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우] 1세기 현장에서 일어났던 ‘미투운동’?
[홍동우] 1세기 현장에서 일어났던 ‘미투운동’?
  • 홍동우
  • 승인 2018.03.11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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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하다가 잡힌 여인 사건 (요한복음 7:53-8:11)

요한복음 7:53-8:11에 기록된 사건은 독특하다. 간음사건이 발생한 즉시 남성과 여성은 (모세율법에 의거하면) 돌에 의해 살해당해야 한다. 하지만 남성은 어디간채 여성 밖에 남아있지 않다. 또한 그들을 판결하는 것은 로마법정도 아니고, 대제사장도 아니고, 예수다. 은연 중에 본문은 예수가 모든 이들의 재판관이심을 암시하는 것일까?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은 ‘피의자’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는 예수를 책잡기 위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작품이다. 그의 상대였던 남성은 본문에서 등장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약한 고리인 그녀는 ‘희생양’이 되어 예수를 공격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이런 여인의 상황을 예수는 꿰뚫어봤을까?

오늘 본문의 예수는 마치 1세기 현장에서 일어났던 ‘미투운동’의 사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너희 가운데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치라는 예수의 말씀은 ‘무죄한 이’를 찾고 있다. 일상에서 무죄한 이가 아니다. 간음사건으로부터 이어지는 거대한 사건 가운데 '무죄한 이'를 찾고 있다. 서기관/바리새인들과 그의 일당들은 왜 즉각 처단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남자는 왜 감춰졌을까? 남자가 종교권력을 지닌 사람이지 않았을까? 어쨌건 여인을 둘러싼 수많은 이들은 ‘간음사건’과 관계된 자들이다.

많은 이들이 떠나면서 자연스레 여자의 처지가 드러난다. 그는 ‘피의자’이기 이전에 ‘피해자’였다. 예수와 바리새인/서기관 권력게임의 희생자인 동시에, 간음한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도 철저한 희생자였다. 그렇다, 그녀도 당했다. 자연스레 예수는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

‘간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게로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은 ‘범죄’에 가담했다. 집단범죄였다. 아주 미시적 사건에서 피의자였던 여인은 어느새 거대한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자로 전락해버렸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힘이다. 죄의 힘이 창궐할 때 우리는 모두 피해자로 전락해버린다. 어쩌면 이 여인만 당한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자연스레 죄의 힘에 휩쓸린 사람들이 아닐까? 이 사건 전체를 ‘죄’의 세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도 당했고, 그들도 당했다. 우리 모두는 당한 이들이다. 우리 모두는 죄의 세력 앞에 피해자이다. 물론 누군가에겐 피의자이겠지만.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은 한 피해자를 정죄하고 ‘희생양’으로 만드는 사건이다. 성전에서 일어난 바리새인/서기관의 말은 한 피해자를 정죄하고 ‘희생양’으로 만드는 사건이다. 요한복음은 그와 대비되는 존재, 성전/바리새인/서기관과 대비되는 독보적인 존재 예수를 부각시킨다. 예수로 말미암아 그녀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얻는다.

그 여인은 이후로 죄를 범했을까? 이어지는 요한복음 8장의 문맥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것이 죄라고 말한다. 여인은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시는 예수를 보았다. 성전에서 일어난 정죄의 사건 너머에 계신, 참 성전 예수를 보았다. 그리고 예수를 알아가는 여정에 동참했다. 그가 미시적인 죄악들을 범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분명, 예수를 알아가고, 예수를 배워가는 여정에 동참함으로 그는 근원적은 죄의 세력을 탈피할 수 있었을 테다. 죄의 세력과는 상반되는 선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테다.

그녀는 피해자였고, 피의자였다. 피해자인 그녀가 신원되는 현장, 피의자인 그녀가 용서받는 현장은 바로 예수였다.

 

글쓴이 홍동우 전도사는 아내에게 잡혀 살고 신대원에 잡혀 살고 지역교회에 잡혀 사는, 광인 전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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