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안에서 구원받지 못한' 이들은요?
'세월호 안에서 구원받지 못한' 이들은요?
  • 최소연
  • 승인 2017.12.16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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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그리도, 그러한 방식으로, "구원”과 그것의 “확신”에 집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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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질문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겉으로는 순응적이고 고분고분한 편이라 어디서든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서른 몇 해를 살다가, 내 종교적 신념과 정체성의 근본을 돌아보는 질문을 시작하게 되었다. 질문 한두 가지로 시작했으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평범한 30대 직장맘이자 1.5세 이민교회 성도로서 던지기 시작했던 질문들, 평범하지만 교회에서는 서로에게 잘 물어보지는 않고 혼자 꾹꾹 눌러왔던 질문들을 하나씩 풀어놓으려 한다.

세월호 참사가 터진 그 주일예배가 계기였다.

당시 다니던 교회의 설교시간은 참사에 대한 아무 언급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광고시간이 되자, 그날 소그룹 모임에서는 (참사에 대한) 아무 언급도 하지 말라고, 우리의 관심은 오직 배 안에 있던 사람 중 누가 구원받았는지에 있다고 목사님이 콕 찍어 말씀하셨다.

대학때부터 사영리와 전도폭발 훈련, 각종 선교대회, 단기선교, 다양한 수련회나 집회를 꾸준히 다녔고 구령의 열정한 영혼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으나, 도대체 이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 연고 없이 죽은 수백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침통함이나 위로 따위는 그 예배실에 존재할 자리가 없었다. 남편은 예배실을 뛰쳐나갔고, 난 예배 후 여러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그 말밖에 우리가 할 말이 없나요. 하나님은 그런 분인가요. 이웃을 사랑하라면서요. 선한 사마리아인은요.

세월호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교회의 침묵, 혹은 교회가 이해한 이 참사의 의미가 교회언어로 표현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처음으로 멈춰버렸다. “하나님의 뜻혹은 징벌과 같은, 친숙한 표현들이, 바다 건너에서 내가 느낀 어떤 상실감과 충격의 본질에 전혀 와닿지 못하고 한순간 비인간적이고 이질적인 외계 세상으로 부딪혀 왔다. 눈꺼풀에 있던 비늘이 벗겨진 듯이, 편안했던 그 세상이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라는 그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왜 가장 필요한 때에 말하지 않는가. 우리의 이웃사랑은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뻗쳐야 하는가. 우리는 구원받았으니 지옥에 간 사람들에게, 혹은 그 가족들에게, 매몰차도 되고 그래야 하는가. 그렇게 이기적인 구원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단 말인가. 왜 우리는 구원확신에 이리도, 꼭 이런 모습으로, 집착하는가. 그런 말을 하는 당신들과 우리들이 구원될 거라고 무슨 근거로 확신하는가. 도대체 우리가 그리도 집착하는 영생은 영원히 사는것인가, 천국에 사는 것인가, 우리가 사랑한다고 늘 고백하는 하나님과 사는 것인가.

의도 되었거나 소홀헸거나 가득했던 언론이 가득 내뱉던 오보들
의도 되었거나 사실 보도에 소홀했거나 가득했던 언론이 가득 내뱉던 오보들

 

교회는 정치적이지 말아야 한다는게 무슨 뜻인가? 그런데 왜 그런 정치적인 발언들이 강대성에서 쏟아져 나왔을까? 선하신 하나님은 왜 악에 대해서 침묵하실까? 고통 앞에서 수천년간 침묵만 하실 거면서, 왜 자유의지를 주셔서 인간이 고통의 길을 선택하는 길을 열어두셨을까? 왜 악을 선택할 수 있을만한 엄청난 존재로 인간을 만드셔서 입법자의 자리를 놓고 하나님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허락하셨는가? 그러한 인간들의 결정들을 존중하셔서, 그 결정들의 결과로 만들어진 비참하고 잔인한 세상을 보시면서도 수천년간 스스로를 제한하신다면, 도대체 사람은 하나님에게 어떤 존재인 것인가? 그런데 이런 모순과 간극을 초월해 보여주신 답이 십자가라면,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고통받고 죽는 방법으로 이런 문제들을 마주하라 하신다면, 그건 대체 무슨 뜻일까? 나는 그렇게 무능해보이는 신을 따라갈수 있을까? 그런 신의 뜻을 따라 산다는건, 직장맘으로 살기에도 벅찬 나에게 도대체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어릴적 어느 순간,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을 '갖게' 된 이후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 정체성과 내 근간의 기초를 바닥부터 갈아엎는 질문. 질문들로 인해 '교회'를 잃은 대신, 처음의 회심보다 더 큰 '회심'의 길을 찾고싶었다. 내가 직접 찾아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페이스북에서 정처없이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있는 많은 분들, 답을 주던 같이 묻던 함께 가려던 어른들과 선생님들을 만났다. 그리고 육아서와 요리책을 덮은지조차 한참되었던 그때, 정말 오랜만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도 내가 직접 리서치하고 찾고 골라서.

물론 그렇다고 일년에 책 수백 권씩 읽는 그런 집중력과 총명함은 발휘되지 않았으나, 책과 함께 질문들은 조금씩 더 뻗어갔다. 하지만 내게 '질문'이란, 특히 '교회에서 답해주지 않는 발칙한 질문들'이란, '세월호 안에서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다시 기억하는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왜 우리는 그리도, 그러한 방식으로, "구원과 그것의 확신에 집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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