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돌들이 소리 지를 것입니다
[곽건용] 돌들이 소리 지를 것입니다
  • 곽건용
  • 승인 2018.03.28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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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노트 - 누가 19:28-44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생각

 

종려 주일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때는 이스라엘의 해방절인 유월절 직전이었습니다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 상황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에는 모든 유대인이 예루살렘을 순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원근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왁자지껄했습니다. 유월절이 유대인의 해방절이었으므로 그때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긴장감이 넘쳤습니다. 이에 로마 당국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봉기가 터질지 몰랐습니다.

영화 택시운전사
영화 택시운전사

저는 이때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19905월 광주의 그것과 비교해봅니다. 그 해는 광주항쟁 10주년으로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광주로 몰려들었습니다. 기차와 고속버스는 물론이고 광주로 들어가는 길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고 경찰은 샅샅이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것처럼 꾸미고 광주에 입성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다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마치 예루살렘이 최종 목표지인 것처럼 말입니다. 거기서 생을 마치고 다시는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을 것처럼 비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해집니다.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입성하자마자 성전으로 가서 그곳 마당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고 환전상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그들을 내쫓으시며 성전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이 모든 악의 근원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보여주는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19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우셨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살아 있는 인격이라는 듯이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시며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궁금해집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에게 어떤 곳이었을까요?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전은 양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하느님이 계시는 하느님의 집이고 가장 거룩한 곳으로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시편 노래를 부르며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이른바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야훼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 나는 기뻤다.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
예루살렘아, 너는 모든 것이 치밀하게 갖추어진 성읍처럼 잘도 세워졌구나…….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하여라.
예루살렘아,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네 성벽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네 궁궐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빈다.” 하여라... 야훼 우리 하느님의 집에 복이 깃들기를 빈다(시편 122편에서).

하지만 동시에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의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예언자가 성전과 거기서 드려지는 제사를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그중 예언자 미가의 비판이 가장 혹독합니다. 일부를 인용합니다.

야곱 집의 지도자들아, 이스라엘 집의 지도자들아, 곧 정의를 미워하고 올바른 것을 모두 그릇되게 하는 자들아,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는 백성을 죽이고서 그 위에 시온을 세우고 죄악으로 터를 닦고서 그 위에 예루살렘을 세웠다. 이 도성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힌다. 그러면서도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야훼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큰소리를 친다. ‘야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로 너희 때문에 시온이 밭 갈듯 뒤엎어질 것이며 예루살렘이 폐허더미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은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것이다(미가 3:9-12).

과연 예루살렘은 바빌론에 의해 멸망했고 성전은 바빌론과 로마에 의해 두 번 파괴됐으니 미가의 예언이 성취됐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예루살렘과 성전은 예수님에게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이었을까요? 부푼 마음으로 노래하며 올라가는 곳일까요, 혹독한 심판의 대상일까요? 아니면 둘 다였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둘 다 아니었을까요?

 

Carle Vernet, the Triumph of Aemilius Paulus(1789), 뉴욕 Metropolitan Museum of Art
Carle Vernet, the Triumph of Aemilius Paulus(1789), 뉴욕 Metropolitan Museum of Art

바보들의 행진?

저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민중 신학자 서남동 목사님이 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글을 읽고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40년 전의 일입니다. 서 목사님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일종의 바보들의 행진같은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로마 황제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붉은 주단이 깔린 길을 빛나는 흰말을 타고 화려한 꽃이 뿌려지는 가운데 보무당당한 개선 행진을 벌인 데 반해서 예수님은 누더기 겉옷이 깔린 길을 아이들이 종려 가지를 흔드는 가운데 초라한 나귀를 타고 뒤뚱거리는 행진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서 목사님의 글을 읽기 전까지 저는 예수님의 행진을 왕의 행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박하지만 그래도 메시아 왕의 행진이었다는 데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서 목사님이 그걸 바보들의 행진이라고 해석하니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예수님의 행진은 확실히 왕의 행진이라기보다는 바보들의 행진이 맞습니다세상에 누더기가 깔린 길을 어린 나귀를 타고 뒤뚱거리며 행진하는 왕이 어디 있습니까이 광경을 본 사람 중에는 스가랴 예언자의 예언을 떠올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강에서유프라테스 강에서 땅끝까지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슥 9:9-10).

저는 예수님이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그런 행진을 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흔한 착각은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이 구약성서의 내용을 훤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문맹률이 80~90%에 달할 정도로 높았고 무엇보다 글로 기록된 성서가 흔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사야나 시편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은 스가랴의 한 구석에 등장하는 예언을 알고 계셨을 가능성도 높지 않습니다. 오늘처럼 호텔 방에 가도 성서를 쉽게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마 훗날 예수의 제자 중에 성서에 밝은 누군가가 예수님의 행진을 회상하고 스가랴의 예언을 떠올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예언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이 예언의 성취를 어린 나귀에 국한하는 일입니다. 추측하건대 누가 됐든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진을 보고 스가랴의 예언을 떠올렸던 사람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보다는 그 사건이 가진 의미에 더 주목했을 것입니다. 스가랴 예언자는 예루살렘 더러 왕이 오시니 기뻐하라고 말하면서 그를 공의로운왕이고 구원을 베푸는왕이라고 불렀습니다.

Hippolyte Flandrin, Entry into Jerusalem (1842)

여기서 우리는 '공의'와 '구원'이란 말이 가진 의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 대개의 '공의'는 우리에게는 공의요 정의지만, 남에게는 불의입니다. '구원' 역시 우리에게는 구원이지만 남에게는 심판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단적인 예로, 야훼 하느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이 그들에게는 선물이고 구원이었지만 이미 그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심판이요 멸망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공의가 남에게도 공의가 될 수 있을지, 우리에게 구원이 남에게도 구원일 수 있을지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왔습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라는 단체는 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다친 사람이 어느 편인지 따지지 않고 도와주고 치료해주는 의사들의 모임입니다. 나와 남의 구별이 없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델이 적용되는 영역은 극히 드문 게 사실입니다하느님은 스가랴의 입을 통해서 장차 올 메시아 왕은, 어린 나귀를 타고 바보들의 행진을 할 왕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군마와 활을 없앨 것이라 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별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언은 우리 편무기를 없앨 것이라 했습니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편이 먼저 무기를 내려놓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야만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가 이루어지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강에서 땅끝까지 샬롬이 실현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I Am Not Your Negro)

저는 이번에 이 구절을 읽으면서 최근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떠올리며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우리 겨레처럼 이스라엘에도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숱하게 외국의 침략을 받았고 때로 침략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전쟁은 명분을 갖고 이뤄지지만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고통당하며 죽는 쪽은 명분을 내세우는 권력자들이 아닌 힘없는 민초들입니다. 그래서 민초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지도자보다 전쟁하지 않는 지도자를 더 원합니다. 주변 나라들과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게 해주는 지도자를 민초는 원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들이 계속되는 전쟁에 얼마나 지치고 신물이 났으면 자국 군대의 병거와 군마를 없애고 창칼을 꺾어버리는 왕을 원했겠습니까. 이를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너희가 먼저 핵을 포기해라.”라거나 평화협정을 먼저 맺자.”라면서 옥신각신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겨눴던 총부리를 내려놓고 먼저 협상 테이블에 앉는 지도자입니다. 그렇게 변화할 가능성이 실낱만큼이라도 열린 것 같아서 우리는 기대를 하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두 주일 전에 오렌지카운티 영화 모임에서 <나는 당신의 니그로가 아니다>(I Am Not Your Negro)라는 영화에 관해 토론했습니다. 영화는 미국의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의 <리멤버 디스 하우스>(Remember This House)라는 미완의 에세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라고 합니다. 영화에는 1963년에 흑인 시민운동가 메드가 에버스의 살해, 1965년의 말콤 X의 살해, 그리고 1968년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살해 등 5년 사이 벌어진 세 명의 흑인 민권운동가의 살해에 관해 얘기하면서 미국의 인종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는지아니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볼드윈은 메드가 에버스처럼 미국 흑인 지위 향상협회(NAACP) 회원도 아니었고 말콤 X처럼 흑인 모슬렘도 아니었으며 킹처럼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지한 흑인 목사들은 우리를 짓밟는 짐승들에게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 한다.”면서 말콤 X가 마틴 루터 킹을 비판하고, “악에 저항하지 않는 것과 비폭력 저항엔 큰 차이가 있다.”고 킹 목사가 응수하는 등의 갈등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훗날 그들의 관계를 이렇게 회고한 게 인상적입니다. “극과 극이었던 두 남자의 위치가 서로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걸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날 무렵엔 마틴이 말콤의 몫까지 짊어지게 되었다.”

ⓒAllan Warren

버락 오바마가 젊은 시절 자기 정체성 확립에 영향을 준 작가로 제임스 볼드윈을 꼽았다는데 영화에는 흑인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제임스 볼드윈은 1965년 한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는 40년 안에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백인들에겐 이 말이 꽤 해방적인 말로 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할렘 주민에게 그 말은 이 땅에서 400년이나 살았던 우리에게 착하게 굴면 40년 뒤에 대통령을 시켜주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어쨌든 로버트 케네디의 말처럼 제임스 볼드윈의 책을 읽고 자란 오바마는 첫 흑인 대통령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가 8년 재임하는 동안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 흑인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발전이 이뤄졌습니까?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흑인들은 얼마나 더 평등해졌다고 생각할까요?

 

돌들이 소리 지를 것입니다!

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종려 주일 본문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하나의 영감이 제 머리를 때렸습니다. ‘아하, 이게 이런 뜻이구나!’ 예수님은 군중들이 환호성을 울리자 이를 불평하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을 억지로 잠잠하게 하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를 거랍니다. 이 구절은 입성 장면 전체를 새롭게 보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초라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바보처럼 뒤뚱거리며 행진하신 것은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군중들에게로 돌리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던 겁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로마 황제가 승전한 후에 모든 영광을 독차지한 것처럼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요 구원자가 이끄는 게 아니라, 길가에 무수히 놓여 있는 돌들처럼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무수한 군중들의 행진으로 진행되고 성취되는 것이란 얘기입니다예수님은 이를 보여주시려고 스스로는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아니 결국에 가서는 모든 이들의 눈길을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행진하셨던 겁니다.

by Enrique Simonet, Flevit Super Illam (He wept over it), 1892
Enrique Simonet, Flevit Super Illam (He wept over it), 1892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우셨다는 사실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울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흔히 우는 것은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련한 사람을 보고 눈물 흘리는 사람, 남이 당하는 고통에 같이 울어주는 사람은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공감 능력을 가진 강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같이 분노하고 우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공감 능력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공감 능력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공감 능력이 크고 넓을수록 신앙이 깊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광경을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고 서로 어깨를 의지하는 투박한 사람들의 결기가 있고 우는 아기를 달래가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그렇게 웃고 울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소리 지르는 가운데 차차 목소리와 박자를 맞춰가는 길고 긴 저항의 길입니다. 지치지 않고 꿋꿋하게 가는 길입니다. 저는 우리도 이 장면 속의 사람들이기 바랍니다. 남루한 옷을 벗어 길 위에 깔아놓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힘차게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마음껏 웃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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