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곽건용]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곽건용
  • 승인 2018.02.27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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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그의 복음을 묻는다’ 2-2- 로마서 3:19-31

바울은 율법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오늘은 바울의 로마서 말씀을 읽었으면서 불경에 나오는 말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무소는 뿔이 하나 있고 주로 혼자 사는 코뿔소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한 작가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해냄출판사, 2016)라는 부처의 말씀을 담은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말로서 세상 모든 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나온 원전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고 살아 있는 그 어느 것도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갖고자 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이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해냄출판사, 2016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씀은, 사람은 궁극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혼자인 자신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 따라서 무엇에도 구애받지 말고,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꿋꿋하게 자기의 길을 가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런 부처의 말씀을 제목으로 삼은 까닭은 그 가르침과 율법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서로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목 끝에 붙인 물음표는 바울의 가르침과 부처의 가르침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음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바울과 그의 복음을 묻는다시즌 1 때 바울이 율법을 어떻게 바라봤고 이해했는지에 대해 약간 얘기했지만 충분치 않았습니다. 사실 바울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서는 율법을 긍정적으로 얘기하다가 또 다른 곳에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율법을 매우 부정적으로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울과 율법 얘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말씀했듯이 바울이 율법에 대해 이율배반적으로 들릴 정도로 복잡하게 얘기하기 때문에 정신을 바싹 차리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율법 준수의 불가능성 때문에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율법 조항들을 빠짐없이 모두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누구도 의로워질 수 없다고, 바울이 그렇게 주장했다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율법 준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도 정의로워질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어서가 아니다

율법의 모든 조항을 빠짐없이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율법의 모든 조항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율법 조항은 모두 613개입니다. 613이라는 숫자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지만 지키기 불가능한 숫자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정도는 노력하면 다 지킬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시대 유대인들에게 율법이란 613개 조항에 국한되지 않고 그 조항들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 다른 말로 하면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불리는 구전율법까지 포함되므로 그 숫자는 613개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율법과 그것의 해석 사이의 관계는 법률과 시행세칙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사람의 삶은 법률에 포괄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람의 삶이 포괄하는 다양한 경우를 법률로 다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시행세칙이나 판례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시행세칙이라 판례를 법률이 포괄하지 못하는 부분을 규정하는데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이 그 역할을 했고 또 그것들은 율법과 같은 권위를 가진 걸로 존중되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사람이 율법의 모든 조항을 빠짐없이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바울 시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써 정의로워질 수 없다고 말한 까닭은 율법 조항이 너무 많아서 빠짐없이 지킬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게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바울이 율법 준수로써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고 한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가정이지만 설령 누군가가 율법 조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켰다 하더라도 그것 갖고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라는 겁니다. 곧 하나가 됐든 수백, 수천 가지가 됐든 율법을 지키는 것과 정의로워지는 것은 무관하다는 겁니다.

갑이라는 사람이 밤길을 가는데 을이란 사람이 땅바닥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갑이 을에게 뭘 찾느냐고 물었더니 을은 집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를 측은히 여긴 갑은 같이 찾아주기로 하고 을이 찾는 주변을 열심히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열쇠가 눈에 띠지 않았습니다. 한참 찾다가 갑이 을에게 열쇠를 잃어버린 데가 여기가 맞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을은 아니요, 열쇠는 저쪽에서 잃어버렸소.”라고 대답하는 게 아닙니까. 손가락으로 다른 곳을 가리키면서 말입니다. 갑은 아니, 열쇠를 잃어버린 곳은 저쪽인데 그걸 여기서 찾으며 되오?”라고 말했겠지요. 그러자 을은 저쪽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으니 환한 여기서 찾는 것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죠.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걸로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고 한 말은 엉뚱한 곳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율법은 좋은 것이고 그걸 지키는 일 역시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율법 준수로 정의로워지려는 생각 그 자체가 반 복음적이라고?

그런데 율법에 대한 바울의 주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정의로워지려는 생각과 시도 그 자체가 복음에 어긋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어차피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 준수로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설령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지켜서 정의로워지겠다는 생각 그 자체가 반 복음적이므로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바울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생각 자체가 반 복음적이라는 바울의 주장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런 대목이 바울을 낯설게 만듭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는 얘기와 율법을 지켜서 정의로워지겠다는 생각과 시도 그 자체가 반 복음적이고 그런 시도 때문에 정의로워질 수 없다는 얘기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지점까지 나아간 겁니다다시 말씀하지만 바울은 율법 그 자체는 좋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서 좋은 것임에 분명합니다. 율법 내용을 봐도 그렇습니다. 율법은 좋은 것임에 분명합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고 변화된 시대상황에 맞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 기본 정신은 살리면서 변화된 상황에 부합하도록 해석하고 재해석해서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런데 이 좋은 율법이 사람들 손에 들어와서 사람들에 의해 활용되고 지켜질 때 빠지게 되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까닭은 이 두 가지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율법은 그것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것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구별하고 더 나아가서 차별하기까지 하는 장벽 구실을 한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예수의 복음이 만민에게좋은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이방인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적으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서약함으로써, 그렇게 한다고 해도 혈통으로 유대인이 되지는 않지만 영적으로라도 유대인이 된 다음에 비로소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었던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조차도 그런 생각에 동조해서 바울과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만민을 향한 하느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의 열두 사도들과 맞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좋은 것이고 그걸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을 지킴으로써 정의로워지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그것은 만민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율법이 됐든 업적이 됐든 뭐가 됐든 뭔가에 의지하고 기대서 정의로워져서 하느님 앞에 떳떳해지겠다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을 좋은 것이지만,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느님 앞에 세상에서 정의로워지려면 율법에 기대려 해서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밑천으로 삼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바울은 그것이 율법이 됐든 뭐가 됐든 무엇인가에, 누군가에 기대서 정의로워지려는 생각과 시도는 반 복음적으로 봤습니다.

그럼 바울은 뭘 근거로 해서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몇 주 전에 제가 하느님의 선물, 은총에 대해 얘기했던 걸 기억하십니까?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주라는 본문으로 설교했을 때 선물이라고 받았지만 그 대가로 뭔가를 줘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 세상과 그런 대가에 대한 부담 없이 하느님이 선물로, 은총으로 주신 것들을 마음껏 누려도 되는 신앙의 세계를 대조해서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에게 받은 은총을 잊어버리지 말고 헌금을 함으로써 갚으려고 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무효화하는 잘못된 행위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뭔가를 받으면 대가로 뭔가를 줘야 하는 세계와는 달리 그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처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선물의 세계, 은총의 세계라고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은총의 세계, 선물의 세계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열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삶은 죽음 후의 생이 아니라 이와 같이 새롭게 열린 새 세상에서의 삶이라고 얘기했지요. 바울이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말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우뚝 서서 자기 안에서 울려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한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선물의 세계, 은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섰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새물결, 2008년

앞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의 말씀은 사람은 궁극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혼자인 자신이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 따라서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말고,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고 꿋꿋하게 혼자 자기의 길을 가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삶은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말고,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고 꿋꿋하게 혼자 자기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은총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새물결, 2008)이란 책을 쓴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87)도 바울의 메시지를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메시지는 주체적인 삶을 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그 좋은 율법을, 그 자체로는 한없이 좋고 가치 있는 율법을 바울이 의지하지 말라고 주장한 까닭은 율법이라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면 그 다음에는 그 배를 지고 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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