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율법에 대해 죽고 영에 따라 다시 산다
​​​​​​​[곽건용] 율법에 대해 죽고 영에 따라 다시 산다
  • 곽건용
  • 승인 2017.11.1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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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4 - 갈라디아 3:1-14
예수와 바울, 베드로
예수와 바울, 베드로

 

지난 주일에는 몸의 부활영혼불멸은 서로 다른 갈래에서 나온 사상이란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스철학에서 온 영혼불멸은 살아생전에는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의 영혼(soul)이 죽음과 함께 해방되어 영원히 산다는 믿음인데 반해, 구약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는 헤브라이즘에서는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부활할 때도 사람은 한 덩어리로, 통전적인 몸이 부활한다고 믿었습니다. ‘개인을 가리키는 영어 ‘individual’이란 말의 어원이 뭔지는 모르지만 의미로는 헤브라이즘적인 단어입니다. 이 말은 나누다는 뜻의 ‘divide’에서 비롯된 말 앞에 부정어 ‘in’을 붙여서 만들어진 나눌 수 없는 존재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소생이 아니고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몸의 부활이었습니다. 영혼불멸은 바울의 부활과는 상관없는 개념입니다. 바울도 이 사상을 알았겠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부활한 몸은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부활한 몸은 땅에 속한 몸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몸이었고 썩을 것으로 심었지만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난 몸이었으며 비천한 것으로 심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난 신비한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생각은 부활한 몸은 천사의 몸과 같아서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부활한 몸은 어떤 몸일까를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부활 따위는 없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천사의 몸 같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하늘에 속한 몸이고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이라고 바울이 말한 바로 그 몸이 어떤 몸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부활한 몸이 어떤 성격의 몸인지,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고 부활을 믿는사람의 지금의 삶, 그리고 미래에 부활할사람이 아니라 지금 부활한사람의 삶은 어떤지, 그것이 부활을 믿지 않거나 부활하지 못한 사람의 삶과 어떻게 다른지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당연히 죽음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죽지 않으면 어떻게 부활하겠습니까. 바울에게 부활이 무엇인지는 그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부활을 얘기할 때 전제하고 있는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사고를 당하거나 병들거나 자연사하거나를 막론하고 어떤 죽음이든지 바울은 그 죽음을 부활과 대조시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난번에 얘기했듯이 바울의 믿음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거슬러 올라갑니다. 물리적 시간으로는 죽음 다음에 부활이 옵니다. 열두 사도들의 신앙도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믿음세계에서는 부활이 먼저였고 그 다음이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의 예수님은 몰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보다 부활을 먼저 직접 경험했고 그 부활경험의 바탕 위에서 깊은 명상과 기도와 사색을 거쳐서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이때 바울이 명상하고 성찰했던 죽음도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생물학적인 죽임을 당하셨고 부활하셨지만 그런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생물학적인 의미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있던 영혼이 자유를 찾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담담히 독배를 마셨습니다. 바울은 어땠을까요? 바울에게 죽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을까요? 일일이 텍스트를 읽을 여유가 없어서 찾아 읽지는 않겠지만 바울 역시 죽음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부활할 텐데 뭐가 두려워?’라는 태도는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에서 이와는 다른 뉘앙스의 말을 합니다. 빌립보서는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썼던 편지입니다. 당시 감옥은 요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얼마 전에 국정을 농단했다고 해서 탄핵당하고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의 조건이 너무 열악하다면서 유엔에 탄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일반 수감자들 열 명이 쓰는 공간을 혼자 독차지하고서는 말입니다. 바울이 갇혔던 감옥의 환경은 진정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죽어갔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그런 감옥에 갇혀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어떻게 죽을지, 무엇을 위해서 죽을지 깊이 기도하며 사색했을 겁니다.

 

감옥에 갇혀서 스스로 죽는 것을 생각했다

빌립보서에는 기뻐하시오.”라는 말이 유독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 극도로 열악한 조건 속에 있으면서도 그는 감옥 밖에 있는 교인들에게 기뻐하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 점도 놀랍지만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감옥 생활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실은 123절에서 개인적으로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까지 말하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으면 이렇게까지 생각하겠는가 말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가 죽음을 어느 정도는 자율적 선택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곧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살을 용인하자는 거냐?’고 놀랄 사람이 있겠지만 성서만 놓고 보면 자살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좋아하고 신앙의 모범으로 여겨지는 다윗의 적대자였던 사울과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자살했기 때문에 성서가 자살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살을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엄중한 죄로 여긴 사람은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이었습니다. 어거스틴 이후로 교회는 자살을 죄로 규정했던 겁니다. 성서는 남의 손에 죽느냐 스스로 죽느냐 여부보다 무엇 때문에 죽느냐, 무엇을 위해서 죽느냐를 더 중시합니다. 요즘도 자살을 용서받지 못할 죄로 여겨서 자살했다고 하면 장례식고 집전해주지 않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목사님도 장례식이 다 끝난 다음에 고인이 우울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를 가족들에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우울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굳이 숨기지 않아 괜찮다고 얘기하며 유가족들을 위로해줬다고 합니다.

반복해서 얘기하는데 바울에게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말하고 걸어 다니고 만지고 밥 먹고 하는 등 죽기 전과 똑같은 삶을 좀 더 길게 살다가 다시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소생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부활이 중요했던 까닭은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의 부활이었기 때문이고 예수의 부활이 중요했던 까닭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 과거의 낡은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로 인해 과거엔 불가능했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은 율법의 끝이요 완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이 중요했던 겁니다. 이 얘기는 앞으로 더 하게 됩니다.

그럼 바울은 예수가 율법의 끝이요 완성임을 어떻게 알았냐?’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저도 그게 궁금하고 정말 알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바울은 이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으므로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전에 인용한 적이 있는 갈라디아 1장에서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입니다.... 나를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그를 나에게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라고만 말하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의 내용이 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우리는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바울에게 나타나서 뭘 보여줬는지,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을 바울에게 나타내서 구체적으로 뭘 보여줬는지 엄청나게 궁금하지만 바울은 그에 대해 일언반구 말하지 않고 다만 보여주셨다고만 말합니다. 분명 그 내용이 있었을 터인데 그게 뭔지 말하지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은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하느님이 그에게 뭘 계시하셨는지를 짐작할 따름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옛 세계는 사라지고 새 세계가 도래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니 낡은 삶의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도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이와 같은 근본적인, 뿌리로부터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부활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낡은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물론 가능성일 따름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라고 강요하거나 싫다는데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삶을 사느냐 마느냐는 개인과 공동체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정의로워진다라는 바울의 선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의로워야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다

종교개혁자와 그의 후예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선언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아무도 그 많고 복잡한 율법의 규정들을 모두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하느님에게 의로워질 수 없다, 하느님이 이를 긍휼히 여기시어 율법의 규정들을 다 지키지 않아도 믿음만 있으면 의롭다고 인정해주시기로 했다, 이렇게 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이렇게 단순화할 수 없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실제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사랑이 넘치고 자비로운 분이기에 사람들이 율법 규정들을 다 지키지 못하더라고 믿음만 있다면 이를 갸륵히 보시고 못난 죄인들을 받아주신다는 겁니다.

이는 바울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진다.’가 아니라 믿음으로 정의로워진다.’ 또는 믿음으로 정의를 행한다.’로 바꿔야 한다고 지지난 주일에 얘기했습니다. 사람은 정의로워야 합니다. 올바른 사람이어야 하는 겁니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정의로워야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이 점에는 에누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정의로워야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느님은 정의롭지 않은 사람을 정의롭다고 인정해주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는 확고합니다. 추호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정의롭지 않은데 정의롭게 인정받는 방법이 있을 수도 없고 또 설령 있다고 해도 거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정의로워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데에 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하느님에게 정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을 찾고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정의로워지는 길을 찾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정의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개념은 밑도 끝도 없이 나온 게 아니라 율법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입니다. 믿음으로 정의로워진다는 말은 율법을 지킴으로 정의로워진다.’는 말과 대척점에 있습니다. ‘믿음의 대척점에 율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왜 믿음과 율법이 상반되는 자리에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반복하지만 바울은 그 많고 복잡한 율법의 규정들을 사람이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고 말한 게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만일 사람이 그 많고 복잡한 율법의 규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킨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는 게 바울의 주장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 규정들을 다 지켜서 정의로워지려고 하는 태도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게 바울의 주장입니다.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만 정의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음으로 정의로워지는가를 생각해봐야 할 차례지만 그 전에 생각해봐야 할 점은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칭의’(justification)가 아니라 정의로워지는 것또는 정의를 행하는 것’(doing justice)이라고 수차례 강조했지만 정의가 뭘 가리키는지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정의로워지는 겁니까? 무엇을 행하는 게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생각처럼 명백하지 않다는 걸 알려준 사람은 베스트셀러인 2008년에 한국어로도 번역된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2007)라는 책을 쓴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입니다. 하지만 정의를 생각함에 있어서 샌델의 책보다 더 중요한 책은 구약성서입니다. 다음 주일에 있을 바울에 대한 연속설교 1부 마지막 시간에는 정의에 대한 얘기로 시작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글쓴이 곽건용목사는 LA 지역의 나성향린교회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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