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선교적인 삶인가?
무엇이 선교적인 삶인가?
  • 김기욱
  • 승인 2018.05.15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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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는 이끌림의 증거가 명백하게 있는가?
구글 이미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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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선교적인 삶인가?' 이 명제에 대한 대답은 공통적으로 정의를 내리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총체적 선교라는 정의가 각자마다 다르기 때문에 맥락적으로(contextually) 상황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꽤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 (총체적) 선교적인 삶인지 정의를 의논하는 것보다, 무엇이 선교적인 삶이 아닌지에 대해서 의논하는 것이 오히려 더 명확한 명제라는 것이다.

영국-오스트리아 철학자인 Karl Popper는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의 전문가다. 그는 반증(falsifiability)이라는 기법을 제안했다. 어떤 사실을 추측할 때, 그에 대한 긍정적인 증거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이 추측에 대한 오류를 먼저 찾아서 추측의 정확성을 다듬어 가는 과정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다.

Popper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1. 먼저 추측을 세운다2. 이 추측이 오류임을 입증해 줄 사례를 찾아내기 위해 관찰을 한다추측을 확증해 주는 사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류임을 입증해주는 것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오류임을 입증하는 것이 적거나 심각하지 않을 경우, 더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교적인 삶인가?"에 대한 답변보다, 거꾸로 무엇이 선교적인 삶이 아닌지에 대한 반증이 더 명확한 명제가 된다. 마치 "모든 차는 BMW"라고 확신의 오류를 가지는 것보다는, "모든 차가 BMW는 아니지"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 말이듯이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선교적인 삶이 아닌 것 #1 반증은, 이것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선교적인 삶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 사안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서 살고 있으면, 미안하지만 선교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사역, , 관심사 등을 포함한다. 심지어 희생까지도 포함한다. (바리새인이 얼마나 희생적인 삶을 살았는가!)

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1602년작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1602년작

많은 성도는 삶에서 오는 고단함을 선교적 삶의 핑계로 대기 쉽다. 하지만 삶의 고단은 삶의 고단일 뿐이다. 삶이 힘들다고 해서 그것이 선교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 선교의 삶을 이야기할 때 다루는 마태복음 28장의 대위임(The Great Commission)을 이야기한다. 이 대위임은 우리가 만약 선교 지역에서 산다면 맥락이 들어맞는다그러나, 선진국의 대도시에서 산다면 대위임의 맥락이 달라져 버린다. 각자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면 그것이 무슨 선교적 삶이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선교적 삶 요소 중에 "원치 않는 삶"으로의 초대를 말한다. 예수님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앉혀놓고 앞으로 베드로가 살 선교적인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 21:18)

그리고 예수님도 체포되기 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원치 않는 잔에 주님의 뜻이라면 순종하겠다고 두 번이나 결심한 적이 있으시다. (마태복음 26사도 바울도 로마에 가서 체포되어 순교하는 길을 자진해서 걸었다. 당연히 일차적으로는 내 육신이 원하지 않는 길이다. 선교적인 삶을 살게 되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한복음 3:8)

따라서 우리는 이야기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구상하는 대로 삶을 산다면, 그것은 선교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의 삶에 반드시 "내가 원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가라고 하시니 순종하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선교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라는 주장에 조금이라도 힘이 실리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우려스러운 것은 선교지가 아닌 선진국 도시에 사는 일반 성도들이 너무 쉽게 선교적인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선교적인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원치 않는 삶으로서의 초대를 받아들였는지를 생각해보라. 우리의 삶에 원치 않는 이끌림의 증거가 명백하게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렇지 않으면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글쓴이 김기욱은,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한 성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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