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신앙고백을 '판단정지’시켜보지 않은 이들에게
자신의 신앙고백을 '판단정지’시켜보지 않은 이들에게
  • 정한욱
  • 승인 2018.04.22 0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수와 그의 시대 (헤르베르트 브라운, 대한기독교서회), 예수 - 생애와 의미 (리처드 보컴, 비아냄)

부활절을 맞아 펴들었던 헤르베르트 브라운의 『예수와 그의 시대』와 리처드 보컴의 『예수 - 생애와 의미』를 다 읽었습니다. 두 권 다 일종의 짧은 예수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새로운 탐구’에 속하는 급진적인 독일 신학자가 50년 전에 묘사한 예수의 얼굴과, 복음주의권의 새 흐름을 대표하는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가 우리 시대에 그려낸 그리스도의 초상은 사뭇 달랐습니다.

헤르베르트 브라운은 역사적 예수의 ‘새로운 탐구(New Quest)’시대에 속하는 학자입니다. 그 말은 브라운이 복음서에서 믿을 만한 예수의 말(ipsissima vox Jesu)를 판별하는 기준이 ‘차이의 기준’ 혹은 ‘비유사성의 원칙’이라는 뜻입니다. 즉 “복음서에 예수의 말씀으로 기록된 본문들 중에 유대적인 형식을 취했지만 당대 유대교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출될 수 없는 내용을 가진 말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라)”이 참된 예수의 말씀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기준을 복음서에 적용해 추출해 낸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철저하게 ‘참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헤르베르트 브라운, 예수와 그의 시대, 대한기독교서회, 1973년
헤르베르트 브라운, 예수와 그의 시대, 대한기독교서회, 1973년

브라운에 따르면 예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공로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전적인 ‘은혜’와 외적 안전이 보장되지 않음에도 자유롭게 사랑으로 행하는 ‘순종’으로 이끄는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탐닉이나 황홀경 속에서가 아니라 순종하는 행위 속에서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며,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란 제한 없는 이웃사랑과 인간을 섬기는 봉사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과 그의 곤경이 제의적 율법의 준수보다 우선권을 가지며, 참된 예배는 곤궁한 가운데 있는 인간에 대한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사랑 ‧ 이웃사랑이라는 하나의 초점을 향하고 있으며,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실천했던 참 인간이었습니다.

브라운은 이러한 ‘참 사람’ 예수를 경건한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나 헬라적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神人 theios aneer)로 고백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바로 다양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살아가던 초대교회 공동체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은 예수의 권위를 보증하는 ‘즉자적 존재’가 아니고, 그 권위의 표현이자 “인간의 자기 용납의 한 양식”이라고 주장합니다. 값없이 받아들여진 은혜로 자신을 용납한 인간이 자유로운 순종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서만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급진적인 ‘신학적 지평 전이’는 당연히 “신학을 인간학으로 환원”시켰다거나, “하나님의 즉자성을 의심함으로서 기독교 신학이 서 있어야 할 최소한의 토대마저 위태롭게 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고 합니다.

리처드 보컴은 복음서가 예수가 살았던 1세기 근동의 맥락에서 예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며, 목격자들의 증언에 바탕을 둔 동시대 인물에 대한 충실하고 신뢰할 만한 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브라운이 했던 것처럼 예수가 했던 말을 가려내는 특별한 기준에 부합하는 본문만으로 ‘최소한의 예수’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요한복음을 포함한 네 권의 복음서가 예수를 그려낸 방식을 모두 진지하게 다루려고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양식비평을 포함한 근대 성서비평학의 기본적 전제인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이원론은 이제 증언을 통한 예수(Jesus of testimony)라는 일원론적 패러다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보컴이 그려 낸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출애굽을 가져다 줄 메시아를 대망하던 당대의 백성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고 성취한 분이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자들을 치유하고 죄를 용서해 주었고,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사회적 경계를 허물었으며, 당대의 서열 구조(patron-client relationship)에서 벗어나 한 아버지를 예배하는 공동체를 조직했습니다. 지혜로운 훈계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던 예수의 가르침과 토라 해석은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고 믿으며 새로운 상황에서 그 통치에 따라 살고자 했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삶과 행동은 그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히브리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과의 독특하고 친밀한 관계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예수는 자신이 신적인 권위를 지녔음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리처드 보컴, 예수 생애와 의미, 비아, 2016년
리처드 보컴, 예수 생애와 의미, 비아, 2016년

보컴에 따르면 이러한 그의 가르침과 실천은 당대의 유대 지도층을 자극했으며 그들은 로마와 합세해 신성모독과 반역의 죄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과월절 어린양이나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에 비추어 이해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기 위한 자신의 사명이 죽음을 통해 완성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초로 탄생한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처음부터 부활한 그리스도를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이후로 성육신이라는 내러티브로 복음서를 읽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보컴의 예수 읽기는 대체로 표준적인 복음주의의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만, 성서신학자의 저술답게 ‘성육신’이나 ‘속죄’같은 교리적 주제보다는 ‘하나님 나라’라는 성서신학적 주제에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으며, ‘들을 귀’를 가진 분이라면 여기저기서 역사적 예수연구의 ‘제3의 관점’에 속한 성서신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브라운이 그려낸 ‘인간 예수’ 보다 보컴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훨씬 친숙하고 편안할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과연 ‘증언을 통한 예수’라는 보컴의 주장이 기독교 내러티브에 익숙한 ‘우리’ 말고, 교회 바깥에 있는 ‘저들’에게도 우리에게 그렇듯 편안하고 당연하게 느껴질까요? 21세기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저들’은 보컴이 이 책에서 제시한 부활의 ‘증거’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까요? 과연 ‘우리’말고 ‘저들’에게 브라운의 ‘인간 예수’와 보컴의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중 어떤 그림이 타당하게 다가오게 될까요?

21세기에 ‘성육신과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믿는 분들이라면, 이렇게 ‘당연한’ 증거가 있음에도 믿지 못하는 ‘저들’의 불신앙을 비난하거나 어리둥절해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보여주는 예수의 초상이 80%가 넘는 ‘저들’에게 얼마나 이상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일자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 한 번도 자신의 신앙고백을 '판단정지’시켜보지 않은 사람, 한 마디로 ‘브라운을 진지하게 통과하지 않은 보컴’류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쩌면 모래위에 지은 집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