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 특히 성서 혹은 신학의 '공공성'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성서적', 혹은 '신학적'에 방점을 찍는다. 혹 거기서 더 나가고 싶은 경우 '철학'으로 가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공공선'이라면, 그 '공공'에 대한 인식, 좀 더 분명한 이해, 더 나아가서 '공공성'에 대한 경험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공공'(public)', '공공영역'(public realm)이라는 게 뭐고, 어떤 실재와 현상으로 나타나고, 어떻게 형성되고,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삶에서 인식할 때, 나아갈 지표가 좀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공공신학의 담론이 한국어권에서 진행되기가 서구권보다 좀 더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공공'/'공공선'/'공공성'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경험이 축적된 시간이 짧아서이지 않을까. 왜냐하면, 역설적이게도, '공공성'이 나름 건강하게 구성되고 자리를 잡으려면 '주체적인 개인'들과 그들 간의 연대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 두 가지가 현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내 이민교회를 보면, '주류사회'라는 층위(layer)가 한 겹이 더 있어서, 이 '주류사회'에서의 공공성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감각도 필요하다. 많은 경우 이민 1세대들에게 이런 것까지 기대하기는 쉽지 않고, 2세들부터라도 그런 감각을 키워줄 수 있으면 다행이다.
아주 구체적인 예는 아니지만. 60년대 한국의 군사정권 시절, 미국에서는 페미니즘, 환경운동, 인권운동 등등에 대한 인식을 가진 '개인'들이 자신이 기반을 둔 커뮤니티에서 풀뿌리 운동들을 시작했다. 그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딱 내 또래의 자녀들은 '풀뿌리 운동'을 삶의 일부로 경험하며 자랐다. 최근 본 TED의 페미니스트 강연을 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 십대를 지나 대학 시절, 그 이후로도 내내 '풀뿌리'를 내리는 일을 해왔다고 한다. 그 사람도 물론 그 과정에 있어서 '풀뿌리'가 '큰 나무' 혹은 '큰 숲'을 이루지 못하는 데 대한 좌절을 경험했지만, '풀뿌리 내리는 삶'의 본이 된 그 부모가 다시 삶의 초점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공공성'은 '집단주의/전체주의'와도 다르고, '위계질서로 움직이는 집단'과도 다르고, 정치적인 과제를 만들어내는 것과도 다르다. '공공선'이 실천될 수 있는 수준(level)도 수없이 다양하다. 집중할 것은, 큰 그림과 큰 목적보다는, 주체적인 '나'의 삶에 와 닿아 있는, 혹은 내가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영역을 관통하는 '공공적'인 이슈들. 그 주제와 배경을 이해하는 지점부터 시작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