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희생제물을 받아야 용서하는 하느님?
[곽건용] 희생제물을 받아야 용서하는 하느님?
  • 곽건용
  • 승인 2019.02.22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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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8(로마서 5:6-11)

가장 사실적이고 폭력적으로 예수의 수난을 그리다

영화 한 대목을 보고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약 1분여 동안 동영상을 감상했습니다). 2004년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이 시작할 때 즈음에 개봉한 멜 깁슨 제작, 감독의 <The Passion of the Christ>의 한 장면입니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명 배우이자 감독이 만든 예수 수난 영화가 나온다고 해서 기다려왔고 반가워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어린아이들까지 데려가겠다고 단체관람을 신청했는데 보다시피 지나치게 잔인한 장면들 많았기 때문에 영화 관람 후 많은 사람들이 후유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이 영화로 투자액의 20배 이상 벌어들인 멜 깁슨은 예수의 고난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자부했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긴 했습니다. 그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여기에는 동의합니다.

The Passion of the Christ
The Passion of the Christ

하지만 영화가 갖고 있는 신학적인 전제에는 문제제기하는 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영화는 예수께서 이토록 극도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인류의 죄를 사하실 수 있었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졌는데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하느님으로 하여금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극도의 고통을 겪었어야 했다는 얘기입니다. 겨우 뺨 몇 대 맞는 걸로는 그런 효과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겪은 고통이 크면 클수록 대속의 효과도 커지고 그만큼 하느님의 긍휼심을 자극하여 모든 인류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이 영화에 담겨 있습니다.

영화가 크게 히트한 까닭도 그렇게 믿는 기독교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 기독교인들은 그 동안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을 이 영화가 매우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그리고 폭력적이고 그래픽하게 보여줬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일이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렇게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예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가졌던 겁니다. 저는 딱 한 번 봤는데 그것도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에는 이 폭력적인 영화를 여러 번 본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학이지만 ‘유일한’ 신학도, ‘절대적인’ 신학도 아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희생을 원하는 하느님에서 생명의 하느님으로’라는 소주제로 설교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수님이 이처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이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신학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성서에는 그런 신학이 있습니다.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곳곳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복음서에도 있고 바울 서신에도 있으며 히브리서, 베드로전서에도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바쳐진 희생제물이라는 신학은 십자가사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지, 유일한 해석도 아니고 절대적인 해석도 아닙니다. 이번 소주제는 이 문제를 다루는데 미리 경고성으로 말씀드리면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여러분이 그 동안 굳게 믿어왔던 신앙의 내용의 많은 부분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겁니다. 그것이 진실인지 문제 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을 포함한 첫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습니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경험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경험한 것이 대체 뭔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건과 그에 따른 구원의 경험을 자신들이 이전에 경험해서 이해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말로 신적인 경험처럼 사람의 언어나 개념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 무엇 같다’라고 표현하지요. 여기서 ‘무엇’에 해당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은유’나 ‘비유’가 바로 이런 겁니다.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자기들이 경험한 구원도 이렇듯 ‘은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워낙 전례가 없는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보편적으로 사용된 몇 가지 은유의 방법이 있었는데 법적인 개념을 통한 설명, 정치적인 개념을 통한 설명, 그리고 제사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통한 설명이 그것이었습니다.

범죄 인정이나 불인정, 유죄판결이나 무죄 판결, 합법이나 비합법, 재판관과 원고, 피고 등은 모두 법적인 비유를 통한 설명 방법입니다. 성서에 수없이 등장하는 의인, 죄인, 의로움 등이 범주에 속합니다. 또 권리와 의무, 소속감과 시민권, 나라와 왕, 황제 등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정치적인 비유입니다. ‘주’ 또는 ‘구세주’ 그리고 ‘하느님나라’ 등등의 용어들은 모두 로마제국에서 널리 사용된 정치적 용어였습니다. ‘주’나 ‘구세주’는 모두 로마황제를 가리키는 말이었지요. 그런데 첫 그리스도인들은 이렇듯 황제를 가리키는 용어들을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에게 적용했습니다. 빛나는 옥좌에 앉아 호령하는 로마황제가 ‘주님’이나 ‘구세주’가 아니라 바로 예수가 그런 분이라고 선언했던 겁니다. 이렇듯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은유로 이해했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성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은유는 제사와 관련된 은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과 부활, 그리고 그를 통한 구원사건은 희생제물, 속죄, 속죄양, 화해 등의 개념들로 이해하고 설명했던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1천 년 동안 다양한 목적으로 짐승을 잡아서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려왔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나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을 했을 때, 그래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훼손했거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렸다고 여겼을 때 그걸 회복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던 겁니다. 이때 곡식을 제물로 바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소나 양, 비둘기 같은 짐승을 죽여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들은 짐승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이 더럽힌 영역이 정화되고 망가뜨린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됐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제국의 가장 극악무도한 처형방식인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으므로 당황했고 어쩔 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건을 자기들이 오랫동안 시행해온 희생제사라는 프레임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1천년 동안 희생 제사를 일상적으로 행해왔고 당시 예루살렘에는 매일 제사가 행해지는 성전이 우뚝 서 있었으니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이렇게 이해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겨레는 짐승을 잡아 제사지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찬식을 그들은 떡과 포도주로 시행했지만 만일 예수님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백설기와 막걸리로 했을 겁니다. 막걸리가 붉은 색이 아닌 게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현실은 교회에서 이런 얘기를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없애려고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으며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해져서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됐다는 신학을 교회는 하나의 ‘비유’이고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만고불변의 ‘교리’(dogma)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희생제사의 프레임으로 예수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그게 가장 그럴듯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유일한’ 해석도 아니고 ‘절대적인’ 해석도 아닙니다. 앞에서 예로 든 것처럼 성서에도 다른 해석이 여럿 존재합니다. 희생제사 프레임은 그 중 하나일 따름입니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희생제사 프레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점은 기독교 초기에는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요즘은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져서 이 해석을 유지하는 게 과연 의심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그게 뭔지, 왜 그런지를 따져보겠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가장 익숙한 해석으로 출발한 희생제물 신학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해석들이 덧붙여졌습니다. 예컨대 중세의 저명한 신학자 안셀름(Anselm)의 해석이 그렇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로 인해 하느님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고 그 때문에 창조세계 전체가 망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망가진 창조세계를 회복하려면 먼저 훼손된 하느님의 명예를 회복해야 하는데 제한된 존재인 인간은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가 없고 완전한 존재인 그 분의순종을 통해서 훼손된 당신의 명예를 회복했고 인간의 죄로 인해 생겨난 빚을 청산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안셀름의 생각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을 죄에서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존재가 됩니다. 하느님은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그 누구의 죄도 용서하지 못하는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존재입니다. 희생 없이 구원 없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사람의 희생 갖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므로 하느님 자신이 사람이 되어 희생당했다는 것인데, 이런 생각은 한편으론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을 표현하는 걸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하느님을 스스로 학대하는 자학적인 존재로 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진정 하느님은 사람을 죄에서 용서하기 위해서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가학적인 분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희생제사 신학의 또 다른 문제점은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느님 손에 붙들려 고통당하고 죽어간 불쌍한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이 신학에 의하면 예수님은 죽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기로 정해져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에 의해 작정됐고 기획된 각본에 따라 이 세상에 왔다가 죽어간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느님이고 동시에 진정한 사람이라고 믿는 예수님은 자유도 없고 스스로 결단도 못하는, 그래서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예수는 꼭두각시 구세주입니까?

마지막으로 이 신학은 고통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서 그 자체를 거룩한 그 무엇으로 만드는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거기에 마술적인 의미를 부여하기까지 합니다.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보여주는 게 바로 이겁니다. 예수께서 극악한 폭력으로 인해 극도로 고통을 겪은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감독은 바로 그 고통에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과거세대뿐 아니라 미래세대의 수많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보통 인간의 보통 수준의 고통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이므로 그걸 달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극도의 고통이 요구된다고도 생각합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사람인 동시에 하느님이기도 하므로 그분이 당하는 고통에는 인간의 그것에는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생각 등등이 덧붙여져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는 희생제물 신학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에다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본받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덧붙여져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어떤 모양으로든 고통을 받아야 하고 고난을 자초해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영화 <다빈치코드>를 보면 살인자가 혼자 있을 때 채찍으로 자신을 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바로 스스로 고통을 당함으로써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행위입니다.

 

죽음의 하느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

하지만 우리는 고통은 대부분 누군가가 저지르는 ‘폭력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폭력이 고통을 초래합니다. 그런데 고통에 이렇듯 고상한 의미를 부여하면 그 고통을 초래하는 폭력의 악함은 간과하기 십상입니다. 폭력을 행하는 악의 세력과 싸우려 하지 않고 그조차 하느님의 섭리로 이해하는 괴상망측한 신학이 탄생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돈을 받고 넘긴 자입니다. 당연히 나쁜 자이고 또 그렇게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 신학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도록 이끈 하느님의 섭리의 도구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이 하느님으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용서하게 했고 이로써 구원이 이루어졌으므로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긴 그는 구원에 있어서 긍정정인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희생제사 신학은 고통을 초래하는 폭력의 악함을 간과하게 만들고 유다의 배신까지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럼 이처럼 중대한 문제점을 갖고 있는 희생제물 신학을 대체할 대안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죽으러 세상에 오신 게 아닙니다. 구세주는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게 아닙니다. 아기 예수는 ‘응애!’ 하고 첫울음을 울었을 때부터 ‘나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온 거야. 그걸 잊어서는 안 돼.’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 게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공적 생애에 상당히 일찍부터 당신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도중에 악한 세력에 의해 자신이 죽을 수 있음을 예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죽음 그 자체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분의 삶과 떼어놓고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의 삶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절정에 그분의 죽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당신이 세상이 오신 목적을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누리되 초라하게 누리는 게 아니라 넘치도록 풍성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우리로 넘치도록 생명을 누리게 하려고 당신은 스스로 비참하게 죽어간 게 아닙니다. 우리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힘은 그분의 죽음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분의 삶 전체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주일에는 ‘희생을 원하는 하느님’이 아닌 ‘생명의 하느님’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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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락 2021-09-05 07:22:32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