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훈] 예수의 십자가가 아닌 각자의 십자가지는 것
[최주훈] 예수의 십자가가 아닌 각자의 십자가지는 것
  • 최주훈
  • 승인 2018.02.26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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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크라나흐의 바이마르 제단화1555)
십자가(크라나흐의 바이마르 제단화1555)

사순절 둘째 주일 교회력 복음서 말씀은 가이사랴 빌립보를 통과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대뜸 이렇게 묻습니다. ‘얘들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답합니다. ‘엘리야 세례요한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더이다이 대답을 들으시더니 이번엔 또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 남들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나서기 좋아하는 제자 베드로가 자신 있게 이렇게 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무슨 일인지 갑자기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면서 입단속을 시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죽겠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좀 있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자 제자들 입장에선 황당할 따름입니다단순히 황당하고 마음 상한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9:3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였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원래 뜻은 꾸짖으며 윽박질렀다는 말입니다. 제자가 선생에게 윽박지른다는 것을 우리식으로 말하면 꼭지 돌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꼭지가 돌 정도로 화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뭐 보나마나 본전 생각났겠지요. 이제껏 3년간 집도 재산도 다 버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는 겁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에 가면 이스라엘의 왕이 되든지 아니면 유력인사가 될 게 뻔한데, 여기서 끝이라고 하니 베드로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 격입니다.

그렇게 격앙된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이 굉장히 심한 말씀을 하시지요. 33절 말씀을 보면, 수제자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절부터 35절까지 함께 읽어보도록 할까요?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 이제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지 알아봅시다. 우선 예수님이 이 말씀을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곳에서 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이사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시저라고 부르는 말입니다. 로마 황제의 호칭이지요. 원래 이 지역은 파니아스(paneas)라고 불렀던 곳인데 나중에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 성읍을 정복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직접 통치하지 않고 분봉왕 헤롯대왕에게 하사하게 됩니다. 로마가 워낙 큰 대제국이다 보니 본사에서 지점을 만들고 그곳에 지점장을 세우듯 한 것이죠. 그래서 헤롯은 황제에게 감사하기 위해 이 땅에 대리석 신전을 짓고, 웅장한 도시화 사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이름을 가이사랴”(즉 황제)라고 명명하게 됩니다. 그 후 헤롯이 죽자 아들 빌립이 자기 이름을 넣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명이 생긴 것이죠. 어찌되었건 이 가이사랴 빌립보는 황제의 도시라는 뜻이 곳곳에 각인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이사랴 빌립보 상상도. 그림 왼쪽이 가이사(아구스도) 신전이다.
기이사랴 빌립보 상상도. 그림 왼쪽이 가이사(아구스도) 신전이다.

이런 황제의 도시에서 예수님이 던질 질문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누가 왕이냐,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누구 주님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당시 로마황제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묻고 기다리는 답변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온 만물의 왕이다라는 것입니다이런 대답을 기다리는 예수님에게 베드로의 답변은 백점짜리 답안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왕이요 온 땅을 구원할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생각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리스도인 것은 맞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던 것이죠.

베드로가 바라보는 그리스도는 내 유익을 위한 그리스도였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와 같지는 않나요? 신앙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나에게로 구부러뜨리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골고다 언덕으로 가라하면, 이 명령을 부와 명예 성공의 언덕을 바라보도록 나에게로 구부러뜨립니다. 이웃을 위해 살라는 말씀을 들으면 내 성공을 위해 그분의 뜻을 구부러뜨립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하면 빛나는 황금 보좌만을 바라보려는 게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질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우리의 성공과 유익을 그렇게 투영하면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이런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오늘의 이 주제는 위에서 보신 그림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 작품은 소 크라나흐라고 불리는 루카스 크라나흐의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의 1555년 작품입니다. 원래 이 그림은 바이마르라고 하는 작은 도시의 시 교회에 봉헌된 세 폭짜리 제단화인데, 그중 중앙에 위치한 그림입니다. 주보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왼편에는 개신교 신앙으로 황제와 맞서 싸웠던 요한 프리드리히 선제후 부부가 있고, 제단화 좌측 날개 그림에는 21녀가 그려져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선제후 가족들이 모두 두 손을 모으고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십자가 그림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지는 제가 마지막에 소개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다시 위의 그림을 한번 보도록 하지요. 통상 이 그림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을 구분해서 설명하곤 합니다. 왼편은 율법과 심판, 오른편은 은혜와 복음 구원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보려고 합니다잘 보시면, 가까운 곳엔 십자가가 있고 그 뒤 먼 곳엔 성경에 나오는 세 가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폭의 정중앙부터 보도록 할까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발 뒤쪽을 보시면 왼편엔 벌거벗은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가는 모습이 있고, 십자가 오른편엔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좀 크고 선명한 그림으로 본다면 이 둘의 관계가 더욱 확실해집니다.

오른편엔 선 사람들은 지금 모세의 율법을 들고 서 있고, 이 율법은 사람을 놀래게 만들어 도망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뛰고 있는 사람 바로 앞에 산이 있지요. 그런데 그 사람 앞에 있는 산의 밑 부분이 불에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율법은 심판이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 앞에 살아남을 자 없다는 메시지를 화폭은 가장 중심부 깊숙한 곳에 그려 넣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본성이고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 때문에 사도바울은 로마서 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며 탄식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매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배반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도망가는 인간에게 전혀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심판의 모습을 둘러쌓고 있는 이야기로 넘어 가보도록 하지요. 그림 오른편을 정확히 위아래로 이등분을 하고, 상단에 있는 그림을 다시 양편으로 이등분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해 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두 가지 성경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상단 오른편을 보시면 거기에 천막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깃대가 하나 꼽혀 있는데 거기 뭐가 달려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뱀이 달려 있고, 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무슨 그림입니까?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뱀사건이지요. 성경을 한 번 찾아 함께 읽어볼까요? 민수기 21:5-9입니다.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뱀에 물려 죽게 생겼는데 놋뱀을 보면 산다는 말은 사실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우리의 이성을 뛰어 넘는 곳에 구원의 비밀을 숨겨 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사건은 후에 십자가를 통해 그 의미가 밝혀지게 됩니다.

이제 그림에서 천막 왼편 조금 위를 보시면 구름 위를 날아가는 무언가가 보일 겁니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겠지만 실은 천사입니다. 그리고 그 천사가 두루마리를 펼치고 날아가고 있는데 그 밑에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 주위로 양들이 몰려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목자들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2:8-11을 찾아서 함께 읽어보도록 하지요.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온 백성에게 미칠 가장 기쁜 소식, 즉 복음이 전해지는 순간입니다이제 조금 아래쪽을 보도록 하지요. 십자가 오른편에 세 사람이 서 있습니다. 이 대목은 정확히 오늘 복음서 본문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이 기억나십니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돌아온 대답에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과 엘리야, 그리고 선지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그림에도 십자가 옆에 세 사람이 나오는데,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서서 오른손으로 십자가를 가리키는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은 언제나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지요. 손을 자세히 다시 보시면 오른손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그리고 왼손은 손을 셋으로 모아 십자가 아래 어린양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바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진 어린 양이며, 그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 다음 책을 들고 있는 인물이 바로 엘리야로 묘사된 인물인데,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구약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시대를 거스르고 종교권위와 싸웠듯이 루터 역시 오직 말씀이라는 무기로 당시 부패한 교회와 싸웠던 예언자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만난 성경은 언제나 그리스도도 가득 찬 하나님의 구원소식이었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빼 보아라. 그러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말씀 속에 담긴 그리스도를 만나고 분이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며 사는 삶이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개혁자는 가르친 것이지요. 실제로 16세기 독일에서 루터의 별명 중 하나는 독일의 엘리야였습니다.

이제 세 명 중 가운데 있는 인물입니다. 허연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인물입니다. 게다가 잘 보시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가 마지막 떨어지는 곳이 바로 이 사람의 정수리입니다. 이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사람이야말로 예수의 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뜻이고,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군가 하니, 이 그림을 그린 루카스 크라나흐의 아버지인 루카스 크라나흐입니다. 통상 대 크라나흐라고 부르는 인물입니다. 루터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고, 루터 아들 한스의 대부이기도 했고, 루터의 초상화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아들인 소 크라나흐가 아버지를 여기 그려 넣으면서 자기 아버지야말로 온전히 거듭난 인물이라고 웅변하는 장면이지요.

이제 십자가 왼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엔 빨간 망토의 인물이 투명한 창을 들고 괴물을 제압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인물은 십자가에 달린 다음 삼일 동안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발밑에 깔린 괴물은 사망의 괴물인 사탄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투명한 창입니다. 왜 하필 투명한 창일까요? 성경 한 구절 찾아보도록 하지요. 로마서 8:2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가 이 땅을 통치하는 방식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칼과 창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칼과 창이라는 무력으로 통치하지 않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양심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은 능히 무력이나 기적이나 신비를 통해 이 땅을 통치하고 지배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법이 아니라 또렷한 정신을 가진 사람속에 있는 양심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들어 움직이게 만드십니다. 그것을 바로 우리는 성령의 역사라고 부르고, 그 시간을 바로 깨달음, 또는 회심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또렷한 정신으로 서 있는 사람을 만나주시기 때문에 기독교는 입신이나 혼미한 상태, 황홀경 같은 신적체험을 하는 종교와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물론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비경험은 언제나 우리를 속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또렷한 정신 가운데 우리를 만나 주시고, 그 하나님을 우리는 인격적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분이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에 혼미한 정신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오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양심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음부에 내려가신 주님이 죽음을 제압할 때 투명한 창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칼과 창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과 양심에 충격을 주고, 냉랭한 가슴을 데우는 성령의 말씀이 바로 투명한 창으로 묘사됩니다. 그 말씀이 죽음의 세력을 제압합니다.

자 이제 다음 이야기입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면 이 그림을 인터넷에서 한 번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세 폭의 그림이 모두 있는 그림을 찾아보시면, 왼편과 오른편에 당시 루터의 후원자였던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 가족 다섯 명이 그려져 있을 겁니다. 그런데 모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역사를 모두 이야기하기엔 시간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간단히 줄이려고 합니다. 이 가족은 루터가 발견한 복음의 가르침을 죽기까지 고수하며 살았던 신앙의 선조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신앙이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겁니다. 때로는 이 신앙 때문에 황제에게 대항하다가 죽음의 고비도 넘기고, 말년엔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바이마르라는 동네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던 가족입니다.

그러나 이 가족은 죽기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복음을 믿었던 이들입니다. 어떤 구원의 중보자도 필요 없고,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소망이라는 것을 믿고 살았습니다.

**위의 그림을 다시 봐 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에 세마포가 흩날립니다. 십자가는 분명 죽음과 멸망과 생명의 끝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흩날리는 세마포는 십자가가 죽음이 아니라 바로 부활이고 성령의 자유로운 비상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란 내가 원치 않는 상황, 운명을 뜻합니다. 주어진 운명은 내 뜻과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옵니다. 어느 특정한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도, 어느 특정한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 조건 속에 사는 것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어떠한 환경과 악조건 속에서도 예수의 마음과 가르침을 가지고 그 길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소명’(召命)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며 살도록 하늘로부터 부름 받은 것, 그것이 나이 소명이며 나의 십자가입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저마다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각자의 가정과 직장 교회라는 자리가 모두 다릅니다. 이 소명의 십자가는 내가 지어야 하는 짐이기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질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이지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아멘.

이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위의 그림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유심히 보시면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여러분을 유심히 쳐다보는 두 명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한명은 십자가 오른편 중앙에 있는 흰 수염 루카스 크라나흐이고, 또 한명은 음부의 권세를 제압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이 두명이 그림을 보는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다. 왜일까요? 바로 저 십자가 오른편에 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크라나흐가 선지자 중의 한 명이 된 것처럼, 그리고 보혈로 거듭나 십자가 곁에 서게 된 것처럼 바로 이 그림을 보고 말씀을 묵상하는 당신이 바로 그 자리에 서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왼편의 그리스도는 그렇게 십자가 앞에서 양심의 충격을 받는 사람, 그리고 그 십자가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이에게 소망을 줍니다. 어떻게요? 바로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죽음의 권세들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제압하고 그를 도우시겠다는 위로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당신과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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