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전통 다시 읽기
만들어진 전통 다시 읽기
  • 정한욱
  • 승인 2018.04.3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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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 휴머니스트, 2004년
에릭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 휴머니스트, 2004년

1. 서양 근대사 삼부작인『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은 이 책의 서문에서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른바 ‘전통’들이 실상 그 기원을 따져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이며, 심지어는 발명된(전통의 발명, invention of tradition) 것이라고 주장한다. 흔히 천 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알려진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영국 군주정의 의례도 실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홉스봄을 포함한 이 책의 저자들은 왕실의례를 포함한 영국의 몇 가지 잘 알려진 ‘전통’들이 어떻게 ‘발명’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역사적 ‘사실’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런 전통들을 만들어냈는지 탐구함으로서,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전통’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여준다.

2. 홉스봄에 따르면 ‘만들어진 전통’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공인된 규칙에 의해 지배될 뿐 아니라 특정한 의례나 상징적 성격을 갖는 일련의 관행들로 이루어지며 .... 실제로 발명되고 구성되어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전통’들과 그 기원을 쉽게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추정은 가능한 시기에 등장해 급속히 확립된 ‘전통’들”을 포함한다. 이들은 흔히 역사적으로 기념하기에 알맞은 과거의 특정 시기나 사건과 연결되어 있으며, 의례와 상징들을 통해 특정한 가치와 행위규준을 반복적으로 주입함으로서 지속적으로 과거를 ‘창조’한다. 이렇게 발명된 전통은 당연히 실제 역사와는 동떨어져 있으며, 그 목적은 만들어진 ‘공식 기억’에 의해 공유된 정체성을 창조함으로서 상이한 이해관계와 동기를 가진 개인과 집단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저자들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각양각색의 격자무늬로 짠 치마인 킬트(kilt)는 전통적인 고지대 의복이기는커녕 잉글랜드와의 통합 이후 스코틀랜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민족주의들과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협잡꾼들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적인 고안물에 불과하며, ‘천 년 전통의 장관과 웅대함’이라는 레토릭으로 포장된 영국의 왕실의례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영국의 정치 사회적 격변의 와중에 존경받는 군주를 민족 공동체의 영속성과 통합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에 따라 ‘발명’된 것이다. 또한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 놓여 있던 아프리카인들은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통치를 위해 고안해 낸 ‘전통’에서 자신들을 종속적 위치에 놓는 부분들을 제거한 채 다양한 형태로 변형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4.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새로운 국경일, 의례, 영웅이나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등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전통의 창조’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는 산업경제가 도래하고 도시화가 전개되며 새로운 민족국가들이 탄생하는 등 유럽 전역이 급격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던 때였으며, 홉스봄은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사람들을 통합시키고 안정과 연속성을 보장해 줄 목적으로 일련의 ‘전통’이 집중적으로 창조되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 시기에 새로이 출현하기 시작한 선거 민주주의와 대중정치로 인해 당대의 지배 엘리트들은 어떻게 신민들의 복종과 충성심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숙고해야 했으며, 자신들을 대중과 연결시킬 수 있는 다양한 의례나 상징물들로 이루어진 ‘전통’을 만들어냄으로서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전통 만들기는 특별히 근대의 고안물인 ‘민족’이나 ‘민족국가’와 관련된 정체성 창조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번역자인 박지향 교수는 이러한 ‘전통의 창조’에 대한 관심이 199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과 ‘언어로의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새로운 사조의 등장과 함께 더욱 촉진되었다고 말한다. 역사적 사료는 진리가 아닌 텍스트이며 역사서술은 권력의지에 의해 구성된 담론일 뿐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 의하면, 역사란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를 개념화하는가’를 묻는 것이며,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왜 기억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랑케 이후 지속되어 온 ‘역사적 서술의 중립성’에 대한 믿음을 폐기하고, ‘어떤 과거를 기억할 것인가’ ‘어떤 이야기(담론)에 참여할 것인가’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만을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6. 이 책에서 홉스봄이 주창한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개념은 신구약 성서와 히브리 종교의 형성사를 살피는 데도 꽤 흥미롭게 적용해 볼 수 있다. 사실 비평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히브리 성서와 중간기 유대교는 포로기 이스라엘인들이 민족적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과거의 다양한 전승을 창조적으로 해석해 새롭게 빚어 낸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약성서와 원시 기독교 역시 다양한 초대교회 공동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창조’하기 위해 그들에게 전승된 예수 이야기를 자신들의 삶의 자리 안에서 다양하게 재해석해 탄생시킨 ‘만들어진 전통’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성서가 목격자들의 증언을 충실하게 기록한 ‘역사적’ 기록이자 일점일획의 틀림도 있어서는 안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는 분들에게는 상당히 불경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의 메시지가 다양한 의도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새롭게 '창조'되어 온 ‘만들어진 전통’이라면, 그 책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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