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사제주의,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사제이다?
만인사제주의,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사제이다?
  • 김동문
  • 승인 2017.11.10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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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권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Duccio di Buoninsegna(1255~1319), The Washing of the Feet(1308), Museo dell'Opera Metropolitana del Duomo.
Duccio di Buoninsegna(1255~1319), The Washing of the Feet(1308), Museo dell'Opera Metropolitana del Duomo.

구약성경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 규정들은 하나님의 통치 이념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절대자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가 백성으로 받아들인 이들 앞에서 일종의 취임선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 백성의 통치자로서의 통치 원리와 희망은 물론, 자신이 꼭 그 뜻을 이룰테니, 도와달라고 백성들에게 간청하는 듯한 인상이 다가온다.

이집트는 물론 메소포타미아 지역 등 고대 근동에서는 왕, 황제, 파라오는 법의 제정자, 수여자, 집행자, 판정관이었다. 모든 법이 그(들)로부터 시작되고 백성들에게 주어지고 통치자의 권력으로 집행되고 이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모세오경 속, 십계명을 비롯한 법 선포 내러티브에 등장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통념과 다른 존재로 드러난다. 법을 가장 많이 지켜야할 존재, 법을 수호하고 지켜야 하는 존재로 자을 규정짓고 있다.

중세 유럽은 '신성성'이 큰 논쟁이었다. 중세 유럽사는 왕권(황제권)과 교회권(교황권) 사이의 협력과 갈등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더 절대자 하나님의 신성성을 위임받은 존재인가를 다투는 논쟁이었다. 절대자의 이름을 앞세운 그러나 더 많이 권력을 누리고 현실을 지배하려는 권력 싸움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는 2017년 지금, 누가 교회의 머리인가? 교회와 세속(세상)의 권세 중 누가 우위에 있는가? 지금도 반복되는 질문이며 논쟁의 주제이다.

교회의 머리, 교회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다. 맞다. 그런데 이 고백이나 선언은 너무 모호하다. 교회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과 선언은 어떤 의미나 현실에 실현될 수 있는 것일까? 이 비슷한 고민을 했던 이들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들 가운데 한 부류이다. 그 가운데 마르틴 루터의 고민이 오늘 새롭게 다가온다. 그가 주장했다는 '만인사제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만인사제주의’(universal priesthood)란 말을 직접 사용한 적이 없다. 그가 1920년에 작성한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하다.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들에게’라는 글에서 허물어야할 세 가지 담을 지적한다. ‘세속권세에 대하여 영적권세가 우위에 있다는 것’, ‘교황이 성서해석의 유일한 권한을 갖는다는 것’, ‘공의회는 단지 교황에 의하여 소집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루터가 이 세 가지 담을 허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이른바 ‘만인사제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 서품 받는다, 평신도와 사제, 군주와 주교,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는 직무와 일에 관한 차이 이외에 아무 차이도 없다, 즉 ‘신분’에 관한 차이는 전혀 없다는 주장이다. 핵심은 직무의 차이는 존재하나 신분의 차이는 없다고는 것이다. 이것이 '만인제사장주의'로 약간 오역되고, 본래의 의미가 약간 탈색된 듯도 하다. 정당한 권위와 역할과 직무의 차이조차 만인사제주의라는 이름으로 부인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2017년 적지 않은 교회 공동체는 다시 종교 개혁 이전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루터의 고민, 칼빈의 가르침을 따른다며 개혁교회를 내세우는 교회들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자비량 설교자, 자비량 목사론 등을 과도하게 주장하거나 목회자의 찌든 권위주의 그 사이에서 놓인 한국교회의 현실을 마주한다. 직분이나 직책을 권위가 아닌 권력으로 권세를 부리는 것은 줄어들어야 한다. 교회의 교회다움, 교회의 머리가 하나님되심을 구현하고 지키고 회복하기 위하여, 더 많이 책임지는 자세를 누가 어떻게 고백하고 실천하려는 경쟁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배하고 다스리고 통제하는 권력이 아닌 섬기는 권위를 다시 고민한다.

출애굽 광야에서 하나님나라의 통치 원리와 가치,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에게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였다. 권위주의를 넘어서되 역할과 직무의 차이에 대한 존중과 정당한 권위가 발휘되는 공동체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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