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완 윌리엄스틱한 제자도'
'로완 윌리엄스틱한 제자도'
  • 홍동우
  • 승인 2017.11.25 06: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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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 윌리엄스, 제자가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 복있는사람, 2017년
로완 윌리엄스, 제자가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 복있는사람, 2017년
로완 윌리엄스, 제자가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 복있는사람, 2017년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처참하다. 아니 어쩌면 교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지속적으로 처참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교회는 단 한 번도 우리네 인간들의 마음속에 충분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언자들도, 예수도, 제자들도 많은 군중들의 외침 앞에서, 십자가를 지고, 배신을 당했던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역사니까.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이목은 화끈한 MSG가 잔뜩 묻은 해결책을 향해 달려간다. 사람이든, 교회든, 가르침이든. 처참한 한국교회와 맞설 힘이 있다거나, 적어도 심리적인 답답함을 풀어줄 만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MSG형 해결책을 잔뜩 외친다. 고성으로, 고음으로.

반면 로완 윌리엄스는 매번 중저음을 고수하는 저자다. 그의 나긋나긋한 진술을 따라 가다보면 얼핏 날카로움을 만나기는 하지만, 날카로움이 는 아니다. 오히려 나긋나긋한 진술 가운데 묻어나는 낭중지추겠다 싶다.

이번에 번역된 <제자가 된다는 것>MSG가 잔뜩 묻은 제자도 책과는 전혀 결이 다른 책이다. 이를테면 <래디컬>(데이비드 플랫, 래디컬, 복음을 통한 철저한 돌이킴, 두란노, 2011) 이라든지, <팬인가 제자인가>(카일 아이들먼, 팬인가, 제자인가(Not a fan), 두란노서원, 2017)라든지.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 자체가 고음과 고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문제를 일원화시키지도 않으며, 다층적이기도 다면적인 문제이기에 해답 또한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답 없음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묵묵하게, 더 나아가 신실하게,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견지하라는 중저음의 주장이 바로 성경의 주장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그랬기에 예언자들도, 예수도, 제자들도 거절과 배반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겠지.

그러고 보면 로완 윌리엄스는 성경의 주장, 교회의 전통을 제대로 공명하고 있다. 제자도의 기본, 믿음과 소망 그리고 궁극적인 사랑의 참된 의미, 용서와 거룩함에 대한 해석, 교회가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해야 하는지, 그리고 영성은 무엇인지. 나긋나긋하게 중저음의 톤을 유지하면서도 그는 성경적 맥락, 교회적 맥락을 공명하기 위해 애쓴다. 너무도 식상한 주제지만 그의 중저음의 톤을 만나면, 그의 나긋나긋한 해설을 만나면 새롭게 생명을 얻는다.

중저음의 톤, 나긋나긋한 해설, 하지만 참신한 새로움. 이 모든 것을 총괄하자면 애써 로완 윌리엄스틱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제자도야 말로 '로완 윌리엄스틱'한 주제긴 하다. 묵묵하고, 끈질기고, 별 새롭거나 자극적이지도 않고, 하지만 그 제자도야말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동력이기도 하니까. 제자도에 대한 그의 책은 퍽이나 잘 어울린다. 그의 책도, (성경과 교회 전통 안에서의) 제자도도, 충분히 '로완 윌리엄스틱'하니까.

 

글쓴이 홍동우 전도사는 아내에게 잡혀 살고 신대원에 잡혀 살고 지역교회에 잡혀 사는, 광인 전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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