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는 정신노동자이다.
설교자는 정신노동자이다.
  • 임종구
  • 승인 2018.05.0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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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설교자는 주중에 한번 이상은 설교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주간에 12번 설교하기도 한다. 설교는 대개 사전에 설교자와 본문, 제목이 예고된다. 이것은 일종의 회중과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설교자 자신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설교스케줄이 정해지면 설교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본문과 제목을 정해 예배순서지의 인쇄와 방송실에 필요한 정보를 주는 일에서 시작한다. 강단에 오르기 전에 어떤 색깔의 넥타이를 맬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설교자는 마감기일에 쫓기는 매거진의 고정 기고자처럼 어김없이 한편의 설교를 완성해내야 하며 자신의 곡을 초연하는 연주자처럼 자신의 입으로 설교문을 연주해야 한다.

B 기독교 라디오 방송의 설교 안내
B 기독교 라디오 방송의 설교 안내

어떤 설교의 경우 한편의 설교에 수 십 명의 스텝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홀로 외롭게 예배당에 불을 켜고 아무도 회중석에 앉지 않은 황폐한 예배당을 바라보기도 한다. 한편의 설교에 수많은 찬사와 혹평이 기다리기도 하지만, 그 어떤 피드백도 받지 못하는 쓸쓸한 설교도 있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화살이 되어 되돌아와 설교자의 심장에 박히기도 하고, 자신의 설교 한편으로 죽었던 회중이 살아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설교자의 노동으로서의 정신적 고통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설교자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설교가 왜 고통이 되는가? 그것은 설교자에게 있어 설교는 곧 생존의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신장이나 헤어스타일로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설교 하나만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설교에 울고 웃고, 설교에서 일어서고 무너진다. 한편의 설교로 역사가 바뀌기도 하지만 한편의 설교와 목숨을 바꾸기도 한다. 설교자에게 설교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자, 무기이며, 가혹한 노동이자, 무거운 십자가다.

설교자는 실상 회중석에 앉아 설교를 경청하는 회중의 한사람이며, 자신이 설교하는 동안에도 자신의 설교 속에서 한 명의 회중이다. 회중이 설교 속에서 고통과 위로를 느끼듯이 설교자도 동일한 감정에 참여한다.

설교란, 본질적으로 선언이자 선포이므로 회중의 평가에 염두를 두지 않는다, 그렇지만 실상 설교는 매순간 평가되어지고 이런 누적된 정보는 설교가 좋다든지, 설교가 시원찮다든지 하는 꼬리표를 달아준다. 방송설교에서 초단위로 채널을 바꾸는 회중의 마음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한번 굳어진 설교구매자들의 평가를 되돌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회중의 마음을 얻지 못한 설교자는 평생 주홍글씨를 매달고 강단에 올라가고 회중의 쌀쌀맞은 냉기류와 맞서며 강단의 불로 회중석을 데워보지만 이렇게 데워진 열기에 몇몇은 이미 졸고 있다.

통상 목사의 청빙은 설교에서 결정되는데 거의 트리플악셀을 성공시켜야한다. 설교자는 회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설교근육을 단련하고 최신 설교학에서 한 번도 소개되지 않은 천상의 비법을 도입해서 청빙을 받고 강단에 선다. 그러므로 누가 이 설교자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이 고독한 설교자의 길을 누가 알며 그 좁은 길을 누가 가겠는가?

A기독교 방송의 설교 방송 안내문
A 기독교 TV 방송의 설교 방송 안내

종종 이 분야의 대가들은 가장 충성된 회중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설교한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이 여린 설교자는 몇몇 까다로운 회중들의 얼굴을 스캔하고서 자신이 설교가 쇼핑카트에 담기지 않았음을 직감하는 순간 흔들리기 시작한다. 악랄한 몇몇 회중은 어쭙잖게 인용한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고서는 수군대고 있다. 이 가련한 설교자를 주님의 마음으로 응원하며 듣는 사람은 오직 단 한사람뿐이다. 이 특별한 회중은 설교자의 애환을 알며 한편의 설교를 위해 몇 잔의 커피를 마시며, 수 십 권의 책을 뒤지고 충분한 원어분석과 주석적 검토를 거쳐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올라갔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설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몇 시간을 서재에서 나오지 않는지를, 또 흠뻑 젖은 와이셔츠를 보며 설교란 인간이 수행하는 가장 고통스런 노동임 아는 것이다.

어떤 회중은 설교자가 자신에게 배트를 휘둘렀다고 하지만 한편의 설교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설교자 자신이다. 이 깊고 오묘한 영적 소통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설교자이다. 한편의 설교에서 가장 많은 회초리를 맞는 사람도 설교자이다. 설교자는 이 본문의 최초의 회중이며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 입술이 화상을 입었고 설교가운은 재를 뒤집어 쓰고 있다. 설교자는 이 본문 앞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고 멀리서 구름기둥을 보았으며 천상의 영광을 안다. 그러므로 회중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절망을, 존재가 부수어지는 좌절을 이 설교자는 본문 앞에서 먼저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설교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설교대로 자신이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글쓴이 임종구 목사는, 푸른초장교회 담임목회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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