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대중매체로 대중에게, 엘리트주의를 넘어 대중주의로
신학, 대중매체로 대중에게, 엘리트주의를 넘어 대중주의로
  • 최종원
  • 승인 2017.12.17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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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원
ⓒ최종원

 

1. BBC

이미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영국 BBC에서는 주일 오후마다 기독교 예배를 방송했다. TV에서 예배 전체를 중계했는지, 성가만을 틀어주었는지는 약간 기억의 혼동이 있지만 BBC 라디오에서 설교방송을 한 것은 분명하다. 아마, 쉽게 전통을 바꾸지 않는 영국인들의 특성을 생각하면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일 것이다. 바로 그 BBC 방송에서 유명한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의 모든 악의 근원: 신이라는 망상 (The Root of Devil: The God Delusion)”2006년에 방영했다.

아무리 기독교 전통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공중파에서 특정 종교의 예배를 방송한다는 것도 낯선 일이지만, 같은 방송국에서 그 반대의 극단에 서 있는 무신론 과학자와 함께 모든 종교를 모두 까기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도 놀랍기는 매한가지이다. KBS에서 아침에 촛불집회를 생방송하고, 저녁에는 태극기 집회를 밀착취재 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런 전통은 그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영문학자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2차 대전이 한창일 때 BBC 라디오의 시리즈 대담을 책으로 엮은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의 종교적 깊이와는 별도로 세계대전이라는 중차대한 위기 상황에서 영국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하나로 묶는데 큰 기여를 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정신적, 종교적 공황 상태에 있는 영국인들을 위한 BBC 방송의 프로젝트는 계속되었다. 캠브리지대 신학부에서 기독교와 역사 관련하여 BBC 방영을 염두에 둔 시리즈를 기획했다. 신학부 교수들이 원하는 기준은 성직자나 신학자가 아니고 교회사가가 아닌 일반 역사학자였다. 그 결과 추천된 인물이 캠브리지대 근대사 정교수인 허버트 버터필드였다. 그는 이미 나폴레옹 제정 시대 연구와 휘그적 역사해석으로 역사학자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버터필드의 동료들은 그가 기독교와 관련된 분야에 발을 디디는 순간 학자로서의 경력에 오점이 생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버터필드는 30대까지 감리교회의 평신도 설교자로 설교를 하고 한 때 성직자가 될 것을 생각한 바 있지만 이미 지난 과거였다. 버터필드 스스로도 성서나 신학 연구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신학서적을 거의 읽은 바 없다고 밝힌 상태였다. 어쨌거나, 그 과제는 버터필드에게 맡겨졌다. 강좌는 BBC에서 1949년 방영되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후에 <기독교와 역사 (Christianity and History)> (주재용 역, 대한기독교서회, 1984) 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뿐만 아니라 과학사 전공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과학혁명이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근대과학의 기원 (The Origins of Modern Science)> (1949)이라는 대작을 출간하여 역사가로서의 경력도 탄탄하게 이어갔다.

 

2. SBS

여름의 밴쿠버는 천당 바로 밑의 999당이라고 부른다지만, 빗줄기가 기약도 없이 흩뿌리는 겨울을 보내기란 고문이 따로 없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커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나마 겨울을 견딜 수 있는 몇 안 되는 낙이다. 주일 오후 오랜만에 맑은 날씨에 늘 모이는 교민 친구들과 팀 호튼에서 모였다. 어쩌다 SBS에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프로그램 얘기가 나왔다. 그 프로그램을 보지는 않았지만 우종학 교수님의 페이스북에서 SBS 프로그램 섭외를 거절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얘기는 산으로 들로 자유롭게 퍼져갔다. “지구가 둥근 게 아니래,” “이렇게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엄청나게 많아,” “너무 그럴 듯하지 않아?”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 “ 아폴로 호가 달에 간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얘기도 있잖아.” 이럴 때 나 같은 박쥐는 쥐 죽은 듯 있어야 한다.

지구가 둥근지 네모난지 본 적은 없으나 과학자들이 사실로 확립하고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음모론은 예상 외로 힘이 세다. 전공한 학자들이 나서서 대응할 필요조차 없는 상식적이지 않은 얘기라고만 하기에는 파급력이 너무 크다. 얼마 전 문제가 되었던 안아키라는 동호회도 그러한 사례일 듯싶다. SBS의 기획의도야 정확히 모르겠지만 공중파에서 이 문제를 다룰 정도라면 유사과학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짐작할 따름이다.

한편으로 반성하게 되는 점이 있다. 먹물로 살아가는 이들이 놓치기 쉬운 점이 이미 상식적으로 합의된 것일 것이라 으레 짐작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경우 중세에 대한 수업을 시작하면 목회자이건, 비목회자이건 최대의 관심사는 가톨릭에도 구원이 있는가 여부이다. 내가 구원이 있다고 한들 연옥이나 지옥에 있는 자들이 천국으로 올라가지도 않을 것이요, 그 반대도 아닐 터이다. 그래서 나의 구원도 아리까리한데 어찌 남의 구원까지 왈가왈부하겠으며, 이런 질문 자체가 천박한 질문이라고 해 버리면 십중팔구는 상처를 받는다.

백지에 처음 그리는 그림은 고정관념으로 자리하기 쉽다. 지난 해 밴쿠버 유스코스타에 창조과학 강의로 유명한 분이 와서 청소년들에게 젊은 지구론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돌아갔다. 한 가까운 지인도 그 강의를 듣고 딱따구리 두개골이 창조의 증거라고 주장해 우정을 택할 것이냐, 진리를 택할 것이냐의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전문가들이 볼 때는 어이없겠지만 대중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과학이라는 명분을 바닥에 깔고 있는 강의가 불특정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특히 대형교회에서 과학자나 교수라는 타이틀을 들고 가서 생활 밀착형’, ‘신앙 고민 해결형강의로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면 환호하게 된다.

물론 너무 유치해서 같이 토론하기 부끄러울 수 있다. 만약 우종학 교수님이 급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와서 논쟁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결국은 대중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쪽이 대중을 얻는다. 저들은 대중을 잘 알고 대중매체를 잘 활용한다. 종교개혁 전야에 수많은 스콜라학의 논쟁이 있었지만, 민중들의 마음을 얻은 것은 결국 테첼의 면벌부 선동이었다. 민중신학을 외친 것은 엘리트 신학자들이었지만, 민중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은 오중복음 삼중축복을 내세운 여의도 순복음교회였다.

 

3. 오지랖 엘리트주의를 넘어 대중에게로

재작년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수님 몇 분과 식사할 때 느헤미야의 성장은 상당 부분 이명박근혜 정권 덕이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태동부터 현재까지 상식 없는 두 정권과 함께 싸우느라 현장성을 놓치지 않았으며, 나는 그것이 가장 엘리트주의에 경도되기 쉬운 신학자들이 절묘하게 텍스트성과 컨텍스트성 두 가지를 지켜 나가게 만들어 주었다고 판단했다. 앞으로도 많은 사회적 과제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긴장의 밀도는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페이스북을 시작한지 한 달이 채 안 지났다. 친구 신청을 하는 30~40대 목회자분들의 관심사와 읽는 책들이 궁금하여 들여다보게 된다. 공통점은 어려운 신학, 철학 서적들이 대다수이며, 외국 저자의 책들이다. 신학 과정에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하거니와 신진학자들이 한창 새로운 흐름을 소개하기 때문이지 싶다. 그런데 내가 관심이 가는 책은 정작 많지 않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밀착형 고민을 풀어 줄 서적과 강의들도 아주 드문 드문 보인다. 그나마 내공이 깊은 국내 중견 학자들의 책과 강의가 간신히 균형을 잡아주는 느낌이다. 신학자, 목회자가 주도하는 엘리트 신학과 대중의 관심사 사이의 불균형은 더욱 심화될 수 있다. 그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신학적 사유를 이 땅의 교회의 고민과 밀착시킬 작업들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 같은 학제적 네트워크를 다양화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는 분야로 한정해 보더라도 서양사학자들 가운데 역사적 안목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시는 분들이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광주, 대구, 전주 등 곳곳에 계신다. 그 분들이 쓰는 글을 읽으면 지금도 내 눈이 반짝거린다. 신진 학자들뿐 아니라, 제도 교회의 역사에 대한 경륜이 있는 타학문 분야와의 학제간 논의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가는 데 또 다른 통찰을 줄 수 있다. 전쟁이 낳은 참혹한 악과 고통의 문제 앞에서 BBC가 왜 굳이 신학자가 아닌 C.S. 루이스나 허버트 버터필드를 원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글쓴이 최종원교수는,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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