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왜, 교회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을까?
교회는 왜, 교회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을까?
  • 최소연
  • 승인 2017.12.19 0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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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연의 발칙한질문시리즈 2
Sergey Ivanov  (1864–1910)
Sergey Ivanov (1864–1910)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러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도움이 될까 싶어 온라인 북클럽에도 가입을 했다. 그 모임에서 처음 읽은 책이 기독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였다. 제임스 헌터라는 종교/문화/사회이론 교수가 쓴 책으로, 기독교 내의 정치적 성향별 우파, 좌파, 재세례파문제의식(?), 문제를 프레임 하는 방식, 레토릭, 공과 실 등을 다소 장황하게 나열하고, 각각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저자가 맨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신실한 현존'이었다. 제도나, 문제접근 방식이나, 정치력이 아닌, 개인과 공동체가 존재하는 방식을 드러내었다고 기억한다.

천천히 책읽기를 시작하면서 고른 책들은 주로 기독교 관련 도서였다. 역사를 다루는 책들은 아니었지만 곳곳에서 기독교 역사의 조각들을 접하였고, 당시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교회는 어떤 시도를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런 흐름과 함께 기독교 사상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조금 엿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세계사는 잊은 지 오래기도 하지만, 이렇게 접하는 교회사는 왠지 내부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기분이랄까. 여태껏 익숙해 있던 세상에서 서 살짝 나와 보니......일단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고, 관심을 두지 않았던 혹은 나와 상관없었던 "옛날 일들"이 지금 내 고민과 만나는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뭐 하나를 깊게 파거나 넓게 읽은 것은 아니지만, 슬쩍 접해본 흥미로운 부분만 몇 가지 적어본다.

일단, 교부시대로 이어지는 소위 말하는 '초대교회'들은 매우 시끄러웠다. 교회 내부에서만 해도 이단을 가려내는 것은 늘 큰 문제였고, 당시 그리스 철학과 문화라는 배경에서 예수나 바울의 가르침을 해석하며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정말 다양한 (극단적이거나, 이단스럽기도 한) 해석을 가진 교부들도 있었다. 중세에 제도화 되는 과정에서는 다들 '정통성'을 입증하느라 말도 안 되는 evidence도 나오기 시작했고, 일반 성도들 사이에서는 성물이 신앙을 담보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중세 수도원의 다양하고도 흥미로운 사회적 역할이라던가, 중세 후기 활자와 인문학의 역할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진 것 등, 뒤늦게 시작한 책읽기의 재미 속에서 난 '이것 봐, 이단시비는 요즘 얘기만은 아니었어!'같은 탄성을 지르기도, 혹은 '성물은 우상숭배 아닌가? 이게 수 백 년 (혹은 천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아무도 문제제기를 안했단 말이야?' 같은 질문을 던지기도, '말도 안 돼, 장례식을 가지고 교회가 평민들을 이렇게 등쳐먹다니!!' 라고 흥분하기도 했다.

창세기 내용이 고대 근동 신화들과 공통되는 부분, scroll로 전해진 성서 문서들, 예수를 ''으로 불렀다는 사실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 등, 성서에 대한 시각도 새로워졌다. 사실 성서는 혼자서든 그룹으로든 꾸준히 읽기/공부하기를 못한 것도 부끄럽지만, 아직도 읽으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 참 펼치기 어려운 책이었다. 큐티를 해도, 본문 이해도 이해지만 큐티식 적용을 '끌어내기'에 늘 실패해왔다. 그런데 예수를 그 당시에 ''으로 불렀다는 사실이 함의하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라던가, 율법의 시대적 파격성이라던가, 그런 파격성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강조된다는 이런 굵직한 내용을 접한 것만으로도, 성서 이야기를 보는 시각이 새롭게 생기게 되었다. '오직 믿음', '구원의 확신'을 외치는 현대 우리의 왜곡된 신앙이 사실은 개신교를 있게 한 그 종교개혁, 그 당시 루터의 '오직 믿음', 혹은 칼빈의 '예정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들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일부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면, 난 그 부류와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두 경우 모두 그렇지 않았더라도, 나의 첫 질문이 폭발하지 않았다면 나름 절박한 마음으로 답을 찾으러 이렇게 책을 읽고 고민해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내가 젖어있던 교회의 공기, 분위기와 언어, 교회 고유의 그 문화는, 스스로가 evolve해온 컨택스트로 부터 고립되어야 한다고 말해왔고 고립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 사회적 배경, 다양한 사회 현상의 interaction 등이 내 신앙을 inform 하고 revolve 시키기에는, 그간 형성된 신앙적 사고체계는 이미 상당히 고정적이고 평면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왜 교회에서는 교회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을까? 왜 교회에서는 다양한 읽기를 하지 않을까? 교회의 역사를 사실대로 이해하는 일이 우리는 두려웠을까? 난 왜 이런 것들이 그동안 궁금하지 않았을까? 왜 우린 교회가 '변화하는 주체'가 아닌,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온 걸까? 그러한 변화에 있어서 세상이 '객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 신앙이 현실을 왜곡하고 거부하는 생생한 현장에서, 이제 이 현실이 우리 신앙을 어떻게 해체하고 어디로 이끌어 갈지 우리는 감히 질문할 수 있을까?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바꾸고 싶어 했던 세상의 모퉁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실제적인 언어로 말할 수는 없을까? 그리고, 그때마다 그 증인들에게 침묵했던 교회에 대해서 우리는 뒤늦게라도 뭔가 할 말을 준비할 수 있을까? 그 교회, 우리 교회들이 이미 세상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질문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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