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건강한 교회라는 신화
작고 건강한 교회라는 신화
  • 최종원
  • 승인 2017.12.0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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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계급에 대한 잡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2)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2). 미국 교회의 계급의식을 엿볼 수 있다.

교회 문제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대부분 무거운 주제로 연결된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교회론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럴 때면 세속적 사고에 찌든 나는 헛웃음이 나온다. 누구도 부부 싸움을 할 때 가정의 본질이 무엇이며, 결혼식 때 주례사를 분석하여 어떻게 부부 관계를 회복할 것인가 철학적 고찰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라는 가장 단순한 사실을 놓친다.

교회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본질적으로 민족계급이 핵심이다. 몇 가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초대교회 로마의 성도들은 무슨 언어로 예배를 드렸을까? 교황청이 있는 중세 로마에는 동방교회가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노플에는 가톨릭교회가 있었을까? 250년까지 로마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로 예배를 드렸다. 교회가 이민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11세기 중반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이 서로 파문하며 분리할 때 로마에 있는 동방정교회를 폐쇄하고, 동방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라틴교회를 없애버렸다. 지금 남아 있는 초기 교회들의 이름을 생각해 보면 교회는 민족으로 갈렸다.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이집트 정교회, 에디오피아 정교회 등등. 복음의 본질이 무엇이건 제도 교회에서 종교와 민족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축구, 야구, 골프, 증기기관, 철교, 의회민주주의 등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영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근대 기독교의 교파의 출생지도 바로 영국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독교 종파는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자신들이 속한 계급의식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이야 교파에 상관 없이 모든 교회가 비슷하지만 영국만 해도 교파에 따라 교회 색깔이 아주 다르다. 한국인이 멋모르고 영국 교회를 방문해도 거의 대부분의 교회는 방문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영국에서의 교회는 내부자 몇몇이 추천해 줘야 입회할 수 있는 폐쇄적인 클럽 같은 분위기이다.

미국 북서부의 몬태나 주(State of Montana)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2)의 주인공 노먼 맥클레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건너간 장로교 목사이다. 그 집안은 조용하고 고상한 중산 계급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노먼이 여자 친구 제시 집에 처음 인사 갔을 때 온 집안사람들이 기차역까지 마중 나와 왁자지껄 한다. 어색해 하는 노먼에게 제시의 어머니는 우리는 감리교라서 그러니 장로교인이 이해를 해 달라고 한다. 감리교는 서민들의 종교였다. 이렇게 되면 왜 미국 남부의 이른바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뽑았는지 이해가 된다. 사회적 계급과 백인의 민족의식은 복음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들이 트럼프를 뽑는 데 신앙 양심의 거리낌은 우리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여기에 교회의 본질, 복음주의의 본질 따져 봐야 의미 없다.

교회의 회복은 이상적인 초대교회라는 허공 속의 상상의 이미지를 찾는 데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 이런 고찰은 힘을 쓰지 못한다. 오히려 이 세상에 역사적으로 터를 디디고 있는 땅의 교회의 현실을 이해하고 분석해야 한다.

요즘, 작고 건강한 교회에 대한 관심이 많다. 하지만 큰 교회가 건강하냐, 작은 교회가 건강하냐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질문이다. 인구가 많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냐 그렇지 않느냐와 차이가 없다. 그 교회라는 사회가 어떠한 사회냐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와의 건전한 상호작용을 하고 소통하는 교회라면 큰 교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 만의 성도들이 출석하는 초대형교회들은 그 속성 상 굳이 사회와 교감하지 않고도 안에서 모든 것이 돌아갈 자체적인 동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공화국 내에서 독립하지 않은 자치 왕국이니 논외로 하자.

이민 교회는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한국에서 십 수 년 목회를 하고 목회를 좀 안다고 자부하던 이들도 이민 교회를 경험해 보면 경지가 다르다고 무릎을 꿇는다. 떠도는 얘기 중에 이민 교회는 대형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일반적인 지역 교회는 대부분 지역 내의 유사한 생활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한 교회 내에서 편차가 두드러지게 크지 않다. 하지만, 이민 교회는 한 교회 내에 경제적 수준의 편차도 매우 크고, 각각의 배경도 너무 다양하다. 그러니 목회자가 중간 값을 찾아 목회하기가 원천적으로 어렵다. 유일하게 규모가 큰 교회만이 다양한 필요를 채워줄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작고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기 쉽지 않은 구조가 이민 교회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컨텍스트에서 작고 건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여야 할까? 지금까지 교회 개혁 운동에 꼭 등장하는 것이 있다. 교회 정관, 목회자 임기제, 재정 투명성, 몇 명 이상이면 분립 개척 등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보통 이런 체제는 웬만한 규모의 교회는 잘 갖추고 있다. 오히려 주위에 이미 작은 교회를 시도했다 깨진 사례들을 적지 않게 듣는다. 나는 그 이유의 하나로 규모에 맞지 않게 온 세상 만민을 품고자 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지극히 비복음적인 생각을 해 본다. 작은 교회가 모두를 감쌀 수 없다. 큰 세상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다 품으려면 어느 정도 대형화 되어야 한다. 규모의 경제의 기초이다. 교회론을 아무리 들이 밀어봐야 소용없다.

그런 점에서 작고 건강한 교회가 다가가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고민이 좀 더 깊어졌으면 좋겠다. 더 세속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작고 건강한 교회는 계급의식을 좀 더 선명히 반영하는 교회일 수 있다. 금수저, 흙수저 계급이라는 말로 오용되었을 뿐 계급이란 사회학적으로 결코 차별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예전 홍세화 선생이 유럽에 비해 한국 노동운동이 잘 안 되는 이유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부재 때문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노동자들이 자부심을 갖고 연대하여 계급의식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이 속한 계급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교파가 발전해서 정파가 되었으니 세상 정당과 교회를 비교해도 크게 엇나가지는 않겠다. 교회 역사나 정당 역사가 오래된 유럽과 비교해 보면 한국은 계급적 이해를 반영하는 교회나 정당의 뿌리가 깊지 않다. 과거의 묻지 마 1이나 묻지 마 대형교회현상도 그런 것의 일부일 수 있다. 어쨌건 1번을 찍거나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그 정당이나 교회를 기댈 언덕으로 본다는 점이다. 아무리 배신을 당해도 그 관성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작은 교회 운동을 하는 이들이 자칫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여기가 아닐까 싶다.

작은 교회를 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대형교회의 대안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정의당 규모의 교회가 집권당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정의당은 작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더불어 작기 때문에 크게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유시민 작가가 정의당에 대해 작은 가슴으로 큰 세상을 껴안으려 하니 스스로 피 흘리고 주위에 상처를 준다는 말은 작은 교회도 적용될 수 있다. 이왕 작은 교회 운동을 하려거든 좀 더 충실하게 계급의식과 이해를 대변했으면 좋겠다. 그 교회들이 지향하는 대상이 예수께서 보듬었던 사회적 약자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건강한 작은 교회는 잘 짜인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춘 교회나 수가 적은 교회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의 이익을 위하는 교회여야 한다.

쓸 데 없는 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흐르는 강물처럼을 생각하면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교회가 가졌던 어설픈 주류의식이 떠오른다. 기독교 잡지 낮은 울타리에서 이 영화를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뉴에이지 영화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당시 죄의식을 안고 몰래 이 영화를 봐야 했다. 믿기지 않는다고? 구글은 진실을 알고 있다. 그때부터 기독교가 치기 시작한 것은 낮은 울타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게토에 가둔 견고한 철조망이었다. 어이없게 이 철조망에 걸려든 가장 큰 희생자는 마이클잭슨 내한공연 반대로 소송전(訴訟戰)까지 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었다. 이 때문에 이미지만 구긴 것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마저 돌이킬 수 없게 상실했다.

 

글쓴이 최종원교수는,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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