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의 쇠사슬을 끊고
저주의 쇠사슬을 끊고
  • 김영웅
  • 승인 2018.06.0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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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 책(과일)상 - J. D. 밴스 저, ‘힐빌리의 노래’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공감할 수 있다. 크든 작든 공통된 경험이 없다면, 상호 간의 소통은 어렵기 마련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으로라도 독자가 저자를 공감하지 못하면, 독서 자체는 노동이 되어 버리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특히 그 책이 회고록이라면 더욱 그렇다. 공감 없이 끝까지 읽어내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힐빌리의 노래라는 책을 읽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한 백인 남성의 인생을 공감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긴 하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짧은 시간 끝까지 읽어내도록 만들었을까?

내게 있어 첫 미국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근교다. 쉐이커 하이츠라는 도시에서 입주자의 약 90퍼센트가 흑인으로 구성되었던 한 오래된 아파트에서 3년 반을 살았다.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미국에 남아 바로 옆에 위치한 인디애나주에서도 1년 반을 살았다. 의도치 않게 나의 7년의 미국 생활 중 5년을 소위 미드웨스트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살게 되었던 셈이다. 힐빌리의 애환을 담은 이 책이 외국인이자 아시안인 내게 많이 공감되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은 백인이 전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흑인들이 메우고 있었다. 히스패닉이나 나와 같은 아시안은 드물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오하이오주 미들타운과 켄터키주 잭슨은 내가 5년간 살았던 곳과 불과 차로 두세 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특히 저자가 인생 대부분을 살았던 미들타운의 분위기는, 실제로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로선 머리 속으로 그려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같은 러스트 벨트에 속한 지역에 살면서 수 차례 차로 오가며 그곳들의 냄새와 분위기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20세기말, 과거엔 미국의 대표적 공업 지대로 번영을 누렸지만,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몰락한 지역을 러스트 벨트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인적이 드물고 폐허들이 산재해있는 지역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느꼈던 그 특유의 적막함과 암울함을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 지역에서 주유소에 들려야 할 때면 난 잔뜩 긴장을 하곤 했었다. 눈이 풀린듯한 사람들이 흑백을 가리지 않고 도처에 있었는데, 그들이 마약이나 알코올에 중독되었을 거라는 나의 직감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곳은 빈곤과 약물 중독이 다반사인 곳이었다.

J. D. 밴스는 힐빌리다. 힐빌리는 러스트 벨트에 살며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러스트 벨트는 미국의 북동부 지역부터 중서부 지역까지 관통하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중심으로, 특히 중서부 지역에 집중되어있다. 이를테면, 이 책의 무대가 되는 오하이오와 켄터키, 그리고 웨스트 버지니아와 인디애나가 이에 속한다. 저자는 힐빌리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전형적인 힐빌리로 살았지만, 대부분의 힐빌리들이 밟는 전처를 밟지 않고, 오히려 그 저주의 사슬을 끊고 나온 몇 안 되는 힐빌리 중 하나다. 1984년생인 그는 이제 자신이 힐빌리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그 가운데서도 존재했던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운명적인 여러 만남들의 도움으로, 수재들도 들어가기 힘든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해냈고, 중산층 이상의 부류에 속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수직 신분상승을 기적적으로 이뤄낸 경우인 것이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을 '더럽게 운 좋은 개자식'이라고 표현한다. 힐빌리다운 걸걸함이 단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책의 대부분은 저자의 가족사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과 때론 지겹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아마 내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감동을 주는 부분도 많다. 저자의 경험과 식견을 통해 나에게 전달된 힐빌리들의 삶은 소외되고 고립되어 마치 저주의 쇠사슬로 스스로가 꽁꽁 묶어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었다. 가난이 실제로 대물림되고 있었고, 약물 중독과 폭력, 불륜, 가정 파탄, 그리고 저학력 역시 마치 그들의 전통인 양 자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거나 오히려 더 증폭되고 있었다. 스캇 펙은 아마도 이러한 저주의 고리에서부터 악을 진단해낼지도 모른다. 저자도 간파하고 있듯이, 힐빌리들의 그러한 삶은 정부의 문제도 사회 시스템의 문제도 아니었다. 주된 원인은 그들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놓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적은 외부가 아니라 그들 내부에 있는 듯했다.

저자 역시 어린 시절 충분히 불행했다. 굳이 조부모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그의 엄마는 간호사 자격증을 딸 정도로 재능이 있었으나, 허구한 날 남자를 바꾸었고 마약에 중독되어 폭력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일으켜 범죄기록이 많은 여자였다. 저자는 이 때문에 자신의 라스트 네임에서 혼란을 느꼈고, 실제로 엄마에게서 살인을 당할 뻔한 위기도 모면했던 적이 있다. 더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힐빌리들의 많은 가정이 부모 둘 중 하나는 약물 중독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고, 불륜과 폭력, 가정 파탄이 그들의 일상처럼 되어있었기 때문에 저자의 어린 시절의 삶이 특별하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갇힌 세상 속에서 그들은 국가와 정부를 탓했고, 사회 시스템을 탓했다. 누군가의 경제적 도움이 주어지면 그 돈으로 마약이나 알코올을 구입하는 데 탕진했다. 아이들은 버림받은 거나 다름 없었고, 한 부모 가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총체적인 난국을 맞이한 힐빌리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구조적 모순 속에서 여전히 하층민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저자는 자신의 가정이 여느 힐빌리 가정과는 차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비록 엄마가 마약 중독이었지만, 외할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이 그에게 그나마 안정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었으며, 친 누나의 엄마 역할과 이모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 우물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해병대 지원과 제대로 삶의 규모를 배우게 되었고, 오하이오 주립대를 우등생으로 단기간에 졸업하면서 점점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장악해 나가게 되었으며,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 졸업하면서 운명적인 멘토와의 만남과 평생 반려자와의 만남으로 완전히 힐빌리의 저주의 쇠사슬을 끊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표면적으로는 상류층 사회에 속해있지만, 여전히 힐빌리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어릴 적 각인되었던 힐빌리들의 결코 좋지 않은 문화가 가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힐빌리와는 정반대의 문화 속에서 자라난 아내와 그 가정 덕분에 그는 점점 치유되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방인인 내 안에도 힐빌리가 살고 있음을 느낀다. 화통 삶아먹은 듯 소리칠 때나, 내게 불이익을 준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나, 괜한 자존심에 주위의 시선을 왜곡하여 내 안에 갇혀 웃음을 지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힐빌리의 피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이 책을 공감하며 읽어내려간 주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그를 규정지을 수 없길 개인적으로 바란다. 그래서 그의 개척이 힐빌리들에게 메시지가 되어 그들에게 각인된 저주의 DNA를 치유할 수 있는 메신저가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이방인인 내 안에도 존재하고 있을 힐빌리도 깨끗이 치유되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글쓴이 김영웅 박사는, 하나님나라에 뿌리를 두고, 문학/철학/신학 분야에서 읽고/쓰고/묵상하고/나누고/배우는 것을 좋아하며, 분자생물학/마우스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가난한 선비/과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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