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택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 이택환
  • 승인 2018.07.0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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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마가복음 5:21-43
베로네제,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는 예수, 1565-70
베로네제,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는 예수, 1565-70

오늘 말씀은 한 이야기 속에 다른 이야기가 들어있는, 그래서 한꺼번에 두 이야기를 전하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샌드위치 구조라고 하는데, 마가복음 기자가 즐겨 쓰는 방식입니다. 먼저 샌드위치 구조 바깥에 있는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입니다. 회당이란 이스라엘 각 마을마다 유대인들이 예배하고 율법을 배우는 장소입니다.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회당장이지요. 대단한 지위는 아닐지라도 회당장은 대부분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의 12살 된 어린 딸이 죽을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야이로는 딸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겠지요. 하지만 어디에도 딸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딱 하나 남은 길이 있다면 갈릴리 인근 가버나움 일대에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들려 기적을 행한다는 둥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기에, 율법을 가르치는 회당의 관리자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마뜩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딸의 생명이 위급해지자,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불문하고 예수님을 찾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하필 그 때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역으로 가신 뒤였습니다. 야이로는 자신의 뒤늦은 결정을 후회하면서, 예수님이 돌아오시는 날까지 딸의 생명이 붙어있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마침 오늘이 예수님이 바다 건너편에서 돌아오시는 날입니다. 야이로는 일찍부터 바닷가에 나가 예수님을 태운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그 배가 멀리 보였고,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그가 달려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합니다. “예수님,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희 집에 오셔서 안수해 주심으로 딸이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딸이 죽게 되었다는 말에 ‘마지막’, ‘최후’를 의미하는 ‘에스카토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딸이 매우 위급한 ‘이머전시’ 상황임을 뜻합니다. 이 말이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음이 나중에 드러납니다. 이에 예수께서 야이로를 따라 서둘러 그의 집으로 가시는데, 도중에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먼저 많은 무리들이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에워싸고 서로 밀쳐댑니다. 1분 1초가 아쉬운 야이로에게는 마치 앰뷸런스가 교통 혼잡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는 형국과도 같았습니다. 야이로의 속이 얼마나 탔겠습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순간 한 여인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인데, 마가는 이제부터 이 여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야기, 즉 샌드위치 구조의 안쪽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후 이 새로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야이로는 무대에서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쪽 귀퉁이에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시간이 지연될수록 괴로워하고 초조해하는, 저 슬픈 모습의 야이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혈루증은 말 그대로 피를 흘리는 병인데, 아마도 자궁출혈과 관련된 만성 부인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야이로의 딸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중한 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혈루증 환자를 부정한 자로 여겨 사람들과 접촉을 금했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12년(완전수) 동안 혈루증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외면당하고 버림받는 심적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수많은 의사들에게 온갖 치료도 받았지만, 오히려 병이 악화되고 재산만 탕진했습니다(얼마 전에 만난 친구가 5년간 반신불수로 지내다 돌아가신 장인어른 병원비가 4억 8천만 원이었다는데, 결코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여인이 지금 목숨 걸고 예수님을 찾아 온 겁니다. 부정한 혈루증 환자가 군중들 가운데 있다는 것 자체가 돌에 맞아 죽을 일이고, 그녀가 예수님께 나아가 옷을 만졌다는 것 또한 사회적으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혈루증 환자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길이 없어요. 그녀에게는 예수님을 초청해 줄 야이로와 같은 아버지도 없고, 다른 가족이나 친구도 없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군중 속에 신분을 감추고 몰래 예수님께 다가가, 옷자락이라도 만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실제로 그 일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난감한 윤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환자는 당연히 질병을 치료받을 권리가 있지요. 그런데 자신의 치료받는 행위가 불특정 다수에게 해를 끼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시 의학지식으로 볼 때, 이 여인이 자신의 치료를 목적으로 군중 속에 잠입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질병을 전파하는 행위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격리되어야 할 메르스 환자가 거리를 다니며 메르스를 전파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혈루증이 전염병이 아니라 해도, 당시 그녀의 행위는 명백한 모세율법에 반하는 부정을 퍼트리는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여인은 자신의 모든 행위가 드러나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33). 하지만 그 두려움은 단지 자신의 죄가 드러난 것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대로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뿐인데, 정말로 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처럼 윤리적으로, 또 법적으로 문제를 지니고 있는 이 여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나는 당신처럼 자신의 질병 치유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불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죄인을 구원해 줄 수 없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12년 동안 육체의 질병을 안고 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거기에 부정한 자라는 사회적 낙인까지 찍혀, 부당하게 격리되고 억울하게 배제된 삶을 살아 온 그녀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잘못된 지식과 부당한 낙인으로 고통 받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먼저 장애인들이 그러하지요.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사람들은 자기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는 것조차 반대하지 않습니까? 제3세계 근로자, 가난한 노숙자들은 열등하거나 게으른 자, 범죄자 취급하는 사회적 낙인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에이즈가 만성질환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지만,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직장에서 해고될 뿐 아니라, 더러운 사람 취급 받기 때문입니다(요즘 목사들도 신분을 드러내기 힘듭니다. 좋게 말해 장사꾼, 나쁘게 말해 사기꾼 취급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혈루증 여인 치유 사건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자, 가난한자, 소수자들을 교회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본문은 다시 샌드위치 구조의 바깥부분인 야이로의 딸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사이에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입니다. 야이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혈루증 여인이 사전에 예수님과 만나기로 예약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단지 만성병 환자인 그녀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에겐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고, 그렇다면 우선순위는 당연히 야이로의 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과 집중, 우선순위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입니다.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세상의 가치관이지요. 그런 생각과 가치관 속에서는 언제나 선택하는 순간 배제가 발생하고, 우선순위를 두는 순간 밀려나는 사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그와 반대로 세상에서 배제된 사람을 선택하시고, 오히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에게 우선순위를 두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큰 자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작은 자였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이 세상의 가치관의 전복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추구하는 교회가 세상에서 귀히 여김 받는 사람들을 더 귀히 여기고,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자들을 더 왕 노릇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귀히 여김 받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을 섬기고,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자들이, 그렇지 않는 자들을 받드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세상보다 더 돈과 권력을 중요시하는 교회, 세상보다 더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교회, 그래서 선택에 따른 배제, 집중에 따른 소외를 당연시 하는 교회, 은혜는 온 데 간 데 없고 오직 율법으로 가득한 교회...

예수님은 사랑하는 딸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져 심히 괴로워하는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이 과연 야이로의 귀에 들렸을까요? 그에겐 모든 것이 다 끝났습니다. 마지막 기대마저 사라져버린 이상, 그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야이로의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자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의 손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그러자 그 아이가 즉시 일어나 걷고 주는 음식을 먹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가 암시한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반영합니다. 죽었던 야이로의 딸이 일어난 것(에게이로 : 부활을 지칭하는 용어의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장차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자주 길이 막히고, 일이 지연되고, 우리가 자주 중심에서 벗어나 잊혀지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날지라도 우리가 절망할 게 아닙니다. 오늘 야이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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