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된 하나님백성의 삶, 윤리로 번역되다.
회복된 하나님백성의 삶, 윤리로 번역되다.
  • 김영웅
  • 승인 2018.02.26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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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리처드 미들턴, '새 하늘과 새 땅', 새물결플러스,
J. 리처드 미들턴, '새 하늘과 새 땅', 새물결플러스

학창 시절 내가 배운 '구원'의 의미는 예수 이름 믿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법정적 선언이었다. 죽어서는 썩어질 몸을 떠나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 천국이라는 곳으로 영원히 죽지 않을 나의 영혼만이 올라가 영원토록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루하루를 살게 될 것이라고 배웠다. 거기엔 아픔도 슬픔도 없다고 했다. 현실처럼 아등바등 살 필요도 없다고 했다. 길 가에 주렁주렁 열려있는 사과나 따먹으며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배움의 결과, 어릴 적 자연스럽게 내 머리 속에 그려진 천국의 이미지는 모두 흰 옷을 입고 늘 하프나 켜며 영원히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곳이었다. 그래서 현실에서의 삶이 힘겨울 때면, 자연스럽게 천국의 삶을 소망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흐름이 내게는 뜻하지 않게 현실 도피로까지 이어졌다. 학생 시절에는 현실 도피라는 말이 별 위력을 갖지 못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달랐다.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며, 세상에서도 성공을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머리가 크면서부터는 뜻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가 점점 더 많아졌던 것이다. 한편으론, 발생한 문제 해결을 위해 발악을 했고, 한편으론 그러면서도 어차피 세상은 장망성 (장차 망할 성)이니 현실에서 그렇게 아등바등 댈 필요가 뭐 있겠냐고 하면서 마치 혼자서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발악과 자위의 반복이 내겐 삶인 것 같았고, 내게 있어 기독교 복음은 발악을 성공시키기 위한 자위의 입지 강화제 정도의 역할만을 했다.

현실 도피적인 생각은 뜻하지 않게 천국에서의 삶에 대한 소망을 더 강화시켰고, 그에 따라 현실에서의 힘든 삶을 잊고자 교회 생활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기도 했었다. 성경도 더 많이 읽고,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도 도전해 보았으며, 새벽기도도 꾸준히 나가보았다. 모든 게 주일 예배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가능한 한 그 연장선 위에 나의 모든 시간이 놓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하늘의 상급을 크게 받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의 연장은 내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는 일상과 직장 현장에서의 삶을 교회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분리시켰고, 일터에서의 난 점점 열의도 잃어갔다. 그야말로 내 삶은 플라톤적 이원론이 보란 듯이 지배하고 있는 작은 세상이었고, 천국 소망은 현실 도피의 다른 말에 불과했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인생무상을 외치는 이중적인 인간이 되어갔다.

당연히 계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은 현실적인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그곳은 내가 실수하거나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더라도 이미 보장되어 있는 어떤 가상의 시공간이었다. 현세적인 개념을 연결시킨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나님나라는 죽어서나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거기를 가기 위해서는 예수 이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영접기도를 하고 세례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주 쉬웠다.

그런 삶엔 종말론적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일은 일이고 예배는 예배여야 했다. 두 가지는 결코 섞일 수 없었다. 행여나 섞이는 것은 예배에 대한 모독 같은 것이었다. 삶이 예배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나의 시간을 교회 예배의 연장선에 놓이게 만들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여기까지만 열거해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80-90년대 한국에서 합동측 장로교단에 소속된 교회에 다녔던 사람이라면 나와 그리 다르지 않는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혼자서라면 아마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을 책이었을 테지만, 내가 속한 독서 모임에서 이 달의 책으로 선정되었던 터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읽어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저서 5권을 어렵지만 혼자 읽어냈고, 톰 라이트의 얇은 저서 2권과 김근주 교수의 저서 3권을 읽어봤기에 다행히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요 메시지는 그다지 이해하기가 어렵진 않았다. 위의 책들을 읽지 않은 채 이 책을 접했었더라면, 아마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크리스토퍼 라이트를 처음 읽고 받았던 충격처럼 말이다.

훌륭한 신학자들 덕분에 난 이제 천국이라는 곳이 더 이상 죽어서나 갈 수 있는 어떤 초월적인 시공간이 아니라는 사실과, 영혼과 육이 분리되어 영혼만이 창조세계로부터 구원 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하나님나라는 지금 여기, 오늘 이곳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곳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나라는 이곳저곳 모든 곳에 임재할 수 있다는 사실도 믿는다. 우리가 구원 받아 파멸할 창조세계 밖으로 (하늘 어딘가 있을 천국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하신 창조세계로 들어오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땅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작으로 모든 걸 회복하시고 죄와 악이 사라진 자리에 하나님의 통치가 다시 모든 곳에 임하게 되는 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임을 믿는다. 우리 인간은 창조세계 바깥으로 구속 받는 것이 아니라, 구속된 창조세계 자체의 일부로서 구속 받는 것이다. 또한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미와 아직 사이의 중간 시대에서 보여야 할 삶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자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인 '여호와의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이며, 이는 곧 윤리적인 삶의 실천을 의미한다는 것을 믿는다.

내세가 예전만큼 궁금하지가 않다. 내겐 오늘이 더 중요한 가치로 다가와 있으며, 예전엔 무시했었던 일상과 세상 일이라 멸시하기도 했었던 일터에서의 삶의 자세가 이제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나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를 통해 모든 열방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속적 복의 영역으로 데려오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하나님백성이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며 사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을 알고 사명을 알았다면, 오늘 내가 해야 할 삶의 실천은 바로 윤리일 것이다. 이것이 리처드 미들턴이 말했고 독서 모임에서 잠시 토론이 진행되었던 '문화적 사명'과 맞닿아 있을 것이며, 개인 구원론에 갇혀 있는 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공공성의 빛을 비추는 일과도 이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회복이요, 해방이며, 부활과 구원의 현세적인 의미일 것이다.

다음은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그의 책 '하나님백성의 선교'에서 던졌던 질문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물음이다. 난 여기에 한 문장을 추가하고 싶다. 다음과 같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리처드 미들턴이 11장에서 말했던 '윤리'가 답일 것이다. 그렇다. 종말론적 신앙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시선의 무게중심은 내세가 아닌 현세다.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거기엔 윤리적인 삶이 있다. 여호와의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이 있다. 사적인 복음에서 탈피한 공적인 복음이 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톰 라이트, 그리고 김근주 교수가 리처드 미들턴의 이 책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두 한데 모여 서로 보완하고 합쳐지고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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