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새롭게 보는 십자가 
[김동환] 새롭게 보는 십자가 
  • 김동환
  • 승인 2019.03.17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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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마 15:33-41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장면 갈무리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 장면 갈무리

1.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요?

오늘은 사순절 주일입니다. 순이 열흘을 뜻하니까, 사순 하면 40일이죠? 일 년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특별히 더욱 묵상해보자는 교회의 전통이 사순절입니다. 실제로는 40일 조금 넘어요, 지난주 수요일이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었고요, 부활절이 4월 21일이니까, 4월 20일까지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그건 여러분의 몫에 맡길게요.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무언가 하나님께 한 가지 약속을 해보세요, 매일 한 시간씩 기도를 하겠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거 아니더라도, 작은 무언가를 스스로 정해서 실천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카톡방을 보니까, 사순절을 떠나서 이미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직장 다니랴, 공부하랴 정신이 없을 텐데,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무언가를 정해 보면 좋겠어요.

그동안 전도사, 목사를 해오면서 항상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까 고민을 했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청소년, 청년사역을 하는데, 사순절이 항상 3-4월에 있잖아요? 3월이 어떤 달인 가요? 새로운 학기가 시작하고, 또 봄이 시작하는 달이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모임들, 소풍들 이런 게 많이 잡힐 수밖에 없는데 교회달력으로는 고난을 묵상하는 기간이니 ... 항상 조용조용히 엠티 가고, 소풍 다녔던 것 같아요. 어떻게 십자가를 묵상하는 게 유의미한 일일까, 한번 다 같이 고민해보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요!

저도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 지지난주에 학교를 갔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올 해는 두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요, 지지난주는 5일 내내 수업을 했는데, 매 시간 다른 반을 들어갔으니, 수백 명 아이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미리 고난주간이었어요.

 

2. 렉시오 디비나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의미로 마가복음 15장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나오는 복음서 본문을 오늘과, 그리고 사순절 기간의 마지막 주일인 다음 달 14일에 나누려 해요. 4월에는 십자가 사건의 특정한 주제에 집중한다면, 오늘은 십자가 사건의 전반적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할게요. 십자가 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을 제가 한 후에, 렉시오 디비나, 거룩한 읽기 시간을 가져보려 해요. 성경을 묵상하는 전통적 방법인데요, 렉시오 디비나라고 하면 있어 보이죠? 큐티보다는 이름이 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

큐티는 약간 근대에 시작된 운동이라 교회 전통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저도 선교단체 출신이지만 말이죠, 어떤 본문을 읽고 옆에 있는 약간의 해설과 질문을 가지고 읽고 기도하는 거잖아요? 렉시오 디비나는 좀 더 신학적이고, 좀 더 명상적이다라고 하면 와 닿을 것 같아요. 신학적이다는 말은, 성경본문을 읽을 때 이미 그 사람이 본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신학적 이해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모두가 목사처럼, 신학자처럼 이해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교양 수준의 이해가 있으면 될 것 같아요. 신학적 이해라는 것은 교회의 신조에 대한 이해와 함께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가 균형 잡혀있는 이해를 말해요. 오늘 마가복음으로 한다면, 기독교 신앙고백 위에, 마가복음이 언제, 어떻게 쓰였고, 마가복음의 책이 어떤 장르인지, 15장의 본문은 어떻게 읽어가야 할지에 대한 전반적인 감이 잡힌 후 시작하는 게 렉시오 디비나인 거죠.

그리고 저희는 침묵기도를 하잖아요? 이건 큐티와는 다르게 교회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건, 마음의 소리를 줄이기 위한 스위치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어요. 기도라는 것이 내가 할 말을 하나님께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자기 이야기를 던지는 것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줄이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 훈련을 하는 게 전통적인 기도예요. 그래서 신학적 기초 위에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잔상을 가지고 침묵기도에 들어가는 것이 렉시오 디비나라고 할 수 있겠어요. 좀 더 훈련이 되면, 말씀 묵상 후에 걸어가면서, 그러니까 조용한 곳을 산책하면서 묵상기도를 할 수도 있겠죠? 날씨가 좋아지면 이런 훈련도 같이 해보면 좋겠어요, 산책을 하는데 서로 떨어져서 걷는 구간을 갖는 거예요, 정해진 본문을 읽고 말이죠. 그리고 모여서 어떤 느낌이 있었는지를 서로 나눠보는 것도, 좋은 기도 훈련이라고 생각해요.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럼 이제, 이번 사순절 기간에 여러분이 묵상하면 좋을, 마가복음 15장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질문을 드릴게요,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나요?”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이런 대답이 먼저 떠오르지요? 맞는 말이에요.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지요. 나를 위해서도 맞는 말이고, 우리를 위해서도 맞는 말이에요. 어느 때는 ‘나’가 더 와 닿을 때가 있을 것이고, 어느 때는 ‘우리’가 더 와 닿을 때가 있을 거예요.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고백을 하면서 그 사람에 ‘나’는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신앙적으로 건강한 상태는 아니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정말 나를 위한 거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 말이에요, 그것은 십자가에 대해 온전히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예요.

마찬가지로, ‘사람,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나만을 위해 죽으신 것처럼 조금 좁은 시야를 가지고 십자가를 볼 수도 있거든요. 십자가를 지셨다는 건, 예수님이 고난을 좋아하셔서 그랬다는 게 아니죠? 누군가를 향한 열렬할 사랑 때문에 그 고난을 감당하셨다는 거잖아요? 그 고난에 나를 포함해서 다른 누군가, 모든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또 십자가 신앙이에요. 그러니까 나와 관련이 없는 지구 바내편의 사람, 과거에 지구에서 살아간 모든 이웃, 지금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웃, 그리고 미래에 이 땅에서 태어나서 살아갈 이웃들까지, 십자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거죠. 십자가 신앙에 대한 균형 잡힌 상태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이 ‘나’를 위한 것, 그리고 ‘우리’를 위한 것이란 두 가지 모두를 붙잡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없는 우리도 부족하고, 우리가 없는 나도 부족해요. 십자가가 가리키는 것은 나와 우리라는 것,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적 이해예요. 교회의 신조에 대한 감각이죠. 그리고 아까 렉시오 디비나가 되기 위해선 이러한 신조 위에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했나요? 본문에 대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4. 마가복음 15장 해설

마가복음은 교회 전통적으로는 선교여행에 참여한 마가가 베드로의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한 복음서로 알려져 있어요. 복음서의 이야기는 ‘말’로 전달되다가 십자가 사건 이후 3,40년이 지나서 예수님의 1차 증언자들이 세상을 하나, 둘씩 떠나면서 ‘글’로 편집되었어요, 초대 교회 전승에 선교여행을 하던 마가가 베드로의 이야기를 정리했다는 전승이 있고요, 전승이라서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지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물론 복음서를 최종 정리하는 편집자들이 편집자의 의견을 좀 더 붙여서 당대의 교회 상황에 맞게 살짝 정리한 부분도 있을 수 있겠죠?

십자가 사건이 정리되어있는 마가복음 15장의 앞부분은 어떤 내용인가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성찬이 있고,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외면이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무서운 형벌은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벌이예요. 손목과 발목에 못이 박힌 채로 사람을 벌거벗겨서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 놓는 것. 원래는 로마에 저항해서 독립운동을 하려는 이들이 잡히면 이렇게 십자가형을 당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도 수많은 이스라엘 독립운동가들은 십자가형에 처했죠. 발가벗겨서 매달아놓는 게 매달린 사람도, 또 그걸 보는 사람에게도 정신적인 무력감을 주는 거예요. 거기에 몸에 못이 박힌 고통과, 숨을 쉴 때마다 움직여야 하는 하는 압박감, 천천히 피가 몸에서 나오면서 오는 목마름.

사람이 생각한 처형 방식 중에 가장 잔인한 것 같아요. 이런 처형 방식만으로도 무엇이 드러나나요? 저는 사람의 ‘악함’이 십자가에서 보이는 것 같아요.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에게 이런 죽음을 주는 것, 누구의 권리로, 어떤 힘으로 이런 죽음을 줄 수 있는지… 그게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이런 십자가 형틀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악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이런 십자가 사건에 앞서 있는 사건이 바로 제자들의 배신이에요. 적극적인 배신의 상징인 유다와, 소극적인 배신의 상진인 베드로가 등장하는 거예요. 유다는 왜 배신했을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성경본문의 내용만으로는 정확히 추측하긴 어려워요. 그의 배신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면충돌하는 것이기에 어떤 본문엔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갔다고 표현하고 있어요. 그만큼 이해할 수 없는 배신이었죠.

막달라 마리아 영화 포스터
막달라 마리아 영화 포스터

막달라 마리아라는 영화가 작년 3월말인가 개봉했었는데요, 마리아의 시점에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려진 영화예요. 영상미가 너무 이뻐서, 혹시 구할 수 있으면 꼭 한번 보시길 바라요. 영화에서 유다가 마라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 아내와, 딸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땅 속에 있다고. 로마의 강압적인 요구 때문에 먹을 걸 계속 빼앗기다, 굶고 병들어서 죽었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살려주실 거라고, 그래서 나는 반드시 아내와 딸을 만날 거라고. 영화적 상상이에요, 제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열렬히 쫓았는지 개인적인 상황은 성경에 없어요. 다만 각자 다른 이상을 꿈꾸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건 알 수 있어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제자들인 다 흩어지니까요. 예수님을 위해 대신 죽겠다는 제자는 한 명도 없었거든요.

영화에서는 유다가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은 열망으로 예수님을 쫓은 것으로 묘사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부활의 역사를 당장 이루실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길을 가려하니 유다가 배신을 해서, 로마 군인들,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의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버린 거예요. 이유는 어찌 됐든,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알고 있는 걸로 성경은 묘사해요. 예수님도 어머니와 가족을 떠나야 했죠, 그분의 사역을 위해서요. 열두 제자들도 모두 가족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쫓아요. 베드로는 아내 야기는 나오진 않지만, 장모님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죠. 유다가 죽은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영화적 설정이었지만, 충분히 개연성 있는 픽션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오늘날에도 저희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잖아요?

저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형편 때문에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목회자분들을 많이 봤어요. 물론 어느 정도의 타협은 당연히 해야죠. 현실에서는 말이죠. 그런데 목사로서 해야 할 말이 있고, 타협해서는 안될 일들이 있는데, 먹여 살려야 할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이유로 아무런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상황들을 몇 차례 봤는데요, 참 쉽지는 않아요. 때로는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게 할 수 있을 만큼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되지만, 그런 분들의 설교가 안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가족을 위해 신앙적인 모험을 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 앞에 결단하라는 설교를 하면, 뭔가가 안 맞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에게 가족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이야기를 드립니다. 때로 가정 안에서 신앙적 갈등이 있는 상황이라면, 스스로 결정을 해야 하겠지만, 저는 가족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말밖에 할 수 없겠어요.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은 스스로 할 것 같아요.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람은 누구예요? 로마 군인이잖아요. 명령을 받고 못을 들고 망치를 내려찍는 사람은 밑에 계급에 있는 군인이에요. 저는 그 군인도 가족을 먹여 살리려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받고 있는 사람은 아닐까 생각해보아요. 예수님 시대 때 로마는 직업군인이었으니까요, 물론 그 군인들 중에는 15장 16절에서 20절에 나오는 성격 더러운 군인들도 있었겠죠,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조롱하고, 침을 뱉는 군인들 말이에요. 자신들의 힘이 절대적인 힘 인양 착각하고 연약한 사람을 유린하는 악이 드러나는 본문이에요.

그런 군인들 외에도 분명 먹고살려고 이 일을 하는 평범한 로마 군인도 많았을 걸요? 솔로인 군이도 있었겠지만^^; 아마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라면 가고, 죽이라면 죽이고, 무엇이든 하는 군인들도 많았을 거예요. 그런 맹목적인 명령체계, 고대의 군대 체계도 저는 십자가 사건 안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악이라고 생각해요. 군대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니까, 또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라요. 사람을 지키고 살리기 위한 군인이 있고, 사람을 죽이기 위한 군인이 있고, 아무 생각이 없는 군인이 있겠죠, 신앙은 당연히 군인도 살리고, 지키기 위한 군인이 되도록 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받은 최종 실행자는 로마 군인이고, 로마 병사이기에 그 본문을 묵상할 때마다 이런 부분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죠.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늘 말하잖아요? 15장의 첫 단락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에요. 원래 이스라엘의 독립운동가를 강압적으로 잡아서 십자가 처형을 하기로 유명했던 빌라도인데, 그 빌라도도 예수님에게 공식적인 죄목을 붙이기 애매한 거예요. 원래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인기가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원하니까 예수님에게 무죄를 선포하기 어려운 거죠. 그래서 유대인들 눈치를 봐요. 정치인, 혹은 법관의 문제가 여기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죄가 없는 이에게 무죄를 죄가 있는 이에게 유죄를 말해야 하는데, 위정자가 정의를 버리는 장면이 빌라도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명령을 받고 못을 박은 로마 군인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최종 명령을 내린 위정자, 빌라도의 이름은 신앙고백에서 계속 거론돼요, 어떤 죄가 더 큰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거죠.

놀라운 건, 유대인들입니다. 대제사장들은 그렇다 쳐요. 원래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이들이니까요. 자신들의 성전 시스템, 제사문화, 율법에 대한 해석, 그 모든 걸 뒤집으려고 했던 예수님이었기에 죽이기로 작정했던 거죠. 그러고 보면 복음서는 이러한 종교적인 죄, 종교적인 우상들과의 싸움이 주된 내용이에요. 구약성경을 토대로 형성된 신앙공동체, 하지만 그 속에서 기도가 왜곡되고, 예배가 왜곡되고, 공동체가 왜곡되는 거예요. 이것이 좋은 신앙이고, 이런 걸 해야, 이런 걸 내야, 이런 수행을 해야 좋은 신앙이 된다고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게 종교적 악인 거죠.

사람들은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무엇을 외우고, 어떤 훈련을 해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면 되는지, 만들어진 규칙을 따름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말이죠. 대제사장들의 선동에 대중들이 움직이는 걸 보면 그런 종교적 악이 어떤 건지를 묵상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병을 고쳐준다고 할 때, 먹을 걸 준다고 할 때는 그렇게 수많은 무리가 따랐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까 예수님의 곁에 서려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아무도 없어요, 모두가 선동당할 뿐이에요. 교회는 이 복음서를 매우 냉철하게 읽고 날마다 피드백을 해야 해요. 종교적 우상 성이 사실 십자가 사건의 시작점이었으니까요. 제사장들의 악이 결국에 로마의 정치가에게 가고, 정치가에 의해서 군인이 움직이고, 대중은 그런 흐름에 선동되는 상황이 연출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15장에서 정죄받지 않는 사람들은 오직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며 우는 사람들이었어요. 멀리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며 우는 여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 신성함을 느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로마 백 부장, 산해 드린 공회원 중에 예수님을 신뢰했던 요셉,

 

5. 신앙고백 안에서 본문을 자유롭게 묵상하기

자, 신앙고백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하지만, 성경 본문 속에서 여러분에게 와 닿는 십자가의 고난은 매번 조금씩 다르게 느껴질 거예요. 매 해의 사순절마다, 여러분의 상황이,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결이 다르게 보일 거예요. 제자들의 문제, 종교인들의 문제, 정치인들의 문제, 군인들의 문제, 대중들의 문제… 어떤 장면이, 어떤 메시지가 여러분의 영혼에 울림이 생길지는 그때그때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 모든 악들을 마주할 때 내 안에 무언가 교차점이 있는 악이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게 더 크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악을 보고, 그 악을 덮는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 집중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15장을 다 같이 읽을 거고요, 읽은 후에, 2분간 침묵기도 가운데,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김동환 목사는, 길섶교회를 섬기며, 평일에는 초등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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