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예언자의 마음, 조금만 가져보기
[김동환] 예언자의 마음, 조금만 가져보기
  • 김동환
  • 승인 2019.03.08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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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사 6:1-13

1. 일기 같은 지난 설교들

날씨가 많이 풀리고 있는 것 같아요, 3월을 앞두고 여러 소식들이 있습니다, 만석 형제도 취직을 해서 내일부터 출근을 하고요, 저도 내일 한 학교와 계약을 하러 가요, 지난 학기에 다녔던 학교 수업시간이 줄어서, 어쩌면 두 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수업을 하게 될지 모르겠어요. 교회와 그림 배우는 일에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최대한 남겨두는 선에서 생활비를 버는 정도로 일을 하려 해요, 새로운 학교를 가야 하니 또 설레고 부담이 되네요.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는 분도 있는데, 어쨌든 새로운 변화들이 있는 3월을 맞이할 것 같군요!

오늘은 이사야 말씀을 나누려 하는데요, 찾아봤어요, 제가 예전에 이사야 본문으로 했던 설교들을요. 설교 원고들을 잘 정리해두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딘가 다 저장해놓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으로 설교를 했던 게 5년 전이더라고요, 제가 청소년 사역할 때, 중학생들을 가르칠 때 했던 설교가 있어서 찾아서 읽어봤어요. 읽어보니까, 마치 오래된 일기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5년 전에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할 때가 세월호 사건이 터진 후 한 달 정도 지난 때였어요. 광화문을 걸으면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아쉬움을 적었었어요. 또 그때 새로 부임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광화문에 빨간 글씨로 가톨릭을 욕하는 개신교인들의 팸플릿을 보고 마음 아팠던 일도 있었고요. 같은 교회인데 너무 집안싸움처럼 서로를 적처럼 여기는 모습이 아쉬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친구 목사님들과 그 장면들을 보고 밥을 먹으러 갔는데, 시장에서 파는 육회비빔밥을 먹었어요. 그런데 그걸 먹고 모두 식중독에 걸려서 다들 병원으로 갔거든요, 여기 의사 선생님이 계시지만, 제가 웬만하면 병원에 안 가는데, 그때 식중독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병원을 갔어요, 아마 식중독 걸린 건 제 인생에서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예전 설교를 보니 잊었던 일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여러분들은 설교는 안 쓰시니까, 일기 쓰시나요?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장치 같은 것들이 있으신지요? 하나쯤 있는 건 좋은 것 같아요.

 

2. 소명을 받다?

오늘 읽은 이사야 6장 본문은 아마 몇 년에 한 번이든 제 삶에서 주기적으로 설교를 할 본문일 거예요. 신학적으로 이사야에서 중요한 본문이기도 하구요, 개인적인 삶에서도 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본문이라서 그래요. 제가 신학교를 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거든요. 제가 성경을 읽다가 이 본문을 읽고 ‘그래, 나는 교사 말고 목사가 되어야지!’ 이렇게 신호를 받은 건 아니고요, 제 모교회 사모님께서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다가 이 말씀을 받고 저에게 신학교를 권면하셨어요.

물론, 사모님도 제 상황이 신학교를 갈 상황이 아닌 걸 알아서 처음엔 당황하셨데요. 그래서 몇 가지 기도응답을 더 받으시고,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교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때라, 열정이 넘쳐서 ‘네, 가겠습니다!’ 했는데요, 그게 대학교 2학년 때였어요. 3학년이 되어서 다들 임용시험 준비를 시작하니까, 저도 왠지 신학교를 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아, 나는 아닌가 보다’ 하고 저도 임용을 준비할까 했다가, 또 몇 가지 기도응답을 받고 신학교를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어요. 이 이야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져서... 하고 싶은 말은, 이 이사야 말씀이 어쨌든 제가 신학교를 가게 된 근원과 같은 말씀이라는 거예요. 동시에 저는 이 말씀 앞에서 늘 주저하고, 고민하고, 피하고 싶어 했던 거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오늘은 5년 전의 설교와 달리, 좀 더 솔직하게 이 본문의 의미를 나눠보고 싶어요.

자, 먼저 우리가 나눠야 할 이야기는 이거예요. 우선 저는 예언자가 아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예언자는 아니다. ‘이사야 본문으로 소명을 찾았다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할 수도 있는데요, 이 본문은 각자의 삶 속에서 스스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서 응답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기를 추천해요. 그래야 우리가 예언자로 부름 받았나?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거든요. 오늘 설교 제목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았어요. ‘예언자의 마음, 조금 가져보기’ 그러니까, 예언자는 아닌데, 여러분이 가능한 만큼, 욕심이 나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예언자의 마음을 가져보라는 거예요. 이사야의 본문을 읽을 때마다 말이죠.

 

3. 예언자란?

그럼 예언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옆에 한자 전문가가 계시지만^^; ‘예’ 자는 맡길 예, ‘언’은 말씀 언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어딘가에서 선포하는 사람이에요. 말씀을 옮기는 사람이죠! 미리 ‘예’ 자 가 아니라는 점, 그러니까 미래에 관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해요, 그건 무당이죠.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에게 전하느냐에요. 일반 대중에게 전할 때도 있지만요, 대부분은 왕에게 전해요. 공동체의 최고 권력자에게 말이죠. 그러니까 나라가 이상하게 돌아갈 때, 하나님이 누구야, 왕에게 가서 이 이야기를 전해라, 하면 움직이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인 거예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약간 유시민 씨? 와 역할이 비슷할 수도 있겠어요, 물론 사람마다 유시민 씨에 대해 평이 다를 수 있겠지만요, 건강하게 정부를 비판할 때 비판하고 좋은 조언을 해주고, 정권자들이 한 번씩 초대해서 조언을 듣고자 하면 움직여주고,,, 그러니까 성경의 예언자들은 무당보다는 정치인에 좀 더 가깝다고 보면 되어요, 그런데 우리는 왜 예언자들을 무당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많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냥 기초적인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봐요. 구약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장르가 예언서인데, 예언서는 솔직히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이해와 성경에 대한 좀 더 깊은 공부가 없으면 읽기가 어려워요.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호세아 이런 책들 말이에요. 그래서 약간의 신학적인 훈련이 필요한데 이거 없이 큐티를 해버리면 조금 문제가 생겨요. 예를 들어 이사야서를 내가 하루에 한 장씩 큐티를 한다고 해봐요. 오늘은 1장, 내일은 2장 이렇게 읽어나가는데, 문제는 분문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거든요. 분명히 이 장에서는 하나님이 화가 나서 다 심판하겠다고 했다가, 그다음 장에서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 이렇게 나가고, 또 그 다음장에서는 그러나 결국 다 망할 거야, 이렇게 엄청 왔다 갔다 해요.

그래서 공부 없이 읽었다간, ‘아, 오늘은 내가 심판을 받아야겠다, 죄를 많이 지었네’, 다음 날은 ‘아 오늘은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니’ 이렇게 이상하게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을 좀 변덕스러운 분으로 이해하게 되고요, 성경을 대충 읽으면 오히려 그런가 보다 하는데, 정말 진지하게 읽어버리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될 수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성경의 이렇게 어려운 책들은 공부를 안 할 거면 차라리 읽지를 말기를 권면해요. 정말 마음이 있다면 공부를 하고 차분히 읽어서 이사야 전체에 대한 이해를 가진 후에 한 장 한 장을 읽어야 메시지가 눈에 들어올 거예요. 이사야 본문이 어느 장은 심판이, 어느 장은 희망과 격려가 교차한다고 했잖아요? 그게 사실은 하나님께서 변덕을 부려서 그런 게 아니라, 이사야라는 책이 정리된 특징이 그런 거예요. 각 장마다 사실은 시대가 다르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때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나와있잖아요? 웃시야 왕은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졌을 때 남쪽의 전성기를 이끌던 왕이에요. 북쪽은 좀 크고, 남쪽은 좀 작고 약한 도시 느낌이었는데요, 우리나라처럼 딱 북과 남이 갈라 진건 아니지만, 어쨌든 두 왕정체제로 운영되었죠. 대략 기원전 750년쯤의 시대고요, 이사야 40장까지는 실제 이사야 예언자가 살던 시대의 이야기로 보면 되어요. 그리고 40장부터 터는 후에 이사야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이어 쓴 내용들이에요. 150년 정도 지나서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간 시대의 이야기, 거기서 5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는데도 정신 못 차려서 혼나는 이야기도 있어요. 40장까지는 앗수르라는 나라가 고대 근동의 제1의 힘을 가진 나라인데요, 40장 이후는 바벨론이란 나라가 제1의 힘을 가진 나라로 나오는 배경이에요. 조금 복잡하죠?

그러니까 이사야라는 예언서는 이사야의 메시지가 핵심이긴 한데, 그 정신을 계승한 이사야의 제자 공동체의 증언도 담겨있는 복합적인 책이라는 걸 알아두셔야 해요. 그게 성경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그럼 앞에 1-40장까지는 시간순으로 읽으면 되냐, 그게 또 그렇지 않아요^^;; 어느 장들은 시간순으로, 어느 장들은 시간과 상관없이 주제별로 되어있고요, 시간 순도 연대별로 되어있는 게 아니라 좀 뒤죽박죽이에요. 아니 좀 시간순으로 깔끔하게 글을 쓰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썼어요?라고 묻는다면 그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기 위해 가장 애쓰고 애써서 생각해낸 방법이라고 밖에 대답을 못하겠어요. 그리고 이런 특징, 원래의 이사야의 특징을 무시하고 읽으면 정말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서, 정말 성경을 소중히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이 2500년 전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부가 필요하다! 이 정도 이야기를 드릴게요.

이걸 신학교 1학년 때 처음 배웠는데요, 저도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그래서 구약 교수님께 이걸 교회에서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 했더니, 가르치지 말라는 거예요, 아니 그럼 일반 성도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거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어요. 숭실대 석사 공부를 할 때, 김회권 교수님께 배웠는데, 김회권 교수님이 이사야 전공을 하신 분이에요, 그 교수님은 이제 청년들에게는 가르쳐보라고 하셨어요. 저희 교회는 청년교회니까, 이렇게 오픈을 하는 거고요! 저는 소명이 이렇게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공유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절대 성경을 객관적으로 읽을 수가 없어요. 그냥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지, 아 오늘은 위로가 필요해, 오늘은 좀 잘못한 거 있으니까 혼내는 말을 들어야지 이렇게 되거든요. 그게 아니라 이사야서가 하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최소한의 신학 교양이 필요한 거 같아요.

이사야 1장을 보시면요, 이스라엘 내부의 썩은 문제들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시작해요. 1장 23절을 읽어드릴게요,

너희 지도자들은 주님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완전 사회비판, 약간 진보 뉴스에서 나올 것 같은 내용이죠? 아까 웃시야 왕 때가 남유다의 전성기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사회가 사실 굉장히 잘 살던 시절이에요, 부가 쌓이는 시대죠, 그런데 문제는 잘 살게 되니까 오히려 나쁜 일들이 더 생기는 거예요,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고 하고, 뇌물이 움직이고, 가난한 사람은 도와주지 않고. 성경에 가난한 사람이란 말이 처음 나오는 시기가 이렇게 나라가 잘살게 되는 주전 8세기에 처음 등장하거든요. 저희가 저번에 이야기한 율법의 중심 희년 이야기했죠? 50년에 한 번은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땅 투기를 없던 것으로 하고 원상태로 돌려놓는 리셋 장치 말이에요. 그런데 나라가 부강해지고 부가 쌓이는데 이 율법은 지키지 않는 거예요, 이 걸 제어하고 율법대로 정리하는 역할을 왕이해 야하는데 안 해, 그러면 누가 출동하는 거예요? 예언자가 나서는 거죠. 이사야는 이 전성기 시대에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 예언자예요.

나라의 안으로 이렇고요, 밖으로는 어떻게 하냐면 당시에 앗수르라는 나라가 세지고 있다고 했잖아요? 북쪽 이스라엘이 이제 앗수르를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나 아람이나 다른 나라들과 손을 잡아요. 남쪽 유다도 거기 합세하라고 하는데 거절하니까 내전이 일어났거든요. 북쪽과 남쪽은 분단 상황이긴 했지만 같은 민족인데 서로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6.25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남쪽은 또 겁이 나서 앗수르와 손을 잡으려 구하고요, 신앙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 거대한 정치싸움, 전쟁의 두려움 앞에 신앙이란 건 의미가 없어졌어요. 오늘날 기독교 국가들이 있지만 현실정치에서 신앙이 별로 작동을 안 하잖아요? 이사야 시대에도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어떤 걸 시키냐면 남유다에서 벌거벗고 다니라고 했어요. 3년 동안이 나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힘센 나라들과 외교정책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나라가 망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벗고 다니게 한 거예요.

이사야는 당시 왕이 자문을 구할 만한 지식인이었어요. 점쟁이 집을 생각하면 안돼요, 예언자를 볼 때요. 이사야는 사회적으로 높은 엘리트 계급의 지식인이고요, 당시에 거짓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언으로 돈벌이를 하는 예언자들이 있었어요. 왕이 잘될 거다, 하시는 정책 그대로 하시면 하나님이 복주실 거다, 이렇게 아첨하는 예언을 하고 돈을 받고 생활하는 예언자들이요. 모든 예언자의 시대에 항상 이렇게 돈으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사야는 이미 사회적으로 높은 사람이라 돈이 필요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서 떳떳하게 하나님이 하라는 말을 할 수 있었죠, 그런 이사야에게 옷을 벗고 다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일을 한 거예요, 이사야가. 하지만 사람들은 말을 들었을까요, 듣지 않았을까요? 말을 듣지 않았죠, 그래서 결국 앗수르에게 북이스라엘이 망하고요, 남쪽도 큰 위기에 처하게 되어요.

 

4. 예언자의 마음

돈 이야기가 살짝 나왔는데요, 어제 해부학 공부모임을 마치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저녁 먹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왔어요. 저 말고 건축 일하는 분 한분 빼고는 다 예술하는 분들이었는데요, 우리나라 미술교육의 문제,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여기도 좀 비슷해요 상황이, 미대 교수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부려먹고, 자기 작업에 어떻게 동원하는지 이야기도 들었고요, 예술인들도 결국 돈에 타협해서 움직이게 되는 현실, 그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위해 돈과 타협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싸워나가는지... 이사야 말씀을 묵상하고 준비하는데 이게 예언자들의 싸움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말이에요. 돈 때문에 메시지를 바꾸거나, 해야 할 말을 못 하거나,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죠.

이사야 말씀이 제 소명 본문이라고 했잖아요? 일단 제가 예언자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해두고 싶어요, 저는 하나님께 음성을 듣지도 않고요, 대통령과 친하지도 않아요, 전혀 정치적인 영향력 없어요, 제로입니다^^; 그 리고 이사야처럼 막 벗고 다니면서 몸으로 뭔가 보여줄 에너지도, 용기도 없어요. 다만 배우고 싶은 건, 돈에 타협하지 않고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자세. 저는 신앙이란 게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100%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어려워요. 하지만 여러분의 양심 안에서 몇% 타협할지, 그리고 그 %를 이사야처럼 0%로 맞춰가면서 살려는 몸부림이 있다면, 그게 예언자의 마음을 조금 닮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어려워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하나님을 위해 움직여보려는 마음, 그건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6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이 애타는 마음으로 이런 고민을 하죠, ‘내가 누구를 보낼까?’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자기 살고 싶은데로 살아가면 여러 악들이 생겨나는 세상에 누가 가서 그들을 말리고 정신 차리게 할지, 안타까워하시는 거예요. 거기에 반응을 할 수 있는 사람,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면, 예언자의 마음을 조금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이사야서에 나오는 아주 독특한 표현 하나만 보고 마칠게요, 6장 10절입니다.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응 이게 무슨 말이지? 사람들이 고침 받을까 봐 걱정이라고?’ 이런 의문이 생길 거예요. 이 구절에 대한 공감이 되었다는 게, 5년 전에 이사야서 6장을 설교할 때와 지금 말씀을 나눌 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연히 고침 받기 원하죠, 사람들이 변화되길 바라죠. 그러니까 이사야 예언자를 세운 거 아니겠어요. 알몸으로 돌아다녀서라도 이사야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게 하나님의 마음이시죠. 그러나 사람들이 안 변해요. 아마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가장 변하질 않아서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게 사람의 마음일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아는 거죠.

고아를 돌보라고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아를 돌보았나. 외교정책으로만 문제를 해결하지 말라고 해도 결국 외교정책 하다가 나라가 망한 게 이스라엘의 역사예요. 이사야는 전승으로는 톱에 잘려 죽었다고 해요. 평생 메시지를 전했지만 무언가 변화를 보지는 못했어요. 예언자의 삶이란 그런 거죠. 무당은 잘 맞추거나, 혹은 위로라도 주면 돈이라도 받고 사는데, 예언자는 그냥 무 페이로 살다가, 변화는 보지 못하고 그냥 고생만 하다가 죽는 거예요. 그게 예언자의 삶이죠, 그래서 조금만 가능한 만큼만 닮아보라고 하는 게요, 100% 닮았다간... 생략하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역설 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너네 정말 안 변한다’ 저도 목사로서의 삶의 가장 큰 숙제는 이거예요. 사역한 지 7년 차가 되어서 느끼는 건, 나도 안 변하고 사람들도 안 변한다. 그런데고 메시지를 계속 전해야 하나? 이게 정말 큰 시험 거리고요, 가난한 거, 4대 보험 못 드는 거? 대출 못 받는 거? 그런 거는 이 문제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람이 변하지 않는데, 나도 안 변하는 것 같은데도 설교자로 세상 가운데 계속 있어야 하나?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가장 큰 숙제고요.

저는 설교자로서의 고민이지만 여러분은 이런 고민이 있겠죠. 계속 교회를 다녀야 하나?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게 무엇일까? 성경 일고 기도하고 내가 변하질 않는데 의미가 있나? 전도를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런 질문이요. 이사야서의 소명 본문은 그런 고민을 하는 신앙공동체에 다시 의미를 던져주는 거예요. “물론 모든 예언자들이 실패했고,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서 죽임 당했어도, 그래도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공감하고 움직일 수 있는 누군가를 또 찾고 있다. 그 사람이 당신인가?” 예언자의 마음, 조금 가져보시겠습니까? 침묵으로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솔직히 나눔 하는 시간을 가짐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김동환 목사는, 길섶교회를 섬기며, 평일에는 초등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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