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은 기다림이다
묵상은 기다림이다
  • 민현필
  • 승인 2018.03.1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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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하고 함께 말씀 묵상을 하다보면 나눔 시간에 항상 ', 제가 이 말씀을 적용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하면서 자책하시는 모습을 종종 본다성도들이 흔히 적용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두 가지 맥락이 있다. 하나는 그 말씀과 내 삶의 현장을 어떻게든 연결시키는 해석에 관한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신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성도들이 성경을 대할 때 이런 테크니컬한 해석의 문제나 실천에 대한 부담감 보다 먼저 말씀 자체를 사랑하고 그 안에 젖어드는 은혜를 먼저 사모 마음을 누리고 배웠으면 좋겠다.

집에서 종종 목격하는 장면이 있다. 둘째 딸 아이가 밥 먹기를 싫어하고 비실비실한 허약체질이라 엄마가 억지로 쫓아다니면서 밥을 떠먹여주는 경우도 많다. 밥 먹어주는게 무슨 벼슬인줄 안다. 밥을 떠먹여주는 엄마는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할까. "이것아! 빨리 먹고 쑥쑥커서 돈 벌어와야지. 너 어서 튼튼하게 살쪄서 사람들 앞에서 이 엄마 망신시키지 말아야지" 당연히 이런 마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성찬에 참여할 때, 자신의 한계와 전적 무능력을 고백한 사람만이 그 떡과 음료가 내 영혼을 살찌우는 영원한 양식과 음료가 되는 것처럼,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그냥 그 은혜가 좋아서, 말씀과 함께 주님을 만나는 그 시간이 너무 사모함이 되어서 말씀 앞에 서는 것이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이, 적용은 그저 열매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적용점을 '뽑아내야' 한다는 부담을 버려라.

그 말씀이 내 삶의 감추어진 폐부들을 낱낱히 드러내고 심령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은혜의 빛으로 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적용' 체험이다. 말씀을 적용하시는 주체는 '일차적으로'' 내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그 순간에 하나님은 말씀을 성령의 검으로 사용하셔서 이미 다 이루신 그 말씀을 내게 적용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나를 먼저 책임져 주신 그분의 은혜가 내게 먼저 찾아오고, 내가 그 은혜에 반응하도록 나를 초청하시는 사건. 그것이 묵상체험이다. 그 거룩한 요청 앞에서 소명 의식을 자각함으로써 일상 속에서 주님처럼 나 또한 책임적 존재로 서는 것. 그것이 2차적인 적용이다. 그리고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말씀을 큐티가 아닌 '듀티'로 경험하는가. 억지로 말씀을 짜내자니 얼마나 고역일까. 어차피 안되는거, 그냥 누려라. 뭔가 특별한 것을 짜내려하지 말고 그냥 기다리라.

묵상은 기다림이다. 어떤 때는 뭔가가 잘 깨달아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메마른 사막을 걷는 것과도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냥 그러려니 해라.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단추만 누르면 자판기에서 음료수가 쏟아지듯이 그렇게 찾아오시는 분은 이미 성령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99.99퍼센트다오히려 묵상은 적막한 광야로 나아가는 여정에 가깝다. 오아시스는 가끔씩 맛보는 보너스. 인생 자체가 통째로 묵상의 여정인 샘이다.

 

글쓴이 민현필 목사는, 경기도 군포시에 자리한 산울교회 부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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