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스라엘에서 산당은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고대 이스라엘에서 산당은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 전현철
  • 승인 2018.02.2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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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신앙에 바탕을 둔 가정 산당이 번져있었다
멜 므깃도의 고대 가나안 시대의 산당터
텔 므깃도의 고대 가나안 시대의 산당터(사진 중앙의 둥근 건축물)

고대 이스라엘에서 산당은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왕하 12:3-4)

위의 구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왜 산당들만 내버려 두었을까? 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아직 중앙성소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산당들이 제의적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 솔로몬 성전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지방에 있는 레위의 도성들에서 산당들이 가동되었을 것으로도 본다. 종교적 중심지는 늘 권력과 정치와 물질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지방의 세력들이 이 권력을 쉽게 놓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와 같은 지방의 세력들의 정치적인 이유나 사회적인 여러 이유들로 인해서 산당들이 다 제거되지 못한 이유들이 될 것이다,

By Chmee2 - Own work, CC BY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6238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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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외에 또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물론 필자의 고유한 입장은 아니다. 이스라엘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신 임미영 교수의 강의를 통해 산당(: במה bamah)에 대해 자세히 배울 기회가 있었다바마에 대한 정의에 대한 견해에 일치된 의견이 없기 때문에 바마를 쉽게 정의내리기는 쉽지 어렵지만, 바마는 단순히 높은 장소만이 아니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바마가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곳인데 바마는 산에도 있고 평지에도 있고 심지어 집에도 있을 수 있다. 길거리나 성문 앞 광장에도 있었고, 솔로몬이 갔던 바마는 산중턱에 있는 넓은 광장에도 있었다. 심지어 때로는 신상이 있기도 하고 신상이 없어도 산당이었다.

바알하닷. 이스라엘 박물관

산당이 제거되기 힘든 이유는 집안에도 산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당은 일종의 가정 재단과도 같은 것이었다. 산당은 큰 장소도 산당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자기 조상들의 위패를 모셔 놓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신주단지처럼 모셔놓듯이. 다른 장소보다 조금 더 높게 세우면 그 모든 것이 다 산당이었다.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가까운 요단강 근처의 벳세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신상은 성문 앞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성문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상거래가 잘되도록 기도하는 곳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위의 그림은 벳세다 성문에 있는 바마이다. 이 돌(Matzevah)의 하나에는 바알하닷이 새겨져있고 다른 하나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우상이 그려져 있지 않는 것도 우상 신상이다. 보통 이 둘이 같이 있을 때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돌은 여신상으로 간주한다.

이와 관련 리차드 S. 히스가 펴낸 이스라엘의 종교’(원제, Israelite Religions: An Archaeological and Biblical Survey, CLC, 2013)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주전 750년 하솔의 가정집에서 종교물품이 적게 발견되다 후에 제의 물품의 수가 증가하였다. 가정집에서 발견된 제의 물품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텔 베잇 미르심((Tell Beit Mirsim/ Debir))에서도 발견된다. 그것도 남왕국 말년에 45퍼센트가 가정주거에서 제의 물품을 포함하고 있다. 이 관찰들은 가정 주거에서 발견된 분향 수발과 석회석 제단에 관한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북왕국과 남왕국이 멸망할 즈음 가정 제의가 늘어난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가정에서 다양한 신들에 대한 예배가 드리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비주류 가정의 성소에서도 많은 수의 등잔과 음식준비, 섭취, 음용을 위한 그릇을 발견했다. 데버는 (2001)산당이 공식 종교에서 소외당한 여성들이 가정종교를 시작했다고 말한다.(pp. 382-384) 공식적인 산당에서 가정 산당까지 깊이 뿌리내리는 모습이라고 리차드 S. 히스는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다.

고대 남왕국 유대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산당은 어떤 면에서 로마시대의 라레스 숭배와 관련된 라라리움(Lararium)과 비교해볼만 하다. 라레스는 로마시대 때 유명한 주신이 아닌 하급신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더 자주 등장한다. 라레스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보통 죽은 조상 중 일부가 살아생전 훌륭한 일을 한 것이 인정되어 정령으로 추앙받은 존재이다. 이 정령들은 보통 후손들이 숭배했는데 집안의 자손들이 가정 안에 설치해놓은 작은 제단인 라라리움(Lararium)에서 매일 제물도 올리고 기도를 하며 숭배하였다. 이 신은 기본적으로는 가족 수호신이지만 장소를 수호하는 라레스도 있고, 심지어 로마 국가를 수호하는 라레스 아우구스티도 있었다. 이 라라리움 같은 것이 산당과도 비교될만하다.

산당이 제거되지 못한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산에 있거나 큰 장소에 있는 것은 없애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간신앙으로 뿌리 깊게 파고들어가 각 가정에까지 파고 들어갔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것을 다 파괴하여 제거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텔 아라드의 고대 신전 유적지. 그 안쪽이 성소 지성소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고고학 수업을 배울 때 흥미로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아랏(오늘날의 아라드)에 자리한 텔 아라드에서 발견된 제단은 2번에 걸쳐서 제단(바마)이 무너진 흔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최남단에 위치한 텔 아라드의 요새 자체는 586년에 파괴되어 무너졌다. 그런데 이곳에 자리한 신전은 그때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무너져서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파괴된 시기는 탤 아라드에 있던 성이 무너진 시기와 달랐다.

이곳의 신전이 무너진 시기는 주전 700년경(히스기야 시대)과 주전 650년경(요시야 시대)2차례 파괴되었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그 시기가 요시야 시대와 히스기야 시대와 일치한다. 성경의 시대와 아랏의 바마가 무너진 시기가 일치해서 이 아랏을 배울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실제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아랏의 제단을 보았을 때 큰 감동이 있었다.

위의 사진은 텔 아라드(아랏)의 신전 구역이다. 그 안쪽이 성소이다. 아랏의 성소 안에 있는 곳을 보면 두개의 돌이 있다. 2개의 돌이 원래는 무너뜨려서 쓰려져 있었는데 그것을 세워보니 신상으로 쓰여 졌던 돌이었다. (Matzevah)은 그림이 새겨져 있든 없든 그 자체로 이미 우상이다. 2번이나 무너졌던 흔적이 보인다.

이처럼 산당이 그대로 남아있던 이유데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이것을 보면 큰 장소나 대중적인 장소는 산당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뿌리 깊게 퍼진 민간 신앙 때문에 각 가정에 모신 산당은 파괴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다가온다.

 

글쓴이 전현철 목사는, 바른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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