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들의 경고를 듣는다
가나안 성도들의 경고를 듣는다
  • 정한욱
  • 승인 2018.03.22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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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가나안 성도, 포이에마, 2014년
양희송, 가나안 성도, 포이에마, 2014년
양희송, 가나안 성도, 포이에마, 2014년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운동가인 청어람아카데미 양희송 대표가 우리 시대 한국교회의 새로운 현상으로 떠오른 가나안 성도’ ‘가나안 신앙을 정면으로 다룬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가나안 교인들의 등장이 기존의 교회론이나 대안 교회 운동을 넘어, 교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요구하는 징후적 사건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를 향한 거친 비난과 서투른 대응을 멈추고 어떻게 하면 정공법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논의해 보자고 제안한다. 책의 내용을 자유롭게 요약하고 마지막에 간략한 개인적 단상을 덧붙이도록 한다

가나안의 현상학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즉 가나안 성도는 현재 많게는 약 200만 명 안팎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이들은 다니던 교회를 떠나기 전 평균 14.2년 정도 출석했고, 평균 6개월 정도 떠나는 것을 고민했으나 목회자나 주변 사람들이 의미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기로 한 이유는 주로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불만교회 내 인간관계에서의 불만때문이었으며, 과거 30~40년간 한국 개신교의 성장을 이끌어 온 중대형교회들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부적 갈등 증가와 교회가 보수 우파와 필요 이상으로 밀착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의 거부감을 유발한 것도 가나안 교인의 급등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수준 이하의 설교나 권력 남용, 약자와 소수자 배제 등으로 인한 숨막힘과 속물다움이 지배하면서도 표리부동 하는 사람들에 의해 야기되는 위선, 그리고 대개 참혹한 결과로 이어지는 분쟁도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다

성인용 기독교의 부재 가나안 현상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한국교회에 성인용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유치원 과정 - 교회 내에 어른답게 정서를 표현하는 방법이 거의 개발되지 않아서, 사람들을 정서적 퇴행 상태로 몰아넣곤 한다. 교회는 성인용 기독교를 가르칠 능력이 없거나 가르칠 의사가 없다. 무한 반복되는 구원의 확신 - 그가 무슨 훈련을 받았건 구원의 확신부터 시작하는 프로그램에 집어넣는다대부분 교회에서구원이라는 죽고 사는 경계를 확정하는 최종심급의 사안으로 간주하지만, 구원론의 내용은 <사영리>수준 이상으로 심화하지심화되지 않으며, 구원의 확신으로 시작된 제자훈련은 그 귀결을 전도 혹은 선교로 삼아 수미쌍관을 이룬다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거나 대화하지 않음 - 교회는 답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시간 낭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성급하게 상대에게 가르치려 들고, 교정하려는 압박이 강하다

가나안 성도가 아닌 것 이러한 가나안 성도 현상은 이단이나 열광주의적 운동 같은 교회 밖 신앙 운동과 유사한 부분이 있고, 종종 이 둘은 같은 현상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나안 성도들은 이런 운동들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고, 특정 교회나 운동에 대해 맹목적인 추종자가 되려 하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또한, 더 편한 교회 더 나은 환경을 찾으며 종교 생활을 통해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유익을 얻으려는 교회 쇼핑족,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교회를 떠나는 교회 난민들, 따지기 좋아하고 자기 소신이 강한 영적 엘리트주의자들, 영적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영성 소비자들, 언젠가는 기성 교회로 돌아올 잃어버린 양 역시 가나안 교회 현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서구 복음주의의 새로운 흐름 서구 기독교의 경우 기독교 신자들의 교회 이탈은 비교적 일찍부터 관찰됐고, 그간 세속화가 종교인구 감소의 주요 원인이라는 설명이 정설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이론은 197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근본주의 종교의 발흥을 포함한 새로운 종교성의 부흥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1990년대부터는 1970~80년대의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증가와는 결이 다른, 교회와 신앙 자체에 대한 자기성찰적이고 비판적인 평가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가나안 성도 현상을 포함해 전통적 교회를 넘어서는 새로운 신앙 유형이 나타나도록 자극하고 지지하는 이런 움직임에는 미국의 짐 월리스가 주도하는 소저너스나 영국의 포스트 에반젤리칼 운동이 포함되지만, 그들 중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머징 교회 운동이다

이머징 교회 운동 이머징 교회 운동은 교회성장 지향의 전도나 구도자 중심의 예배보다 더 오래된 기독교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를원했고, 교회사의 잊힌 전통들을 되살리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를 꿈꾸었으며, 세상 속에서도 기독교 문화의 울타리가 아닌 성육신적 참여를 추구했다. 이 운동은  이머징 교회 운동을 교회 내의 청소년 집단을 위한 사역 전략이나 문화적 접근으로 여기고 활용하며, 신앙의 내용은 보수적이지만 그 표현 양식은 포스트모던 문화에 맞추어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믿는 세련미 추구자들(
Relevants) 
복음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의 교회가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기에 상당한 개혁과 변화가 절실하다고 주장하며, 기성교회에 대한 신학. 문화적 대항운동으로 가정교회 운동? 신수도원 운동? 선교적 교회론과 같은 대안적 교회를 제안하는 재건주의자들(Reconstructionist), 포스트모던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신앙 표현이나 신학적 자원을 복음주의 바깥에서 폭넓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면서 기독교 신앙과 교회 자체를 재정의하거나 확장하려고 시도하는 수정주의자들(Revisionist)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반대, 성직주의/성장주의/승리주의에 대한 반대,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해 재고라는 측면에서 가나안 현상과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속의 가나안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 정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정당화되기 쉽지 않은 이유는 그간 우리가 들어왔던 교회론이 그런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 곧 교회 생활이며 교파를 막론하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를 의심 없이 수용하는 상황에서 교회 바깥을 꿈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제도권 교회로부터의 일탈은 늘 있었으며, 그것이 기존 교회의 바깥에 어떤 종류의 대안을 만들자는 선명한 깃발과 더불어 등장한 경우에는 개신교나 아나뱁티스트와같은 독자적 세력의 탄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따라서 가나안 교회 현상은 전혀 낯선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역사 내내 존재해 온 현상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만나는 가나안 성도 현상은 아직 제도 바깥에 세우고자 하는 집단적 대안을 뚜렷이 상정하고 있지는 않다다른 교회를 상상해낼 역량이 소진되어 있을 수도, 해체나 분산 자체를 대안으로 인식하고 있을 수도, 누군가가 시작할 새로운 대안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가나안 성도와 새로운 교회론 가나안 성도 현상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고 성급하게 논의를 봉합하거나 기존의 목회적 기술로 이들을 교회의 멤버로 포섭하겠다는 전략을 논하는 것은 제대로 된 대응이 아니다. 가장 바람직한 대안은 가나안 성도 스스로가 자신들을 위한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그들은 대체로 인자한 왕이 없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낄 뿐 왕이 없는 세상이 필요하다는 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기존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대안 모색의 사례를 살펴보면 지향하는 목표에 비교해 그들이 가진 신학적 실천적 도구가 매우 빈약해 보인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교회성장론외의 다른 교회론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가나안 교인들의 등장은 기존의 교회론이나 대안 교회 운동을 넘어, 교회에 대한 다른 패러다임다른 가능성을 상상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에클레시아의 재구성 톰 라이트에 의하면 신약의 에클레시아(교회)는 과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들을 둘러싼 총체적 삶과 문화를 지시하는 유대적인 것을 대치할 새로운 카테고리로 등장한 개념이며, 복음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탄생한 사랑의 공동체인 에클레시아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에클레시아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매우 새로운 가치관과 실천의 장을 일컫는 이름이지만, 그 자체는 영속적 가치나 신학적 의미를 지닌 고유명사가 결코 아니며, 에클레시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특정한 제도가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교회형태를 채택하는 것만으로 에클레시아 됨이 자동으로 보장되지는 않으며, 현대 사회에서 에클레시아가 구성되는 방식은 성경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다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라는 이름을 달고 그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교회는 에클레시아에 가장 적대적인 대적이자 장애물이며, 가나안 성도의 대거 등장은 한국 교회 현실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자 이름은 있으나 행함은 없는 명목상의 에클레시아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진격의 가나안 가나안 성도들은 여러 이유로 기성교회라는 성벽의 바깥으로 나가기로 한 사람들이자, ‘현존하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벗어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수행되는 가나안 신앙이란 자신에게 익숙한 철옹성 같은 제도교회의 성채를 떠나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처럼 하나님을 새롭게 알기 위해 길을 떠나는 법을 익히는 길 위의 신앙하나님이라는 절대 타자와의 조우를 위해 끊임없는 질문과 함께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발하고 계속해서 방향을 수정해 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미지의 신앙자신들의 모험 가운데 우연히 만나게 되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웃이 되어주는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나안 신앙인의 예로는 종교개혁의 광풍 한가운데서도 끝끝내 한 쪽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채 나는 나 자신만을 대표한다’(Erasmus est homo pro se) 라고 외쳤던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와, 모든 평신도가 성경을 자기 양심에 따라 스스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
성도 개개인이 하나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1인 1교회(a church of one person)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존 밀턴, 당대의 전형적인 신학적 노선을 따르지 않은 채 존재와 삶 전체가 전적 기독교였던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이미 시작된 탈교회 경향을 가속하고 그런 흐름에 정당화의 논리를 제공해줄 것이라는 우려와, “그래서 대안이 뭐냐는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실제로 이 책이 처음 나왔던 2014년에 100만으로 추정되었던 가나안 성도는 2018년 현재 200만에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에 가나안 현상을 부추겼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가나안 현상을 꿰뚫어 볼 안목을 가지고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지 함께 논의해 보자는 저자의 당부를 외면한 채, 작동하지 않는 전통정통을 붙들고 비난과 외면과 미봉책으로 일관한 한국교회에 압도적인 책임이 있지 않겠는가? 저자가 쏜 화살이 어떤 과녁에 가 닿을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결국 보수 정통을 자처하는 한국의 주류 제도교회일 수밖에 없다. 내가 볼 때 한국의 주류교회는 저자가 대변하는 가나안 성도들의 경고를 들을 능력도 없고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는 다행히 보수적이지만 극단적이지는 않았던 한 장로교회에서 큰 무리 없이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교회와 관련된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들을 수 있는 낯부끄러운 뉴스들과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노골적인 배제와 혐오의 목소리를 접할 때마다, 제도교회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예수를 따르기 위해 교회를 떠난다(leaving church to follow Jesus)"는 말이 점점 더 마음에 와닿기 시작한다. 과연 가나안 성도를 대량으로 양산하는 한국의 제도교회에 소생의 희망은 있는 것일까? 과연 나는 언제까지 신앙의 이름으로 강단에서 선포되는 혐오와 배제의 메시지를 참아낼 수 있을까한국교회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가나안 성도들의 분투와 탐색이 새로운 유형의 기독교 신앙을 찾아가는 작업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글쓴이 정한욱 원장은, 우리안과 원장으로 일터에서 복음을 품고 살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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