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마치 아닌 것처럼 살기
[곽건용] 마치 아닌 것처럼 살기
  • 곽건용
  • 승인 2018.03.07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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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그의 복음을 묻는다 2- 3 : 고전 7:17-24, 29-31

예언이 실패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성서에서 ‘예언’(預言)’이란 말은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하는 말’이란 뜻보다는 ‘전달하라고 위임받은 말’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서의 예언자들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고 그걸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들이 미래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prediction)한 적이 제법 많습니다. 물론 그들은 미래에 벌어질 일을 예언했지만 사람이 하기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성서는 무슨 수를 써도 변하지 않는 정해진 운명이 란 게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에는 고정된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의 미래 역사는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원칙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원칙이 그럴 뿐, 실제로는 개인이나 집단이 예언자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 회개해서 재앙을 면한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경고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징벌을 받았습니다.

Robert Carroll, When Prophecy Failed, 1979

《예언이 실패했을 때 When Prophecy Failed》라는 책이 있습니다. 로버트 캐럴(Robert Carroll)이라는 영국 구약학자가 약 40년쯤 전에 쓴 책인데, 내용은 말 그대로 만일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면서 전한 말씀이 성취되지 않은 경우에 이를 어떻게 타개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캐럴은 주로 예레미야서를 다루고 있는데 매우 흥미로운 책이어서 40년이 지난 지금도 예레미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성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9세기 중반 1840년대에 미국 뉴욕 주에 살던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란 사람이 다니엘 8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을 믿는 사람들은 직장과 사업도 다 접고 재산도 다 팔아치운 다음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구름 타고 오실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그날 재림하지 않았습니다. 이 공동체가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92년에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미선교회를 이끌던 이장림이란 사람이 그 해 10월 28일에 세상엔 종말이 이뤄지고 그때 참된 신자들은 하늘로 높이 들려 올라가는 ‘휴거’가 일어난다고 예언했습니다. 이때도 적지 않은 사람이 학교와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도 접고 재산을 선교회에 바치고 나서 휴거를 기다렸지만 그때 역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약 150년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일이 미국과 한국에서 벌어졌지만 그 후의 얘기는 사뭇 다릅니다. 1844년에 재림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지금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줄여서 ‘안식일교’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언이 실패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단들은 이들을 ‘이단’으로 치부하지만 여기 미국에서는 어림없는 얘기입니다. 안식일교단은 어엿한 개신교의 한 교단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난 대선에는 이 교단에 소속된 사람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비록 중도 탈락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이들은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걸 계기로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후에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고 교단을 떠난 사람도 많았지만 그래도 살아남았습니다. 자세한 얘기를 할 시간 여유가 없어서 생략하겠습니다. 반면 다미선교회는 이장림이 사기꾼임이 밝혀지고 나서 급격히 와해됐습니다. 검찰은 그가 신도들에게 거액을 갈취했다면서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그를 구속했습니다. 그는 갈취한 돈으로 부동산을 사들이고 채권을 사들였는데 채권 만기일이 1993년 5월이었답니다. 휴거가 일어나리라던 날로부터 6개월이 지나서야 현금화할 수 있는 채권을 사들인 겁니다. 자기가 한 예언을 자기도 안 믿었던 것이지요.

잃어버리는 것도 축복?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이 한 얘기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지금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걸 바꾸려 하지 말고 그대로 지내라는 겁니다. 할례를 받았으면 그걸 없애려 하지 말고(어떻게?) 안 받았으면 굳이 받으려 하지 말랍니다. 그건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유대인에게 할례가 중요하다 해도 노예나 자유인이냐 정도였겠습니까. 그런데 노예로 부름을 받았다면 굳이 자유로워지려고 애쓰지 말라는 얘기는 전혀 다른 얘기 아닙니까. 저는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자유로운 몸이 될 기회가 있으면’ 그걸 이용하라고 바울이 말했지만 이 말은 ‘바울이 노예가 돼보지 않아서 그런가?’하는 의문이 들게 만듭니다. 그 시대 노예가 잔심부름이나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일의 삶이 생사를 넘나드는 그런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세상에 자유를 얻을 기회가 절로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노예라도 주님 안에서는 자유인이라는 얘기도 실제 노예들에게 얼마큼 위로가 됐을지 의문입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말했는지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가 아닌 것처럼’ 살라고 말합니다. 아내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무엇을 갖고 있는 사람은 갖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살라는 겁니다. 이 얘기 역시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왜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것처럼 살라는 겁니까? 그는 왜 이렇게 권고했을까요? 이 역시 바울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습니다.

90세 된 어떤 노 수녀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하느님 안에서 나는 무엇을 잃게 될까를 묵상합니다. 매일매일 시력을 잃어가고 청력을 잃어가고 기억도 잃어가지요. 젊었을 때는 오늘 하느님 안에서 나는 무엇을 얻게 될까를 묵상했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에 잃어버린 것을 발견하는 것도 사랑을 얻는 방법이지요.”

예수님은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면서 제일 먼저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이 말씀을 최고의 축복이자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왔습니다. ‘영으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늘나라의 주민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영으로만’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물질적으로도 가난합니다. 영적 가난과 물질적 가난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지 않으면 영으로 가난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 가르침이 제대로 지켜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수도자들을 비롯해서 부(富)를 포기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속세에 사는 평범한 신자들은 이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재산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포기해야 한다,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몸을 누일 굴이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머리로는 수긍이 되지만 가슴으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늘 무거운 부담이었고 내적, 외적 갈등의 원인이 됐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이 말은 가톨릭 오웅진 신부가 운영하는 사회복지기관 ‘꽃동네’ 정문 앞에 서 있는 표어입니다. 거의 40년 전에 세워진 꽃동네는 갈 곳 없는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로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회에서 좋은 평가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4년 전 한국을 방문한 프란시스코 교황이 그 곳에 간다고 하자 그 동안 감춰져온 꽃동네의 추악한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꽃동네는 초기의 열정을 오래 전에 저버리고 후원금을 거둬들여 축재를 했고 부동산 투기 등으로 오 신부의 욕망을 채우는 곳으로 전락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황의 방문을 말렸던 까닭이 여기 있었습니다. 분명 꽃동네도 좋은 뜻으로 시작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좋은 뜻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들도 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가난하게 사는 것과 그런 삶을 포기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을 겪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처음부터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축재(蓄財)의 수단으로 삼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물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겁니다. ‘~이 아닌 것처럼’ 살지 못했던 것이지요. 가족이 없는 신부가 그랬을진대 가족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관계에 얽혀있는 보통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물론 꽃동네는 극단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종말이 곧 온다고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종교는 소유하는 게 아니라 내려놓는 것이라고, 손을 꽉 움켜쥐는 게 아니라 움켜줬던 손을 펴는 것이라고 다짐하고, 축복은 저수지에 물을 가두듯이 가둬서는 안 되고 강물처럼 흘려보내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아도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면 폈던 손을 다시 움켜쥐게 되고 흘려보내려던 복도 가두고 싶어지게 됩니다. 시력이든 청력이든 기억이든 뭐든지 잃어버리는 것도 은총이라고 노 수녀님이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 나이가 90세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첫 제자들이 모든 걸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것은, 그리고 바울이 뭔가 바꾸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살라고, 있는 사람은 그게 없는 것처럼 살라고 말했던 것은 그들 생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안식일교인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정말 곧 종말이 온다면 할례를 받고 안 받고 하는 게 무슨 소용이고 노예와 자유인의 차이가 대수냐는 겁니다. 그러니 뭐든지 갖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살라는 바울의 말은 일리가 있는 걸 넘어서 합리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중에 생전에 종말이 올 거라고 믿는 분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겁니다. 우리가 가진 걸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욕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전에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서 애써 저축을 하고, 은퇴하면 어떻게 먹고 살지를 걱정하며, 너무 오래 살아서 남에게 짐 될까봐 보험이나 은퇴연금을 붓습니다. 나이 오십 넘은 사람들이 모이면 주로 하는 얘기가 건강과 은퇴 얘기입니다. 뭘 먹으면 건강해지느냐, 어떻게 해야 젊게 살 수 있느냐, 은퇴하면 어떻게 살 거냐, 형편이 나은 사람은 은퇴하면 그 동안 못 했던 어떤 일을 할 거야 등등의 얘기 말입니다.

생전에 종말이 온다고 믿지 않는 우리들은 종말이 온다고 전제하고 한 바울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전제가 다르니까 모조리 무시해도 될까요? 아니면 바울의 말씀이니까, 성서의 말씀이니까 글자 그대로 믿고 행해야 합니까?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그대로 있어야 합니까? 뭐든 있는데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겁니까? 저는 바울의 말을 모조리 무시하는 것이나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모두 옳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글자 그대로 믿고 행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그렇게 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모조리 무시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겁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겠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 우리 현실에 맞게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지 굳이 그걸 바꾸려 하지 말고 그대로 지내라는 말은 지금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내일모레 종말이 오는 게 아니므로 바꿔야 할 것은 바꿔야 합니다. 바울은 노예일 때 부름을 받았다면 거기 마음 쓰지 말라고했고 예수 안에서는 노예도 자유인이라고 말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럴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풍요로운 세상에 매년 2천만 명이 영양실조로 죽는다고 합니다. 어린이는 매 2-3초에 한 명씩 영양실조로 죽어갑니다. 중남미의 다섯 살 이하 어린이 중에 75%가 영양부족 상태에 있다는 충격적인 통계도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라!’ 4년 전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에서는 이 말 때문에 30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사람의 말이었지만 동시에 사탄의 음성이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있어라! 기다려라! 이 모두 사탄의 목소리입니다. ‘하느님이 다 하신다!’는 말도 사탄의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서울 강남의 한 대형교회가 법률을 어기면서까지 대형 교회당을 건축해놓고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는 표어를 걸어놨습니다. 저는 그 표어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부른다고 해서 모두 하느님의 음성은 아닙니다. 반대로 사탄의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현 상태를 바꾸려 하지 말고 그대로 지내라고 말했지만 그 주장에 깔려 있는 전제를 감안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성령의 목소리가 아닌 사탄의 목소리를 따르는 게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자유를 자제시킬 수 있을까?

다음으로 ‘~인 사람은 ~이 아닌 것처럼 살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저는 이 말씀은 새롭게 해석해서 오늘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가지를 말씀하겠습니다. 첫째로, 무엇에든 궁극적인 가치를 두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허상이므로 거기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 삶은 그와 반대로 살고 있습니다. 곧 사라질 것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변할 것들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영원히 변치 않은 가치를 지닌 것처럼 착각하고서 그걸 영원히 소유하려고 애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들에게 ‘~이 아닌 것처럼’ 살라는 말은 그 무엇에도 궁극적인 가치를 두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소중한 가르침으로 간직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이 없는 것처럼 살라는 말을 ‘~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으로 바꾸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들 중에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소유하고 있는 것들 말입니다. 얼마 전에 저와 같이 사는 사람이 한 옷가게에서 65% 세일 행사를 하는데 저를 위해 이러저런 옷을 구입하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 10초 정도 생각해본 다음에 필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10초 동안 ‘그 옷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결론은,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물건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는 편인데 단 하나, 책 욕심은 제가 생각해봐도 과도합니다. 책을 살 때는 ‘사놓으면 언젠가는 읽겠지...’하는 생각으로 삽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놓고 아직까지 안 읽은 책들이 무척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책을 살 때도 그 책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많은 경우에 그게 없어도 별 지장이 없습니다. 뭔가를 하고자 할 때 그 책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구입하기로 작정해서 실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없는 것처럼’ 살라는 바울의 말에는 이런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에게 최고의 가치는 단연 ‘자유’입니다. 현대사상의 핵심 가정은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마다 살고 싶은 대로 내버려둬야 한다는 겁니다. 자유를 제약해야 할 유일한 때는 나의 자유의 행사가 남의 자유를 제약할 때뿐입니다. “당신이 뭔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뭐가 옳은지 당신이 어떻게 안다고 내게 당신의 판단을 강요하는 거야?” 이것이 시대정신이 되다시피 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따지고 들면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권위도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지 못합니다. 과거에는 ‘스승’이 있어서 제자에게 전권을 휘두르다시피 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 요즘은 스승은 없고 전문가만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문가에게 배우고 조언을 구하지만 그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스승으로는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과 전문가의 조언이 엇갈리면 대개 자기 생각을 따릅니다. 현대는 전문가는 많지만 스승은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종교는, 구체적으로 ‘~이 없는 것처럼’ 살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무한대의 자유를 외부의 권위가 아닌 내 안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양심의 목소리, 신앙의 목소리, 성령의 목소리로 제어하고 자제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자유를 외부의 권위에 기대서 누르거나 자제시키는 데는 바울도 반대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정의로워질 수 없다고 그가 말했을 때 의미하는 바는 율법이라는 외부의 권위에 기대서 정의로워지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지난번에 얘기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는 자유가 최고의 가치를 누리는 시대입니다. 저는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시대의 흐름이고 시대정신이므로 누구도 막거나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외부의 권위로도 자유라는 도도한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는 걸 막을 수단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종교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과거처럼 종교가 외부의 권위이 기대서 그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이나 교리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는 종교가 개인이나 공동체 내부에서부터 양심의 목소리, 성령의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언어로 번역하면 ‘자유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글쓴이 곽건용 목사는 LA 지역의 나성향린교회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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