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풍성한 생명의 하느님
[곽건용] 풍성한 생명의 하느님
  • 곽건용
  • 승인 2019.03.03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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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9(신명기 30:15-19 요한 5:24-26)

과학 언어가 지배하는 시대

이제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시리즈 절반쯤 했습니다. 지금까지 세 개의 소주제를 다뤘고 앞으로 세 개가 더 남아 있습니다. ‘강제의 하느님에서 자유의 하느님으로’가 바로 다음에 다룰 소주제이고 ‘개인의 하느님에서 공동체의 하느님으로’가 그 다음이며 ‘홀로 있는 하느님에서 연대하는 하느님으로’가 마지막 소주제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종려주일 직전인 4월 7일에 마치게 됩니다. 작년 11월 마지막 주일에 시작해서 장장 다섯 달 동안 진행된 시리즈 설교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너무 오래 이어져서 지루할 수도 있는데 소주제의 다양성 덕분에, 그리고 각각의 주제들이 진지하고 도전적이어서 저는 지루할 틈이 없었는데 여러분은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랬기를 바랍니다.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의 책 덕분에 이런 주제들을 모아서 집중적으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희생을 원하는 하느님이 아닌 생명의 하느님에 대해 얘기할 차례지만 그 전에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말이 어떤 성격을 갖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나서 생명의 하느님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근대 이후로 사람이 하는 생각과 말은 과학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굳이 과학자가 아니라 해도 그렇습니다. 현재 우리의 생각과 언어는 과학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학은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판단을 가능한 한 피하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사물과 사건을 묘사하고 설명합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는 현대인의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게 최상의 언어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물과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언어가 대표적으로 여기에 속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리적 세계가 우리네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 삶에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합니다. 예컨대 인간의 심리세계를 다루는 심리학이나 자아와 초자아, 의식과 잠재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는 정신분석학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정신세계를 다룹니다. 예술이나 미학, 철학, 종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분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함을 전제합니다. 과학의 언어만으로는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의 존재를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인간의 정신활동이란 얘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의 성격

문제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사고하고 표현할 때 물질세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사고와 언어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이런 사실을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물질세계를 표현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표현해야 함을 상당히 일찍부터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객관적인 언어보다는 ‘은유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보다는 ‘직관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성서를 기록한 히브리인들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가져다 쓴 언어는 대부분이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세계를 표현하는 언어였습니다. 그들은 추상적(abstract)인 언어보다는 구상적(concrete)이고 구체적인 언어에 훨씬 더 익숙했고 그런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예컨대 하느님이 강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강함’이나 ‘전능함’ 같은 추상적인 언어보다는 하느님의 ‘오른팔’이라는, 눈에 보이는 구상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또 하느님의 ‘자애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아버지’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져왔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도 민족들 간에 흔히 맺었던 ‘언약’(treaty 또는 covenant)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그것조차 추상적이라고 느꼈는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 구체적으로 ‘결혼관계’로 표현했습니다.

이렇듯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하느님에 대한 모든 언어는 은유적이고 직관적입니다. 오른손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진짜 하느님에게 오른손, 왼손이 있는 게 아니고, 결혼관계로 표현했다고 해서 정말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맺어진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물론 구약성서에도 이와 다른 표현도 있습니다. 뭐랄까, 선불교의 ‘화두’ 비슷한 표현도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탈출기/출애굽기 3장과 6장에서 모세가 백성들이 자기를 보낸 하느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하느님은 “나는 나다.”(I am what I am. 또는 I am that I am)라고 대답했습니다. 동어 반복을 한 셈이죠.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두고 수많은 대답을 내놓았지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구약성서 다른 곳에서 하느님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이런 표현이 거의 없습니다. 다른 데서는 추상적인 것을 구상적인 뭔가로, 그러니까 왕이나 아버지나 남편이나 주인 같은 걸로 표현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누군지를 직선적으로 묻는다면 궁극적으로는 구상적인 뭔가로 대답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인은 훨씬 더 다양하게 하느님을 말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고대인들에 비해서 하느님 체험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훨씬 다양한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현대인들은 추상적인 개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리스 철학 덕분에 우리는 하느님을 포함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예를 들면 폴 틸릭(Paul Tillich)은 신을 ‘존재의 기반’(foundation of being)이라고 표현했고 종교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모두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뜻이지 대충은 짐작합니다. 하지만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하느님은 존재의 기반이고 종교는 궁극적 관심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요즘에는 신을 ‘부재하는 현존’(absent presence)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는데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 말의 뜻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부재’와 ‘현존’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인데 이 둘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고대 히브리인들은 무식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사고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표현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얘기가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느낌이므로 이런 얘기는 그만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 사람이 하느님을 말할 때는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말은 사람의 한계로부터 나오는 말이라는 인식, 하느님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은 모호함과 양면성을 갖고 있으며 간접성과 매개성을 갖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복잡한 얘기 다 그만두고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면,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모든 말은 ‘달’ 그 자체가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겁니다. 하느님이 달이라면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말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따름이니 달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말은 간접적으로나마 사람과 달을 연결해주는 매개임에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에 대한 모든 말은 ‘간접적’이고 ‘매개적’이라는 겁니다.

제가 영화 <인터스텔라>에 대해 이미 설교에서 여러 번 얘기했는데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과학영화인 동시에 종교영화입니다. 저는 그렇게 봤습니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종교를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갖고 있는 모호함과 양면성, 간접성과 매개성을 이 영화만큼 멋지게 표현한 영화도 드뭅니다. 영화가 블랙홀과 웜홀을 말하고 상대성원리가 등장하며 공간을 구부리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들이 나오므로 과학영화임에 분명하지만 그것들은 종교를 가리키는 은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머피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모르스부호로 소통합니다. 우주 미아가 된 아버지는 어찌어찌 해서 인류가 존재하는 3차원의 세계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세계에서 딸을 봅니다. 딸은 아버지를 볼 수 없지만 둘은 모르스부호로 소통하지요.

제게 하느님은 누구냐, 어떤 분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이렇습니다. ‘그분은 엄청나게,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분이다.’라고 말입니다. 머피가 3차원의 세계에서 몇 차원인지도 모를 데에 있는 아버지와 소통하는 것, 저는 이것이 나와 하느님의 소통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이 하느님을 얘기하는 것을 ‘시각장애자 코끼리 만지기’에 비유합니다. 각각의 시각장애자는 자기가 만지는 부분이 코끼리의 전부인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극히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코끼리의 전부인 줄 안다는 겁니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생각과 언어는 하느님의 극히 일부분뿐이라는 점에서 이 비유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비유에서는 시각장애자 아닌 누군가가 그들이 코끼리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 만지는지 알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코끼리 전체를 보고 그게 코끼리인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을 말하는 데는 모든 사람은 시각장애자인 셈입니다.

전에 저는 각각의 종교는 서로 다른 등산로를 따라 산 정상에 오르는 등산객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오르는 길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에 가서 정상에서 모두 만난다는 얘기죠. 이렇게만 얘기해도 종교다원주의자니 이단이니 하면서 야단이 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 비유가 진실이려면 누군가가 높은 곳에서 사람들이 각각의 등산로를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걸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상이 있는지 여부도, 그게 어딘지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요.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 아닌 사람은 그 누구도 그런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의 하느님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언어는 상징적 언어라고 했습니다. 이 언어는 하느님에 관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지식을 전해주는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고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해주는 직관적인 언어입니다. 전에는 보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주고 깨닫게 해주는 언어라는 말입니다. 이 언어는 묘사하기보다는 조명하는 언어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해줌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우리네 삶과 세상을 보게 해주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상징 언어의 역할입니다. 종교 언어가 상징 언어임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전에는 ‘우상숭배’라는 것이 그저 하느님 아닌 것을 숭배하거나 권력에 굴복하는 것 정도로 여겨졌지만 요즘에는 하나 더 추가해야 합니다. 종교 언어가 갖고 있는 상징성을 망각하고 그걸 구상 언어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 역시 현대에는 우상숭배로 받아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가리켜 ‘생명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상징 언어요 은유적 표현입니다. ‘영생’이란 말 역시 마찬가지로 상징 언어입니다. 영생은 죽지 않고 끝없이 오래 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장수(long life)지 영생(eternal life)이 아닙니다. 수평적으로 한없이 늘여서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수직적으로 영원을 경험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걸 경험한 사람은 당장 그 날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누린 겁니다. 영생했다는 말입니다. 첫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죽음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됨과 동시에 현재 삶이 갖고 있는 가치와 생명의 소중함에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잔치’로 말씀했습니다. 신랑신부와 함께 자리하는 잔치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환희에 찬 생명의 잔치를 베풀고 우리를 그리고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분의 삶과 결코 유리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그분의 삶의 결과입니다. 예수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생명’(life)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표현하는 은유적인 표현이 많지만 저는 ‘생명’이란 은유 이상으로 그걸 잘 표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생명을 옹호하고 풍성하게 하신 예수의 노력을 악한 세력이 무력화하고 압살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악한 세력이 일으킨 십자가 사건을 하느님이 철저하게 부정하고 그분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사건입니다. 곧 생명이 회복된 사건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회복된 생명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을 초월하는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인 겁니다. 다음주일부터는 ‘강제의 하느님에서 자유의 하느님으로’ 주제로 얘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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