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두려워서 믿는 공포의 하느님?
[곽건용] ​​​​​​​두려워서 믿는 공포의 하느님?
  • 곽건용
  • 승인 2018.12.0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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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2

버려야 하지만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

1:1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3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2:1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2 하느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3 이렛날에 하느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느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1:1-3, 2:1-3).

지난 주일에 하느님에 대해 생각할 때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로 주의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할 때 경험과는 동떨어진 채로 머리로만생각하자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생각하되 나의 좁은 경험에서 비롯된 생각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경험했든지 그것은 하느님의 극히 일부분일 따름이고 여전히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분, 화면을 채우면 채울수록 여백이 더 커지는 분입니다. 결국 내 하느님 경험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실상을 말하자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사실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교육받은 것이고 외부에서 주입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학교에서 교사나 교역자에 의해 교육되고 주입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린 시절에 이뤄지는 교육은, 굳이 교회교육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도와주는 교육이라기보다는 올바르다고 믿는 생각을 주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입니다. 문제는 그 올바르다고 여겨서 주입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잘잘못을 꼬치꼬치 따져서 기어코 정산하고야 마는 하느님, 가학적이고 심판하는 하느님, 무겁고 부담스러운 도덕적 의무와 짐을 사람들 등에 지워놓는 하느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무신론이 비롯됐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말할 때 아무 수식어도 붙어 있지 않은 하느님을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하느님인가를 반드시 따져야 합니다. 무신론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하느님을 믿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살다 보면 잘못된 줄 알면서도, 곧 머리로는 잘못됐으니까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도 그런 것들 중 하나입니다.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는 이와 같은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우상적 하느님이라고 부르면서 그걸 버리기 어렵다는 사실에 공감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입받아 갖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가학적인 하느님이란 생각도 신앙에 대해 어느 정도는 깊이 생각해본 사람은 머리로는 그게 진실이 아니므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그리 쉽게 버려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하느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두려움과 공포이니 말입니다. 하느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두려움과 공포이고 하느님은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분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도 해보고 지워보려고 애도 써보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머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문득문득 나타나는 게 바로 하느님은 곧 두려움과 공포의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웃음은 두려움을 죽인다고?

두려움과 공포의 체험이 종교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종교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연약하고 불안정한 존재인 사람은 아득한 옛날부터 스스로 제어할 수도 없고 정복할 수는 더욱이 없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런 경험에서 종교가 비롯됐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불안정하고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을 추구합니다. 곧 사람이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욕망의 이면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힘을 갖고자 하는 욕망은 두려움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영화 '장미의 이름'(1986) 중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 중에 <장미의 이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탈리아의 석학이 쓴 동명의 소설을 프랑스사람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영화로서 숀 코넬리가 계몽주의 초기 교리와 이성이 대립하기 시작하던 때에 계몽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은 수도사를 연기합니다. 배경은 엄청난 장서를 갖고 있는 한 수도원이고 거기서 수도사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데 공통점은 손가락 끝과 혀가 까맣게 죽어 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 윌리엄 수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추론해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데 보는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점은 살인의 동기입니다. 살인자는 호르헤라는 앞을 보지 못하는 늙은 수도사인데 그는 금서로 지정된 책f의 한 귀통이에 독을 발라놓았습니다. 호기심에 그 책을 몰래 읽던 수사들은 침을 바른 손가락으로 독을 발라놓은 책장을 넘기다가 죽었던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그 금서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 아마 희극에 관한 책으로 짐작되는 바로 그 책입니다. 영화에 따르면 단 한 권 남아 있던 그 책이 수도원 화재 때 불타서 없어졌다는 겁니다. 마지막에 호르헤 수사는 윌리엄 수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Laughter kills fear.” ‘웃음은 두려움을 죽이고 경건에 독약과 같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에 관한 책은 수도사가 읽어서는 안 되므로 그걸 읽는 사람을 죽였다는 겁니다호르헤 수사가 수도사들을 죽여가면서 지키려 했던 것은 웃음이나 즐거움 같은 것은 경건한 수도사의 삶을 해친다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념의 뿌리에는 하느님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는 공포의 대상이란 믿음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안 보신 분은 꼭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종교의 기원은 두려움과 공포인가?

과연 태초에 자연의 엄청난 힘 앞에서 인간이 느낀 두려움이 종교의 기원일까요? 저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종교가 탄생했던 때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에서 종교가 비롯됐는지 아닌지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이라고 해서 무슨 확실한 증거를 갖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욥기에서 하느님이 욥에게 하신 말씀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 바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물 근원에까지 들어가 보았느냐? 그 밑바닥 깊은 곳을 거닐어 본 일이 있느냐? 죽은 자가 들어가는 문을 들여다본 일이 있느냐? 그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문을 본 일이 있느냐?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어디 네 말 한 번 들어 보자.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빛과 어둠이 있는 그 곳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그 곳을 보여 줄 수 있느냐? 빛과 어둠이 있는 그 곳에 이르는 길을 아느냐? (욥기 38장에서)

하느님은 이 긴 연설의 마지막에 이렇게 조롱하듯이 욥에게 말씀합니다. “, 알고말고. 너는 알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살아왔고 내가 세상 만드는 것을 네가 보았다면 네가 오죽이나 잘 알겠느냐!” 명백히 반어법을 사용한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인간 실존의 조건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어도 종교가 거기서 비롯됐다는 주장은 그와는 별개입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종교가 두려움과 공포를 신뢰와 확실성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에는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사람들의 이런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는 사이비종교들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려고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걸 이용해서 이익을 도모하는 종교는 분명 사이비종교이고 가짜종교인데 안타깝게도 지금 21세기에도 거기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처벌과 심판이라는 채찍과 보상과 천당에서의 영원한 삶이라는 당근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부른 종교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다르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 첫 부분을 읽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하느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렛날에 하느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느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뜬금없이 왜 이 구절을 읽었나 하고 의아해할 분이 있을 겁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텍스트든 그게 작성된 배경을 알면 의미를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니, 사실 배경을 알아야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배경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들입니다. 시간의 제약 때문에 긴 얘기를 할 수는 없으니 요점만 말하면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는 모두 처절한 투쟁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창조의 신은 혼돈 또는 암흑의 세력과 처절하게 싸움을 벌인 끝에 혼돈의 신을 죽여서 그 몸을 둘로 갈라서 하나로는 하늘을 만들과 다른 하나로는 땅을 만듭니다. 그리고 패한 신의 피를 점토에 섞어서 사람을 만듭니다. 바빌론의 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쉬>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는 그런 피 튀기는 살육의 싸움이 없습니다. 바빌론의 창조신화가 피 튀기고 살점이 마구 떨어져 나가는 전쟁터라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조용한 명상센터입니다. 전자가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요란한 전쟁터인 반면 후자는 느리고 여유 있는 박자와 높낮이가 일정한 편안한 음악이 흐르는 기도원입니다. 성서는 태초에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라 잔잔함과 평온함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엔누마 엘리쉬 신회에 담긴, Bel 신이 혼돈의 신 Tiamat을 무찌르는 장면.
엔누마 엘리쉬 신회에 담긴, Bel 신이 혼돈의 신 Tiamat을 무찌르는 장면.

둘 중에 어느 편이 맞을까요? 두려움과 공포의 전쟁터입니까, 아니면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명상센터입니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종교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란 사람이 모든 사건과 현실의 최종적인 근원과 궁극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묻는 근원적인 의미는 나는 왜 존재하는가? 세계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내가 삶에서 추구할 목적과 의미라는 게 존재하는가? 있다면 그게 뭔가?’ 등등입니다. 종교의 기원에 대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는 눈에 보이는 부분 말고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네 삶과 현실의 깊은 곳에는 두려움과 공포를 야기하는 위협적인 존재가 있다는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거기에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원초적인 종교체험은 모든 사물에서 의미와 빛과 열기와 색채를 부여하는 신비로운 존재와의 만남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들의 주장이 그럴듯합니까? 인간의 근원적인 종교적 경험은 두려움과 공포라는 주장보다 더 매력적입니까?

 

하느님은 누구냐고 성서에게 묻는다면?

여기서 저는 성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서의 하느님은 사람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못 살게 구는 하느님, 무거운 도덕적이고 윤리적 짐을 짊어지게 하는 하느님, 우리가 잘못한 것을 빠짐없이 적어뒀다가 기어코 벌을 주고야 마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저는 이미 여러 차례 성서가 보여주는 하느님은 하나가 아니라 굉장히 많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의미가 있지만 모두가 동등한 무게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개념은 다른 개념보다 더 우위에 있고 어떤 생각은 다른 생각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심판보다는 자비와 긍휼이 우위에 있음을 우리는 여러 예언자들의 선언에서 확인합니다. 성서는 분명히 심판하는 하느님에 대해 말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 심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자비의 긍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모습 중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뭘까요? 성서를 인격체라고 가정하고 성서에게 네가 말하는 다양한 하느님에 대한 생각들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게 뭐야? 너는 하느님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뭐라고 말할래?’하고 묻는다면 성서는 뭐라고 답할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성서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 있게 이렇게 대답할 거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그렇습니다. 성서는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답할 겁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는 사랑의 하느님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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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2018-12-04 14:02:18
블로그로 모셔갈게요! 좋은 글은 더 알리자는 취지에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