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부흥운동의 특징
1907년 대부흥운동의 특징
  • 옥성득
  • 승인 2018.01.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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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득 교수의 한국사 - 111년 전 평양대부흥과 오늘의 과제(1)

 

1907년 장대현교회 주일학교 여자반 교사들
1907년 장대현교회 주일학교 여자반 교사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전개 과정은 여러 책과 글에서 수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생략한다. 이 글은 그 부흥 운동의 특징을 재정리하면서 반성할 과제를 살펴보고 오늘 한국 교회에 적용할 역사적 교훈을 새기려고 한다. 참고로 19071월 평양에서 폭발한 부흥 운동은 다음 표와 같이 진행되었다. 1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남자 700명 여자 240명이 참석한 가운데 겨울 사경회가 시작되었고, 4일부터 매일 저녁 부흥집회가 시작되었다. 1차 성령 강림과 공개 회개는 14일 밤에 일어났고, 이어 평양의 남녀 학교 학생들과 여성들도 공개회개에 참여했고, 20일 주일 낮 예배에는 전 교인들에게도 회개의 영이 임했다. 이후 전국 여러 교회로 확산되었다.

옥성득
옥성득, 『한반도 대부흥』 (홍성사, 2009), 231.

 

 

1907년 대부흥운동의 특징

(1) 머리 신앙에서 가슴 신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교 문화권에서 이성적으로 교리적으로 믿던 신앙에서, 성령의 강권하심을 받아 체면을 아랑곳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는 체험적 신앙으로 바뀌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개와 중생이라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체험하고 개인이 변하자 가정과 사회가 변하게 되었다. 대부흥은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패러다임을 형성했다. 성경 공부와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와 중생, 주일 성수와 가정 예배, 적극적인 전도 활동이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되었다. 나아가 기독교 개인과 가정의 윤리가 형성되었다.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화와 성결의 삶을 살게 되었다. 첩을 둔 자들은 첩에게 재산을 주고 정리하고, 종을 해방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훔친 돈은 양심전이란 이름으로 원래 주인에게 찾아가 되돌려 주고, 미워한 자를 찾아가 화해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아내를 하나님이 주신 동등한 배필로 대우하고 아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고 교육시켜야 한다는 기독교 가정 운동이 일어났다.

 

(2) 분리와 차별에서 화해와 평등으로

기독교 사회 윤리는 막힌 담을 헌다. 여기에는 네 가지 차별--계급 차별, 인종 차별, 지역 차별, 남녀 차별--의 철폐가 시작되었다. 첫째, 계급 차별 완화의 완화로, 교회에서 양반과 상놈이 같이 앉게 되었고, 백정이 집사나 장로로 선출되었다. 서울 승동교회 백정 박성춘은 장로가 되었고, 그 아들 박서양이 의사가 되어 양반가와 사돈을 맺었다. 둘째, 인종 차별 완화로 선교사들은 이전에 한국인이 고상한 그리스도인의 생활할 수 없다고 보았으나 부흥 운동 통해 한국인의 깊은 영성과 윤리의식과 교회와 전도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보고 동서양이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한국 교인이 미국 교인보다 헌금, 전도, 예배 참석 등 여러 면에서 더 뛰어나다고 칭송했다. 이는 일본이 미국 언론을 이용해 한국인은 무능하고 게으르며 정부는 부패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 생산을 통해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선전하는 것에 대한 반대 운동이기도 했다. 그들은 오히려 한국이 아시아의 첫 기독교 국가가 되어 중국과 일본을 복음화하는 전략 국가가 될 것으로 보았다. 셋째, 지역 차별이 완화되었다. 500년간 서울에 차별받던 평양이 기독교 중심지가 되고 한국인 목사가 서북 지방에서 배출되면서 새로운 지도자층을 형성했다. 평양 사람들은 이를 천국 벼슬이라고 불렀고 차별받던 서러움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넷째, 남녀 차별 완화로, 개종한 남편은 예수쟁이로 불렸는데, 외출할 때 아내와 같이 가고 한 상에 밥 먹고 자녀 양육도 같이 책임졌기 때문이다. 또한 딸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잘 교육시켜 여자 선교사들처럼 의사와 교사로 키우자는 여학교 운동 일어났다.

 

(3) 주변 전도에서 타문화권 선교로

대부흥은 해외 선교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905년부터 평북 교회들은 서간도에, 함경도 교회들은 북간도에 전도인을 파송하여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1907년 장로회 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안수 받은 첫 목사 7명 가운데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첫 선교사로 파송하여 한국교회 해외 선교 시대를 열었다. 선교를 위해 목사의 7분의 1을 드렸다. 또한 감리회는 1910년 손정도 목사를 만주 선교사로 파송했다. 부흥 운동은 선교 운동과 함께 간다.

 

(4) 교파주의에서 교회연합으로

대부흥 운동 기간에 장로교 감리교 연합 운동이 절절에 이르렀다. 웨슬리안주의와 칼빈주의를 넘어 하나의 대한예수교회를 세우자는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비록 미국 본국 교회들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전도, 의료, 교육, 문서, 여성 사업 등에서 연합하여, 선교지 분할, 연합 성경, 연합 찬송가, 연합신문, 연합병원, 연합대학, 연합서회 등을 이루어냈다. 이 전통은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강력한 유산이다. 부흥 운동이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나아가야 할 당위성도 이 유산에서 찾을 수 있다.

 

(5) 서구 교회에서 한국 교회로

대부흥 기간에 토착적인 한국 기독교가 형성되었다. 미국 기독교와 중국 기독교가 아니라, 한국의 종교문화 토양에 맞는 한국적 개성을 지닌 새로운 한국적 기독교가 산출되었다. 토착적인 기독교 의례로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금식 산기도, 추도회 등이 만들어졌다.

전도를 위한 헌금으로 날 연보와 쌀 연보도 드렸다. 또한 1907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립 노회가 조직되고, 7명의 첫 한국인 목사를 장립된 것은 한국교회 자치를 위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감리교도 1901년 집사 목사를 임명한 후 한국인 목회자를 계속 산출했다.

 

(6) 지도력이 선교사에서 한국인 목회자로 이동하기 시작

한국 근대사에서 하늘이 열리는 경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고 성령 운동,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 낸 인물은 길선주였다. 그는 가난하고 한 눈이 멀었고 사회 불의에 눌린 자였으며 한때 도교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으나 실패한 후, 청일전쟁 피난 기간에 개인의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선교로는 민족적 위기를 구할 수 없으며 나라가 망하면 개인도 피폐하게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현실 세계에 대한 염세주의와 개인적 영성을 넘어서는 종교의 민족적 차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독교에서 육체의 눈과 영의 눈을 뜨고 하나님을 만났다. 길선주의 영성은 선교사보다 깊었고 그의 설교는 선교사들보다 더 강력했다. 부흥 설교는 한국인의 정서를 움직일 수 있는 한국어 설교가 더 강한 효과를 발휘했는데, 부흥회를 통해 한국인 설교자들의 지도력이 계발되고 향상되었다.

 

(7) 한국교회 무게 중심이 서울에서 평양으로

대부흥이 마무리되자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평양은 1945년 해방 이전까지 그 지위를 지켰다. 부흥 운동의 이후 교인 2/3와 목사 대부분이 평안도와 황해도에 존재했다. 평양시의 경우 벌써 1907년에 축호 전도가 다 이루어졌고, ‘기독교 도시로 불리기 시작해서 1920년대에는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1910년대에는 평양에서 제주도, 만주, 시베리아, 중국 산동 반도에 선교사를 보냈다.

한편 평양 지도력의 대두는 서울 경기도의 유교 양반이 지배하던 조선 시대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 지도 계층의 대두라는 사회사적 의미가 있었다. 500년간 차별받던 서북 상놈들이 민족 지도자로 등장했고,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105인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서북 지방인이었고, 19193.1 운동 때에도 절반 이상의 지도자가 서북 교회에서 나왔다.

 

과거 부흥에서 우리는 부흥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배운다. 첫째, 교인 훈련에서 머리 신앙과 가슴 신앙을 통합할 때 일어난다. 둘째, 교회가 차별, 혐오, 배제의 영을 배격하고 화해와 사랑과 포용의 정신을 함양할 때 부흥이 일어난다. 셋째, 부흥은 선교와 교회연합의 결과를 가져온다. 부흥은 한국적 영성과 신학과 지도력을 토착화시키고 주변부에 있는 평신도와 여성 지도자들을 세운다. 성령 운동은 영성의 새로운 개척지와 중심지를 만들고 사역자를 흩어 그 중심지를 유목민처럼 늘 움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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