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사랑하는 사람만 하느님을 압니다
[곽건용] 사랑하는 사람만 하느님을 압니다
  • 곽건용
  • 승인 2018.12.17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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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3

여론조사, 착각하기 쉬운 것

‘여론조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전을 보니 ‘개별적인 면접이나 질문서 등의 방법으로 국가나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사회 대중의 공통된 의견을 조사하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더군요. 요즘은 ‘여론조사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온갖 사안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합니다. ‘뭐 이런 것까지 여론조사를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일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점은 여론조사란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보는 일이란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실’(fact)을 알아보는 작업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보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여론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사안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지 하는 겁니다. 한 사안에 대해서 조사대상자의 80%가 사실이라고 답했다고 해서 그게 ‘사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80%의 사람들의 그걸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여론조사의 결과가 발표되면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설령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그걸 사실로 믿고 있다는 점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고 나아가서 ‘사실’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론조사 결과가 사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자기가 재림예수네, 성령 하느님이네 등등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사기꾼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재림예수인지 성령 하느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겁니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은유’

하느님에 대해서 얘기하려다 보니 적당한 비유가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여론조사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해서 얘기해봤습니다. 이건 그저 비유일 따름이니 ‘사실’에 대한 진술은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해 사람이 하는 모든 얘기는 ‘은유’이고 ‘비유’입니다. 성서도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에 대한 모든 얘기 역시 ‘은유’(metaphor)입니다. 논리와 이치를 따지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시적인 표현’에 가깝습니다. 시편이 하느님을 ‘목자’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느님이 정말 목자는 아닙니다. ‘산성’(山城)이나 ‘방패’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느님이 정말 산성이나 방패는 아닙니다. 하느님을 ‘목자’라도 불렀을 때는 표현하고자 하는 게 따로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돌봐주시는 걸 가리키려고 하느님을 목자로 표현한 겁니다. 하느님을 산성이나 방패라고 불렀을 때는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보호해주시는 분이란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실체가 목자나 산성이나 방패라는 뜻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을 은유로 표현했을 때는 은유적으로 사용된 것들, 곧 위에 예로 든 경우에는 ‘목자’나 ‘산성’이나 ‘방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목자로 표현했는데 그걸 듣는 사람들이 목자가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면 은유의 효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평생 ‘목자’를 구경도 못해봤고 그래서 그게 뭔지 모른다면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목자라는 은유는 실패한 은유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사랑이다.’라고 성서가 말했을 때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 역시 하느님은 목자나 산성이나 방패라고 표현했을 때와 똑같이 ‘은유’일까요? 지난주일 설교 마지막에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중에 제일 중요한 것 하나만 고르라면, 다시 말해서 성서의 하느님을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하느님은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성서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말할 거라고 했습니다. 기억나시죠? 이 말이 옳다면 그 다음에는 ‘하느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이 과연 뭘 의미하냐고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은 다른 표현처럼 일종의 ‘은유’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랑’이란 말도 ‘목자’나 ‘산성’이나 ‘방패’처럼 누구나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말이어야 할 텐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 같지 않습니까?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라면 잘 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하느님은 목자나 산성이나 방패’라는 말과는 어딘가 달라도 다른 것 같지 않은가 말입니다.

제가 지금 전문적인 언어학적인 분석을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제게는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지금이 그런 작업을 할 자리도 아닙니다. 성서 역시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말했을 때 언어학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대체 성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말했을까요? 뭘 전달하고 싶어서 하느님을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Pompeo Batoni,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773)
Pompeo Batoni,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773)

‘하느님은 사랑이다’는 무슨 뜻일까?

저는 오늘 설교를 다른 때보다는 훨씬 더 쉽게 준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그 동안 셀 수 없이 많이 들어왔고 얘기해온 익숙한 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얘기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성서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여러분도 하느님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느님은 사랑이란 말이 뭘 의미하느냐고 물으면 그리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저도 쉽게 생각하다가 어제 이 설교를 준비할 때 쉽게 생각하고 덤볐다가 진땀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준비한 원고를 제쳐두고 지금 떠오르는 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준비한 원고의 내용이긴 하지만 원고를 읽어보니 저도 무슨 말인지 헛갈리는 대목이 여럿 있기 때문에 원고를 따라가면서 얘기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역시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므로 사람이 사람의 언어로 하느님을 얘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주신 모든 계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온 맘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번 더 줄이면 하느님은 우리더러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은 ‘하느님은 사랑이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하라’는 말은 하느님에 대해서 묻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이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지에 관한 얘기입니다. 곧 하느님은 우리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존재로 ‘전제’되어 있고 초점은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어떤 계명을 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반면 ‘하느님은 사랑이다’라고 말했을 때 여기서 하느님은 자명한 분으로 전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목자나 산성이나 방패로 은유적으로 표현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을 전제하지 말고, 또한 은유적으로 표현하지도 말고 직접적으로 하느님이 누군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하느님의 본질을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를 말하려는 겁니다.

하느님은 물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영’(spirit)이라고 말씀했을 때 그것은 하느님은 물질이 아니라는 의미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하느님은 ‘영’이란 말 안에는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하느님은 ‘물질’이 아닌, ‘물질’과는 구별되는 분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정말 궁금한 점은 이렇듯 ‘물질’이 아닌 하느님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느냐 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물질이 아니므로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으면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해 오늘 읽은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느님에게서 났고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서신을 읽는 독자들을 ‘사랑하는 여러분’이라고 부른 후에 ‘서로 사랑하자’고 권고합니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점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의례적인 인사말처럼 들립니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우리 눈길을 끕니다. 저자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났다’는 말이 사람의 생물학적인 기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됩니다. 사람의 육적인 기원이 아닌 이른바 ‘영적인’ 기원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이 말이 뭘 의미하는지는 당시의 사상적, 문화적 배경을 깊이 있게 따져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겐 그럴 여유가 없으니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사랑을 알아야 하느님을 알게 된다

제 관심을 끄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요한일서는 하느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어떻게 경험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 감각과 추론에만 의지해서는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하느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권유한 다음에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난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사랑’은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명사입니다. 비록 그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됐다 할지라도 여기서는 모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명사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느님에게서 났고 하느님을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앞의 ‘사랑’은 추상명사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추상명사가 아닙니다. 사랑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그 사람의 뺨에 입도 맞출 수 있는 ‘물질’입니다.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물질명사가 됩니다. 저자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추상명사에 그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실천될 때 물질화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렇듯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물질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사랑이 그걸 실천하는 사람에 의해 물질화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결코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일서가 말하려는 바입니다. 하느님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알려지고 경험됩니다.

우리는 이런 깨달음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서 얻습니다. 흔히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하느님’(incarnated God)이라고 부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이 되어서 30여 년 동안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다가 부활하고 승천해서 본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로 되돌아갔다는 겁니다. 신학적으로 깊이 따져보면 이렇게 단순한 서술로는 부족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영과 육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전혀 다른 카테고리입니다. 하느님이 영이라는 말은 육이 아니란 뜻입니다. 영은 육과 동일한 차원에서 대립되는 뭔가가 아니라 육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뭔가를 표현하려고 영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영과 육이 서로 넘나들 수 있다면, 곧 조건에 따라 영이 육이 될 수 있고 육이 영이 될 수 있다면 영은 영이 아니고 육은 육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과 육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겁니다.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1669) 중 

탕자의 비유에서 보는 하느님 사랑

그런데 육의 세계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경험하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추상명사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물질화된 사랑, 곧 사람의 몸으로 실천된 사랑, 그것만이 육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 영의 하느님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냥 ‘성육신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사랑’(incarnated love of God)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물과 같은 차원의 존재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사유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차원을 연결하는 유일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것도 추상명사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와 실천으로서의 사랑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사랑을 실천할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을 보여주시려 무진 애를 쓰신 걸로 보입니다. 저도 지금 하느님과 사랑을 말로 표현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실천으로 보여주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삶으로 보여주면 쉽게 이해되고 공감할 수 있는데 그걸 말로 하려니 오죽 힘이 들었겠나 싶습니다. 그 중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는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 아버지가 그를 ‘봤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시력이 아들만 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들은 못 봐도 아버지는 봅니다. 아들은 아직 아버지를 못 봤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봤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겼답니다. 누군가를 측은히 여기는 일을 예수님은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달려갔습니다. 노인이 멀리서 아들이 오는 걸 보고 달려갔습니다. 아들이 자기에게 오기까지 아버지는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답니다. 아들이 거지꼴이었을 텐데 아버지에게는 그건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으스러지게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유산을 당겨 받고 집을 버리고 나간 아들을 다시 존귀한 자리에 앉히려고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축하잔치를 열었습니다. 다시 아들을 찾은 걸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우리가 다 알 듯이 큰 아들이 이를 보고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돌아온 아들이 더 소중했습니다. 잃었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도 큰 아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아버지와 같은 경험을 한다면 여러분도 이 아버지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큰 아들의 불평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사랑은 돌아온 작은 아들에게 우선적으로 쏠리게 마련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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