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반쪽짜리 고백
[이택환] 반쪽짜리 고백
  • 이택환
  • 승인 2018.02.24 22: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택환 목사의 설교 - 막 8:31-38
Pietro Perugino (1481-82), 바티칸 시스틴 성당
Pietro Perugino (1481-82), 바티칸 시스틴 성당

톨스토이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이 멋지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입니다. 만일 내일 태양이 뜰지 안 뜰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려워서 아무 일도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왜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내일 태양이 뜰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미래를 모르는 게 아니라 생각보다 많이 압니다. 엄밀히 말하면 미래를 안다기보다,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지요.

과거에도 아침마다 태양이 떴는데, 요즘도 날마다 태양이 뜬다. 그렇다면 미래에도 태양이 뜰 것이다.” 그 예측은 정확합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의 많은 일들은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동안 축적된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특징들의 추세를 쭉 이어서 미래를 향해 그으면, 일정한 추세선, 또는 추세대가 형성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금리, 유가, 주가, 부동산, 경제동향에 이르기까지 큰 추세 안에서 많은 것들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든든할 때는 언제인가? 세상이 예측한 대로 돌아갈 때입니다. 주가가 올라갈 것을 예측하고 주식을 샀는데 정말 주가가 급상승했다, 주가가 빠질 것을 예측하고 주식을 팔았는데 주가가 떨어졌다, 걱정이 없겠지요. 그러면 언제가 가장 불안할 때인가? 세상이 예측한 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입니다. 부동산이 올라갈 것을 예측하고 빚을 내서 집을 샀는데, 부동산이 폭락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빚어낸 세계 금융위기를 기억합니다. 그 때 온 세상이 다 불안에 떨었습니다.

우리의 예측은 언제든지 빗나갈 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추세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미래를 알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 해도, 거기에는 변곡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추세를 안다 해도, 그 추세를 완전히 뒤집는 변곡점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아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대개는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종종 인생의 쓴 맛을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도 변곡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마가복음 8장까지 예수님의 행적은 주로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갈릴리 순회사역이었습니다. 과거와 현재까지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예수님은 앞으로도 이런 승승장구하는 사역만 하실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827절에서 변곡점이 생깁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갈릴리 순회사역을 하시지 않고, 오직 한 곳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해설 성경을 보면 827절 위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을 둘로 나눌 때, 성경전문가들은 826절과 27절 사이에 큰 획을 긋습니다. 그 기준이 되는 사건이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메시아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 앞에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야할 곳은 한 곳, 예루살렘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예루살렘에 가서 세상을 뒤집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가져오는 이,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입니다.

제자들에게 이제 메시아 예수의 미래가 확실하게 보였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추세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자면, 과거 대표적인 메시아가 오래전 모세와 다윗,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는 매카비가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바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했고, 다윗은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또 마카비(Maccabees)는 그리스 셀류키오스 왕조( the Seleucid)의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 4(Antiochus IV Epiphanes, 제위 기원전 175~164)에게서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실 것입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에 실패한 메시야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하기는커녕 모두 로마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행적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예수님에게는 수많은 메시아의 표적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풍랑을 잠잠케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는 것 등 이 있었습니다. 비록 무력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전의 그 어떤 무력을 지닌 메시아 후보보다 더 강력한 분이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미래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영광 좌우편에 앉아 새 시대를 호령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그들이 예측대로 될 것이기에, 그날 그들은 너무나 든든했습니다. 오늘날 부동산을 수십 채 가지고 있고, 로또가 몇 개나 당첨된 사람보다 더욱 든든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취임사를 듣기 직전까지 말이지요. 오늘 본문 31절에 예수님의 메시아 취임사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8:31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하지만 이것은 제자들이 예측한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많은 고난을 받더라도,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인정받아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해야지, 그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한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설령 많은 고난을 받아,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더라도, 민중의 지지를 얻어 로마에게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야지, 죽임을 당한다? 그것은 전혀 메시아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사흘 만에 내가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듣지 못했을까요? 들었다 해도, 그렇게 다시 살아난 메시아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삼일만에 겨우 살아난 사람이 무슨 정상적인 일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1세기 유대인들이 믿었던 부활은 일상 중에 일어나는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오직 이 세상 끝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있을 부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무리 당신이 살아날 것을 예고했다 해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어그러진 메시아의 길이었습니다.

역시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붙들고(프로스라보메노스), 이는 예수님을 take to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데려가서 무엇을 합니까? 항변합니다(에피티만). 꾸짖었다(rebuke)는 것입니다. 스승이 얼마나 스승답지 못했으면 제자가 스승을 데려가서 꾸짖었을까요? 제자들이 보기에 그 길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제자들까지 함께 다 멸망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제자들이 과거와 현재를 비추어 보건데 너무나도 확실하고 든든한 그들의 미래를 완전히 산산조각을 내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혹시 오늘날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헛물켜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 믿으면 미래가 보장된다,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든든한 삶을 살게 된다, 착각하는 게 아닐까요? 이를 뒷받침하듯 과거에 예수 믿은 나라들은 미국, 영국, 독일 할 것 없이 다 잘 살고 있지 않냐? 믿음이 좋아 십일조 왕이 된 록펠러를 봐라 세계적인 거부가 되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그렇다 부러워하고, 반면에 일이 잘 안 풀리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예수 잘 못 믿어서 그렇다 정죄합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승승장구할 것만 생각했지,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죽임 당하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에 젖은 베드로를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스승을 꾸짖은 베드로도 그렇지만, 제자를 사탄이라고 몰아치신 예수님도 지나치신 게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고난의 문제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참된 메시아를 따르는 길에는 영광이 필수라고 본 반면, 예수님은 오히려 고난이 필수라고 하십니다. 전자가 사람의 생각(심지어 사탄의 생각)인 반면, 후자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수정하기 위해 그들을 불러서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누구든지는 당시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금욕주의자, 자기혐오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메시아 예수를 우리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반대가 예수 없는 자기강화, 그리스도 없는 자아실현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조차 자기강화, 자아실현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지만, 유별나게 아집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매사에 뜬금없이 성경을 인용합니다. 실은 성경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치는 것이지요(그래서 저는 페북에 온통 성경구절로 도배된 사람들과는 페친을 잘 맺지 않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우리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은 절대적인 충성을 우리에게 요구하실까요? 그분이 무엇인가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35-37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 말씀은 우리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영원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36절은 35절을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즉 목숨이 온 천하보다 더 중요하다면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은 얼마나 더 중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얼마 전, 이만기 전 천하장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종격투기 쪽에서 수십억을 주겠다고 나를 오라 유혹한 적이 있었지만, 나는 민속씨름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수백억을 준다고 해도 가지 않기로 했다.” 그는 정말 씨름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고상한 가치가 있을까요? 기득권을 위해 예수 팔아 목회세습하고, 독재정부에게 앞장서서 협조하다가, 민주정부가 세금 내라고 하자 순교자적 저항을 하겠다 나서고. 날마다 이슬람, 종북, 동성애 때려잡겠다는 오늘날 보편적인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연 목숨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어쩌면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은 과거와 현재의 추세에 비추어 고난 없는 미래의 영광만 얻겠다는 반쪽짜리 메시아 고백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글쓴이 이택환 목사는, 그소망교회 담임 목회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