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바울의 하느님은 누구이고 어디 계신가?
[곽건용] 바울의 하느님은 누구이고 어디 계신가?
  • 곽건용
  • 승인 2018.02.25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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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그의 복음을 묻는다 2-1 - 로마서 13:8-10 빌립보서 2:5-11
Valentin de Boulogne, 1618~1620, Blaffer Foundation Collection, Houston, TX

바울을 낯설게 읽어야

오늘부터 바울에 대한 두 번째 시리즈 설교를 합니다. 작년 가을에 했던 첫 번째 시리즈를 기억하십니까? 내용이 쉽지 않아서 저도 신경을 많이 써서 준비했고 여러분도 긴장을 많이 하면서 들었을 겁니다. 그때는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할 것 같았지만 그로부터 몇 달이 흘렀고 사람의 기억력이란 게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마 많이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래서 지난 시리즈에 얘기한 내용을 요약해서 되새기는 걸로 시작하겠습니다.

지난번에 가장 강조한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바울을 낯설게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도인지 기억도 가물거리는 오래 전에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서 열린 미국성서학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가 주관하는 학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 학회는 미국성서학회 주관이지만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의 성서학자들이 참석하는 구국제적인 학회입니다. 거기 가 보고 저는 한인 성서학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도 많지만 여기 미국에서 가르치거나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자들도 꽤 많았습니다. 제가 약간 놀란 것은 구약학자보다 신약학자 숫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에 놀라기도 했고 약간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으로 보면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의 세 배쯤 되는데 왜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가 말입니다. 구약학자 숫자가 세 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슷하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입니다.

그런데 더 놀란 사실은 신약학자 대부분이 바울을 전공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바울 전공자가 복음서가 요한문서나 외경 전공자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에서 예수보다 바울이 더 우대받는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였습니다. 물론 바울 전공자가 압도적 다수라는 사실과 한국교회가 바울을 제대로 아는 것은 별개입니다. 한국 목사들은 바울 얘기를 많이 하긴 하지만 바울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목사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바울 얘기를 많이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인들은 바울에 대해 잘못 알고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고 잘못 알고 있는데, 그나마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뭔지, ‘의롭게 된다.’는 게 어떻게 되는 걸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제대로 알자는 뜻으로 이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낯선 바울을 낯익은 바울로 만들기

그 다음으로 바울을 알려면 사도행전보다는 바울이 쓴 서신들을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누가복음의 저자와 같은 사람으로서 사도행전은 저자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교회와 선교사의 상에 맞춰서 바울을 그렸습니다. 이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역사적 바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쓴 서신에 집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신약성서에서 그의 이름이 붙어 있는 서신은 모두 열세 편이지만 학자들이 진정한 그의 서신이라고 인정하는 서신을 일곱 편인데 로마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려면 우선적으로 이들 일곱 편의 서신에 집중해야 합니다. 물론 이 짧은 시리즈에 그것들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바울은 동시대 사람들에게도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밝힌 것처럼 정통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이었는데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정통 유대인의 눈으로 보면 낯선 사람이 된 겁니다. 그는 또한 기독교인들에게도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을 박해하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자기가 부활한 예수를 봤다고 하지 않나, 그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가 됐다고 주장하지 않나, 더욱이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니 열두 사도를 비롯한 첫 기독교인들이 그를 경계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첫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낯선 존재였던 겁니다.

그런데 그 후의 역사는 이와 같은 그의 낯선 면모를 다듬어서 낯익은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상당히 일찍부터 그의 메시지는 순화하고 길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흔적은 바울이 썼다고 되어 있지만 일곱 편의 진정 바울 서신이 아닌 서신들에도 남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좌우간 교회는 그 후에 바울의 메시지를 순화하는 길을 걸어왔는데 지난 세기 말경에 들어서야 진정한 바울의 면모와 그의 메시지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저는 바울 서신들은 그걸 받은 지역의 교회가 당면한 특정한 사안에 대한 대답이었으므로 그 메시지를 섣불리 일반화해서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교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또한 바울이 결코 친로마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점 역시 비교적 최근에 논의가 시작됐으므로 앞으로 더 진지하게 연구되어야 할 주제입니다. 바울을 예수의 하느님나라 복음을 왜곡한 인물이라고 섣불리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의 복음을 작은 갈릴리 촌락이 아닌 거대한 로마제국의 판도 안에서 전하고 실천했던 인물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을 때 의롭게 된다.’는 말은 의롭지 않은 사람을 하느님이 봐줘서 의롭다고 여기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전통을 이어받아 믿음으로 정의를 행하다.’란 뜻으로 이 말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justification by faith’라기보다는 ‘justice by faith’ 또는 ‘doing justice by faith’라고 표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은 생물학적 생명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일정 기간 동안 살다가 다시 죽는 걸 가리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나사로의 소생(蘇生)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소생’(re-live)한 게 아니라 부활’(resurrection)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낡은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에게 부활은 생물학적 생명의 소생과는 무관했을 뿐 아니라 예수를 율법의 끝이요 완성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겁니다.

 

그것은 바울의 실수였을까?

첫 시리즈 설교 후 두 달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이전 설교 내용을 요약해서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다 갔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리즈 마지막에 훗날 답하겠다며 던진 질문에 대해 답하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그때 오늘의 첫 본문 로마서 13장을 읽고 거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냐고 물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서 13:8-10).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특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든 율법의 정수(精髓)요 요약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바울의 주장은 매우 감동적이면서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주장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라면 어린아이들도 알고 외울 율법의 정수이자 요약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항목 가운데 왜 하느님 사랑은 빼버리고 이웃 사랑만 말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도대체 바울은 왜 그랬을까요바울이 실수했을까요? 그가 실수로 율법의 정수 가운데 전반부인 하느님 사랑을 빠뜨렸을까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보통 유대인도 그런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앞섰던 그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리는 없습니다.

JTBC
JTBC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얼마 전 이명박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많은 청와대 문서들을 자기 소유인 영포빌딩으로 가져와서 거기에 숨기고 있다가 검찰이 그곳을 압수수색하는 바람에 들통 났다는 뉴스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실수로가져왔다고, 그러니 원래 자리로 돌려놓겠다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걸 봉인해서 아무도 못 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더군요. 적반하장(賊反荷杖)도 분수가 있는 법입니다. 가져가서는 안 되는 문서들을 도적질해서 숨겨뒀다가 들통 나니까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질까 봐 봉인하자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청와대 공식문서를 실수로가져갔을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일 바울이 로마서 이 구절에서 실수로하느님 사랑 부분을 빼뜨렸다면 그것은 이명박의 실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실수입니다. 성서에는 그런 예가 없습니다. 그런 실수를 한 사람은 바울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그런 걸 실수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그것은 의도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느님 사랑 부분을 빠뜨렸다는 겁니다. 그럼 문제가 사라집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게 의도적이었다면 실수로 그런 것보다 더 큰 문제입니다. 율법의 두 기둥 가운데 하나를 없앴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 왜 그랬냐?’는 겁니다. 저는 그 답이 빌립보서 2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립보 2:5-11).

바울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입니까? 저는 빌립보서 말씀에 바울의 하느님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은 바울의 창작이 아니라고 봅니다. 초대교회에서 전해져오던 글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해줬다는 겁니다. 학자들은 이를 그리스도 찬가라고 부릅니다. 이 찬가는 예수님을 하느님과 동등한 분이지만 스스로 비워서 종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고 노래합니다. 스스로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세상의 모든 권세가 그 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고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찬가대로라면 예수는 하느님이셨으나 그 지위를 버리고 사람이 되어 종처럼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랬기 때문에 하느님은 예수를 다시금 높이셔서 모두가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만드셨다는 겁니다.

바울은 이 찬가에서 하늘에 있는 예수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봤습니다.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예수님의 하늘에서의 자리가 비워졌습니다! 그분은 그 자리를 포기하고 사람들을 위해서 사람의 모습을 취했고 종이 되셨습니다. 이른 바 케노시스’(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론입니다. 스스로를 비우신 그리스도, 텅 빈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율법의 두 기둥 중 하나인 하느님 사랑을 생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전통적인 유대교와는 다르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자리를 비우신(케노시스) 하느님입니다. 그는 하느님 자신의 자리를 비우신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냥 당신의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비우시고 사람이 되어(성육신, incarnation)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믿었으므로 그는 율법의 두 기둥 중 하나님 하느님 사랑을 과감하게 생략할 수 있었던 겁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믿음입니다. 어떻게 둘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내신 분과 보냄 받은 분이 하나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의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 역설이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믿어졌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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