 합병증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다.

 

(3) 부흥 환원주의

한국교회의 물량주의, 분열, 개교회주의, 대형교회의 세습, 윤리성 부재, 사회 영향력 상실 등의 여러 가지 문제를 인위적인 부흥 운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화적 담론이 주기적으로 등장했다. 어제 오늘의 심령부흥회나 축복대성회를 보면 욕망 과잉으로 기존 문제를 재생산하고 있다. 부흥 운동이 아니라 부흥 공연이 넘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지배한다. 그 배후에는 어떤 공연을 하면 그대로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는 주술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1907년 전후에 일부 무당들은 일본의 지도를 삶거나 불에 태우는 굿을 했는데, 그러면 일본이 망하리라는 주술적 신앙을 가졌다. 지금도 부흥 집회를 행사로 연기하고 공연하면 그것이 공적이 되어 성령이 움직이고 교회가 자동적으로 성장하리라는 주술적이고 흥행적인 사고가 많은 교인들의 사고에 숨어있다.

 

(4) 지리 경건과 지리 정치의 결합

10여 년 전 평양대부흥 100주년 전후에 전개된 한국 교회의 통일 운동과 "1907년 대부흥 Again" 운동에는 건강하지 못한 지리 경건(geo-piety)과 지리 정치(geo-politics) 자리 잡고 있었다. 지리 경건이란 특정 지역을 이상적인 공간을 성지(聖地)로 상상하고 그곳을 점령하려는 신앙적 노력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19세기 영미 개신교인들 가운데 세대주의자들이 팔레스틴 땅을 성경의 성지와 동일시하고 그곳의 거주민(일부는 기독교인)들의 권익은 돌보지 않고 유대인의 고토 회복 운동인 시온주의를 지지하여 현재 이스라엘 정부를 수립하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이 세속적 이스라엘 정부를 신구약의 이스라엘과 연속성을 가진 것으로 동일시했는데, 현재 한국 교인 중에도 이런 근본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유대인의 정치 운동을 지지하는 자들도 많다. 그 결과 이스라엘 성지 순례 관광지엔 한국인으로 넘치고, 성지 상품을 파는 것이 마치 선교인 것처럼 꾸미는 자들도 있다. 그 땅을 성경의 성지라는 고고학적 눈으로 보고 그곳에서 고고학적 유물을 찾아 유물을 소유하려는 시각도 이에 속한다. 성지의 지도와 사진을 팔고 관광으로 돈을 버는 상업주의가 바로 이 지리적 경건과 땅 신앙심을 재생산하고 이용한다. 구별된 성지란 없다. 모든 땅이 하나님의 땅이요 내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이 재발견한 만인제사장설이요 소명의식이다

지난 30년 동안 일부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북한 지역을 하나의 '텅 빈' 공간으로 그리면서, 기독교 선교를 통해 채워 넣어야 하는 타자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무주공산 부동산을 헐값에 사겠다는 투기 심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빈 땅에 과거 '조선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을 재건해서 과거 영광을 재현하는 북한 선교의 이미지를 조작했다. 오래 전부터 한 북한 선교 단체는 북한 지도에 해방 이전에 존재했던 수 천 개의 교회를 십자가로 표시하고 그 교회들의 재건 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런 선교 제국주의 유형의 신앙이 부흥 신앙과 결합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재건 운동은 바로 이런 풍수지리적 경건과 명당 신앙과 투기 신앙으로 진행되었다. 그 장대현 예배당을 재현하면 마치 과거 부흥이 재현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었다. 평양 양각도의 과학기술대학 건설 모금 운동을 보면, 기초 공사 과정에서 토마스목사순교기념예배당 부지 일부가 발굴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며 과기대학이 바로 그 예배당을 세운 평양 교회의 정통성과 토마스 목사의 순교의 전통을 잇는 학교라는 신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제너럴셔먼호가 평양까지 침략해서 민간인 7명을 살해한 행위 등은 무시하고, 1866년 토마스 목사가 '순교'의 피를 뿌리면서 성경을 전하고 전도한 것이 1907년의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고 해석하고, 그 부흥을 장대현교회 재건과 평양과기대 건축으로 연결시켰다. 이 세 사건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1907년 대부흥, 2006년 장대현교회 건축이나 과기대 건설사이에는 아무런 역사적 연관성이 없다. 사실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미화한 것은 그가 죽은 지 60년이 지난 후인 1920년대 중반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자처한 평양 교회가 한국 교회에서 교권을 잡고 그 세력과 근본주의 신학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념예배당을 건축하고 전기를 발간한 역사화 작업의 결과였다. 그 이전에는 한국 교회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보지 않았다. 1907년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토마스의 죽음과 연결시킨 자는 없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평양 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정서에 대항하기 위해서 평양 성지화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해방 이후 서북 교인들이 월남하여 다시 교권을 잡으면서 그 역사 이해는 계속되었다. 사실 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비꼬아 '예루살렘의 조선'이라는 말로 공격했다. 조선 현실을 무시하고 조선 전체를 신앙의 도시인 예루살렘을 만들려고 하는 도피주의를 비판했다. 지금도 많은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이상화화는 '조선의 예루살렘'은 사실 사회주의자들이 교회의 몰역사성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용어였다.

지금은 북한 핵무기 문제로 그 열기가 사라졌으나, 한 동안 개신교 교단들은 평양이라는 '성지'의 거룩성과 역사성을 선점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20071월 평양 방문을 신청한 기독교 단체가 100개가 넘었고, 북한 당국은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단체와 거래를 시도했다. 그러나 현실의 평양은 예루살렘 성지가 아니다. "평양 대부흥 어게인"은 부흥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성장주의, 건물주의, 공간주의의 욕망을 평양에 옮겨놓고 세를 과시하려는 일부 교회 정치가들의 성과주의가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에 불과했다. 각 교단이 평양의 과거 영광을 소유하고 선점함으로써 현재 쇠약해 가는 신앙의 정체성과 교세를 덮고 그들의 교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선교의 미명 아래, 통일 운동의 명분 아래, 그들은 평양에 '신앙'을 주는 대신 '돈'을 주었다. 한때 민주화 세력에 비해 통일 운동에 미온적이었던 보수 교단들은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교 지상주의를 통일 지상주의와 결합시켜 북한 선교에 나서지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5) 교회 성장 환원주의와 기복주의

 현재의 부흥 운동은 성령 충만한 결과를 개인의 축복과 교회 성장으로 축소 환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4: 18)라고 기록했다.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자유를 주고 광명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 성령 충만의 결과는 일차적으로 갈라디아서 5장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깨끗케 하는 개인적 성결이요, 사도행전 1장처럼 복음의 선포와 증인이요, 누가복음 4장처럼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고 자유와 평화의 희년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 성결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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