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시대를 살아가며 어떻게 설교할까?
악의 시대를 살아가며 어떻게 설교할까?
  • 정재웅
  • 승인 2018.03.0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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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운동에 대한 일고
New York Tomes

2017년 가을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MeToo)이 세계를 휩쓸고, 한국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 여검사의 고백으로 시작한 물결이 사회 곳곳을 휩쓸고, 어제는 반듯한 이미지로 차세대 유력 대권주자로 꼽히던 안희정까지 몰락시켰다. 많은 이들이 금번 미투 운동을 통한 증언들을 접하며 놀라워하는 것은 성폭력이라는 악이 생각보다 아주 보편적으로 깊숙히 퍼져 있다는 것이다.

그 행위 자체도 경악스러운 것들이지만, 특별히 대중들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드러난 가해자들이 대개 사회 지도층으로서 혹은 유명인으로서 존경받고 사랑받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안희정 지사의 경우에는 여성인권을 옹호하는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인 이면에, 한 여성을 위계에 의해 유린한 다른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혹감을 넘어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강상중,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사계절, 2017년

대중에게 드러난 이들의 민낯을 보는 것은 낯선 경험이기에 우리는 마치 처음 겪는 일인 것처럼 반응한다. 그러나 이들의 악행은 기실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사계절, 2017)에서 재일교포 학자 강상중 교수가 얘기한 것처럼 진부한 악이다. 우리가 다들 일상에서 겪고 있었고, 한 다리 건너면 알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로 들어온 이야기들이다. 중요한 것은 왜 이토록 진부한 악이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피해자들을 양산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피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그들이 그동안 침묵하고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피해자들은 대부분 사회의 을()들이다. 새내기 직장인, 대학생들, 신인여배우, 수행비서 등 가해자에게 지배당하는 이들이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그 가해자들과 같이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한 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과 자원을 가진 가해자들과 지내야 했다. 그렇기에 이들이 한 결 같이 얘기하는 것은 그 고통의 순간에 "참아야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아픔을 이야기할 때 그 지배와 종속의 카르텔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참으라고 네가 알아서 잘 대처하라는 한 결 같이 얘기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들이 참아야하는 이유가 그들이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는 것이다. 어렵게 공부하고 검사가 되어 큰 꿈을 꾸는 서지현 검사가 주변이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어렵게 털어놓을 때, 다들 좀 참으라고 그랬을 것이다.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며 연기하고픈 꿈을 꾸는 이들에게, 누군가는 참고 견디라고 다른 이들도 다 겪은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안희정의 수행비서였던 이는 왜 몇 개월간 말도 못하고 참았을까? 그가 부를 때 왜 뱀 굴 같은 그의 방으로 들어가야만 했을까? 부르면 갈 수밖에 없는 수행비서라는 자리가 그동안 참고 견디며 찾아온 꿈으로 나아가는 한 과정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왜 이들은 꿈을 위해 참아야만 했을까?

청년들을 도우면서 근래에 한국과 미국에 있는 젊은이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며칠 전 미국에 유학 온 학생들 커뮤니티에 유학 온 것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이 올라왔다. 수많은 댓글들 중에 눈에 띈 하나는, 한국에 일주일 내내 쉬지도 못하고 사생활도 없이 시달리는 이들이 연봉 2만 불(한화 2400만원)도 안되는 돈 받고 일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고급인력들을 위한 취업 사이트에 들어가도, 온통 기간제/계약직 직원 선발 공고만 보인다. 그나마도 석사 월 180만원, 박사 270만원이다. 이름 모를 중소기업이 아니라, 번듯한 공기업 얘기다. 그런데 그런 직장에라도 들어간 청년들이 상사라는 이유로 회사전통이라는 이유로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는 이유로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할 때, 그 심정이 어떠할까? 마치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수치심과 분노에 절망하지만, 동시에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참아야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을까봐 슬프다.

아마 이런 큰 물결이 일어나지 않을 때, 혼자서 고민하고 회사를 그만둔 이들에게는 아마 이런 말들이 들려지지 않았을까? "그것도 못 참으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니?" 마음의 상처로 집에 있는 그들을 잉여나 무능한 도태자로 취급하지는 않았을까? 작금에 많은 여성 청년들에게 행해진 성폭력이 우리 사회에 폭발력이 있는 문제로 이슈가 되고 있지만, 수많은 남성 청년들도 역시 강압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폭력에 희생당하고 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면서 그들도 역시 참아야 한다를 되 뇌이고 있지 않을까? 혹은 자기보다 더 약한 이들을 희생양 삼아 또 다른 가해자가 되고 있지 않나 걱정이다. , 미투 운동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단순히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청년 실업과 성공을 강요하는 세상 속에서 꿈을 찾아 헤매는 을들의 고통스런 외침을 들려주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JTBC
JTBC

물론 드물게 이 세상에는 그런 일들을 안 당해도 되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의 아들, 딸들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참으며 꿈을 이룰 필요가 없는 이들, 그저 아버지가 전화 몇 통 하면 회사 면접을 보고 그런 추행 폭행의 그림자도 볼 일없이 경력을 쌓고, 얼마 후엔 부모에게 물려받아 욜로(YOLO)를 즐길 수 있는 이들. 누군가의 딸이었던 정유라에게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과 명문대학의 주요 관계자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누구인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이들이 나서서 어떤 특혜를 베풀었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 많은 청년들이 분노했던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 사회에서 약자로서 겪는 현실이 그들만의 고통일 뿐, “니네 부모를 원망해돈도 실력이야라는 그의 대꾸가 아픈 현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한 줌도 되지 않는 이러한 특권층이 얼마 안 되는 이 사회의 기름진 곳을 차지해버리고 나면, 그에 속하지 못한 절대 다수는 나머지를 놓고 아귀다툼이다. 이 사회 주류의 귀퉁이라도 들어간 것 자체가 성공이고, 거기서 무슨 일을 겪든지 악착같이 견디고 참으면서 이겨내야 한다. 이 사회의 이런 욕망의 공식, 성공에 대한 문법이 바뀌지 않으면 도무지 희망이 없다. 이 체제가 유지되는 한 우리는 데자뷰 처럼 유사한 악의 증식을 다시 보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와 불의로 가득 찬 세상에 어떤 이들은 희생자가 되거나 또 다른 이들은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떠나거나 아니면 고통스런 일들을 견뎌낸 후 또 하나의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일들을 손 놓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월터 브루그만, 예언자적 상상력, 복있는사람, 2009년
월터 브루그만, 예언자적 상상력, 복있는사람, 2009년

나는 교회가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설교라고 믿는다. 월터 부르거만(Walter Brueggemann)은 그의 책 예언자적 상상력’(Prophetic Imagination)에서 성공과 번영을 지향하고, 지배자의 논리를 대변하는 제국주의적 의식(Imperial Consciousness)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말한다. 예언자들은 바로 이 제국주의적 의식의 대안적인 의식(Alternative Consciousness)을 가진 이들이었다고 말한다. 슬프게도 우리 한국 강단은 제국주의적 의식을 배양하는 곳이었다. 고지론과 청부론은 그 대표적인 논리이다. 세상은 어차피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있어. 그런데 너희는 지배자가 되고 싶니, 아니면 피지배자가 되고 싶니? 그래도 너희 같은 사람들이 지배자가 되면 좀 나은 제국이 되지 않겠니? 이것이 고지론과 청부론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강단 논리가 보지 못한 것이, 제국주의적 의식 아래에 편만한 악의 유기적 구조였다. 악은 생명체와 같이 세상에 자라난다. 선한 이들이 악한 구조에 들어갔을 때, 악의 구조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고지론/청부론 설교자들은 이러한 악의 유기적 구조를 보는 데 실패했거나, 적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하며 그 편만한 악을 외면했다. 그들이 제시한 것은 순응하는 것이었다. 정직하고 선한 양심을 가진 많은 청년들이 고지론과 청부론을 붙들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세상에서 성공해서 세상을 바꿔보려는 야무진 꿈을 꾸었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크게 두 가지 길을 선택했다. 성공한 악이 되든지, 아니면 악의 희생자가 되어 그곳에서 탈출하든지.

그렇다면 악의 시대를 살아가는 설교자는 어떻게 설교해야할까? 첫째는, 악의 심연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누가 나쁜 짓을 했으니 나쁘다는 식의 단순논리가 아니라, 그 악행의 근저에 있는 악의 구조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겠다. 개별 사건을 단죄하는 것은 무성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놓는 것처럼 악의 연쇄를 끊어놓을 수 없다. 회중이 의식하지 못한 곳까지 뻗은 악을 섬세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실력 있는 외과의사 같은 눈이 필요하다.

둘째는, 악의 희생자들과 공감하고 연대해야겠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바울의 권고가 시작되는 로마서 12장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곧 악의 시대에 살아가며 겪는 고통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악의 시대를 살아가며 상처 입은 이들을 낙오자로 취급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보듬어 함께 울고 그들 곁에 있어주는 설교가 필요하겠다. 경쟁과 배제라는 제국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사랑과 포용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문법을 따라 악에 고통당한 이들을 엄마처럼 품어주고 위로할 수 있는 설교자가 필요하다.

셋째는, 악을 물리치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선포해야겠다. 거대하고 치밀한 악을 우리가 어떻게 다 바꿀 수 있겠는가? 바울을 비롯해 초대교회의 설교자들은 악을 제거하기 위해 혁명을 선동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했다. 그것만이 궁극적인 악의 파멸을 가지고 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악이 파멸한 시대에 어떤 새 세상이 오는 지 요한계시록과 구약과 예언서들이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의 선포가 악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윤동주, 이육사 같은 저항시인이다. 회중들이 이 세상을 욕망하지 않고, 악이 멸망한 하나님 나라를 욕망할 수 있도록 회중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생생하게 눈앞으로 그 나라를 끌어오는 시어로 설교하기를 요청한다.

이 시대에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12:1)은 아마도 우리 설교자들일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염두에 둔 증인들이 악한 세상에서 핍박당하고 고난당하고 이리저리 유리하면서도 끝까지 복음을 증언하였던 것처럼, 악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증인들이 필요하다. 바로 저와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같은 분들 말이다.

 

글쓴이 정재웅 목사는, Styberg 설교학 연구소 코디네이터이며, Garrett-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예배설교학 Ph.D 과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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