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 선물은 다섯 아이다
내 생일 선물은 다섯 아이다
  • 엄경희
  • 승인 2018.04.12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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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쿨 맘 엄경희의 사우디 통신

내 생일이건만 파티 준비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져 파티는 생략하고 윤하 가졌을 때 유일하게 맛나게 먹었던 중국요리가 생각나 저녁 외식이나 하자고 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이 대뜸,

우리 돌아가면서 엄마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나눠보자!”

이게 무슨 소리지? 순간 아이들이 !’ 하는 표정이다. 24시간 일년 열두 달 늘 붙어 있는 엄마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이야기하라니, 이내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이어지다, ‘흠 그거 재미있겠네하는 의욕이 잠깐 일렁이더니, ‘좋다한다. 먼저 말을 한 사람이 그다음 사람을 지목하는 형식이었지만 여기에는 아이들 나이 순서대로 소개해 볼까 한다. 짧은 시간 안에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떠올린 이야기였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하나같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막내 윤하는 물어보나 마나 엄마 쭈쭈였다. 세 돌이 지난 윤하는 아직도 빈 젖을 찾는다. 슬프거나 기분이 상했을 때, 다쳐서 울음이 나올 것 같을 때, 잠에서 깬 직후에 엄마 쭈쭈를 찾는다. 아무리 심하게 슬프거나 아파도 쭈쭈를 떠올리는 순간부터 일그러진 울음 사이로 미소가 번지고 쭈쭈를 물면 이내 잠잠해진다. 젖을 물고 자는 바람에 이빨이 다 썩어 치과 치료를 받는 고생을 톡톡히 치렀지만, 그동안 쭈쭈로 인해 누린 윤하와 엄마의 행복을 고려할 때 하나 억울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까지 쭈쭈를 찾으려는지. 슬하는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지 한참 뜸을 들이더니 나만 들리도록 우물쭈물 엄마랑 같이 공부할 때...”라고 속삭이듯 이야기한다.

언니·오빠 공부와 막내 윤하 돌보는데 밀려 슬하는 늘 나중 순위다. 그게 늘 마음에 걸리는데 슬하는 아침에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혼자 할 수 있는 공부를 다 끝내고 피아노 연습에 운동까지 한다. 거기다가 밥 먹고 바로 이빨 닦는, 언니·오빠 들은 결코 하지 못하는 그 어려운(?) 일을 스스로 해낸다. 그뿐 아니다. 슬하가 윤하랑 잘 놀아주는 덕에 나는 큰 아이들 공부시킬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내가 공부하자고 하면 은근 내빼고 싫어하는 듯하더니 엄마랑 공부할 때가 특별하다고 하니 왠지 마음이 짠했다. 더 관심을 쏟아야겠구나! 확 정신이 들었다.

다섯 중 최고 집중 우선순위는 앞으로 슬하다!

엄마가 나랑 싸워줄 때…….”

준하의 이야기다. 자못 확신 있다는 표정이다나는 준하랑 정말 많이 싸웠고 지금도 싸움 중이다. 하고 싶은 것은 곧 죽어도 해야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죽어도 안 하려고 하는 황소고집 준하와 나는 늘 뿔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는 수컷 싸움을 하듯 싸운다. 준하에게 권위자로서 온전한 순종을 받아내기까지 그야말로 혈전을 치러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준하가 그렇게 자신과 싸워준 것을 고마워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엄마가 줄 수 있는 가장 에너지 많이 들어가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디 준하고만 싸웠겠나? 나는 다섯 아이 모두와 싸우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기중심적으로 그릇되게 고집을 피울 때 그것에 맞서 싸우는 게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하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렵고 귀찮고 재미없고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것을 거듭거듭 느끼고 있다. 때로 준하나 다른 아이들의 고집과 맞서 싸울 힘이 없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싸워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한다. 나는 내 힘이 달려 막내까지 이 싸움을 다 싸워주지 못하면 어쩌나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나는 아직 누구 때문에 아파본 적이 없는데 엄마가 나 때문에 아팠을 때.”

수하의 이야기다성하랑 싸우다 된통 앓아누운 때는 이미 아련해졌고 준하랑은 일상이지만 늘 엄마 말을 가장 잘 따라주었던 수하 때문에 아파보기는 최근에 처음이었다. 홈스쿨 그 자체로 가해지는 부담이 참 크다. 나는 부끄럽게도 그 부담을 여유 있게 감당할 만큼 마음도 몸도 강하지 못해 늘 내 연약함으로 탈진이나 몸살을 앓곤 한다. 하나 같이 내 틀과 뜻대로 아이들을 몰아가려다 잘 안 되었을 때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때였다. 그렇게 한 차례 앓고 나면 신기하게도 내가 바뀌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해 주곤 했다. 내 틀로 자유분방한 아이들을 제한하고 몰아가려다 내 좁고 협소한 틀이 깨지는 경우라고나 할까?

수하에게 잘 말해 주어야겠다. 엄밀하게 말하면 수하 때문에 아팠던 게 아니라 너희의 자율과 자립에 맞게 치수를 키우지 못한 엄마의 무리한 통제 틀이 스스로 붕괴한 현상이라고. 실제 최근에 내 몸살 이후 나는 수하에게 드디어 홈스쿨 독립을 선포했다. 중학 나이의 아이를 엄마의 스케줄이나 계획대로 몰아가는 게 무리라는 것, 아이가 스스로 해나가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아파서야 알게 되었다. 수하를 놓아주고 나는 다시 행복하게 홈스쿨을 누리고 있다.

제법 생각이 어른스러운 성하는 어떻게 이야기할지 자못 긴장했다. 그런데 참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평소에는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그냥 평범한 가정주부 같은데 성경 말씀을 이야기할 때는 뭐랄까 GLORIOUS 한 빛이 나……!”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기뻤던 것은 성하가 말씀의 영광을 경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홈스쿨에서 가장 비중을 크게 두고 있는 게 성경이지만 자칫 아이들에게 잔소리나 죽은 설교로 다가갈까 봐 절대 강요하거나 밀어붙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던 터였다. 내 모습이 있는 그대로 다 노출된 상태에서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더욱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내 위선이 폭로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아니던가? 그런데 성하가 말씀을 나누는 내 모습에 감히 영광의 빛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표현을 투사해 주다니 그 무엇과 비교가 안 되는 감격이 몰려왔다. 24시간 부대끼는 아이들에게 아무리 말씀을 멋들어지게 전한다고 내 모습을 포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하가 이렇게 말한 것은 말씀의 영광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사우디에 살다 보니 아이가 대학을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은 어디 대학을 가느냐보다 이제 부모 곁을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로 더 크게 다가온다. 부모 없이 이 예측 불허 고통 충만의 세상을 살아가는데 진정한 기본 준비는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말씀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신앙의 독립이라 여긴다. 그 독립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성하의 이런 고백이 그래서 더 깊이 감사했다.

내 생일날은 수하와 준하가 멀리 바이올린 교습을 다녀오느라 아이들이 시간이 없었다며 생일 다음 날 파티를 준비하겠단다. 수하의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롤 케이크과 준하의 납작하지만, 맛은 일품인 치즈 케이크으로 파티를 했다. 슬하의 카드, 아직 글 쓰는 걸 어려워하는 준하의 엄마, 생일 축하해글자가 숨어있는 기발한 카드, 그리고 수하와 성하의 장문의 편지. 특히 성하와 수하의 편지를 읽다 나는 그만 울컥 눈물을 쏟아냈다.

아이들이 이렇게 컸구나. 그러고 보니 해를 거듭할수록 내 나이는 더 많아져 슬프지만, 아이들 다섯은 눈에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어마어마하게 큰다. 매해 내 열매가 점점 커지고 무르익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매해 내 생일은 갈수록 더욱 풍성해질 거란 예측이 가능하다. 또 어느 시점부터는 제 짝을 데려올 거고 꼬맹이 2세도 나올 거고. 그렇게 내 생일은 갈수록 풍성해지겠구나. 비록 나는 늙어가도. 늙어간다는 슬픔을 열매의 풍성함이 압도하는 삶, 남은 생일을 향해 내가 가질 수 있는 거대한 위로의 소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내 생일 선물은 살아있다. 그래서 매해 커진다. 내 생일 선물은 다섯 아이다. 내 인생의 열매다. 내가 수고하는 내 노고의 동산에서 나는 찬란하게 푸르른 무성한 잎사귀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 그리고 가지가 휘도록 풍성하게 잘 익은 열매를 소망할 수 있다. 그 소망과 기대가 내가 누리는 최고의 생일 선물이다.

 

글쓴이 엄경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살며 다섯 손가락 꿈나무 5남매를 기독교 독서 중심의 홈 스쿨하는 엄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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