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맥락에서 요나서 천천히 다시 읽기
역사적 맥락에서 요나서 천천히 다시 읽기
  • 김동문
  • 승인 2018.02.13 0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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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익숙하다 싶은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지나치곤 한다. 그런데 특정 성경 본문이 눈에 익숙하다고 하여 그 본문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특정 성경 본문은 성경 저자나 독자가 자리한, 아니면 자리하기를 원하는 어떤 특정한 시간, 공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염두에 두고 있다, 본문, 저자, 독자의 관점에서 차분하게 성경 본문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요나서 천천히 읽기

그래서 성경 이야기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낯섫게 성경읽기, 천천히 읽기를 시도하여야 한다. 요나서를 천천히 읽기 위한 기본 준비를 하자. 요나서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는 지리적인 위치도 확인한다. 구글 지도를 이용하여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던 니느웨 성의 위치, 그리고 지중해 바다, 지중해 끝의 다시스 등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런 특정 장소들이 어떤 존재감을 갖고 있었는지, 그 특성을 찾아본다. 그리고 니느웨성에 대해 짚어본다. 그곳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주목한다. 역사로 성경을 읽기 위한 수고이다.

요나서 1장에서는 지리적인 위치와 함께 바다의 신, 큰 물고기 신, 광야의 신, 니느웨성의 신을 찾아보자. 당시에 신들은 지역과 경계에 갇혀있던 지역신이었음을 기억하자. 2장에서는 큰 물고기 속의 요나를 떠올려보자. 만신창이 요나의 모습을, 그리고 지중해변에서 니느웨성으로 이동하는 그 장거리 여정을 생각해보자. 3장에서는 지금의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에 자리한 고대 니느웨성과 그 안에 살던 이들을 기억해보자. 그 곳을 찾은 멸망직전의 지중해변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왔다는 흉측한 몰골을 한 한 사람의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마주하던 니느웨 성 주민의 자리를 떠올려보자. 4장은 박 넝쿨(피마자) 이미지를 활용해보자.

 

여호와 하나님은 지역신이 아니다

성경은 때때로, 아니 자주, 은근하게 아니 노골적으로 그 시대의 주류 세계관과 싸움을 전개한다. 그것은 그런 점에서 신학적이다. 그러나 학적이기보다 매우 일상적이다. 고대 이집트의 다종교 체제에서, 그리고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다신 체제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전파한다. 그 시대, 그 땅의 주요 신들의 존재감을 무시하거나 아예 제거하는 선언과 의식을 펼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에서 해마다 맞이하는 부활의 축제 직전에 나일 강, 나일 신, 이집트의 풍요의 신의 죽음을 선언한다. 달 신의 땅으로 상징화되는 큰 강 유프라테스 강에 자리한 메소포타미아를 해 뜨는 곳으로 묘사한다. 달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땅으로 조롱하는 것이다. 태양신의 땅으로 상징화되는 그 땅을 해 지는 땅이라 조롱한다. 즉 해가 뜨지도 않는 땅이라고 비웃는 것이다. 이처럼 노골적이고 저돌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그 체제, 거룩한 체제를 땅으로 끌어내리고 짓밟고 풍자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나안 땅에서는 바알이냐 여호와냐 싸움을 전개한다. 복음서는 가이사의 길과 예수의 길을 대립시킨다. 단순화하여 보면 성경을 치열하게 체제와 맞선다. 바로가 신이냐 여호와가 신이냐? 바알이냐, 여호와냐? 가이사냐, 예수냐? 상대방을 부정하는 것에 집착하는 전략이 아니라 여호와의 하나님 됨을 강조하는 태도로 다가선다. 부정의 대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을 긍정하는 것이다.

특정 지역에서만 힘을 쓴다는 지역 신, 특정 영역에서만 능력을 발휘한다는 특별한 신, 고대 근동 사람들은 경계와 영역을 파괴하는 신의 개념이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요나서를 읽어나갈 필요가 있다. 지역 신, 국가 신 그들의 이미지와 상징이 요나서에 가득하다. 그래서 인간 승리나 민족신, 지역신이 아닌 여호와의 승리로 가득한 이야기가 요나서이다. 요나서에 등장하는 신적 상징은 무엇이 있을까? 바다, 풍랑, 큰 물고기, 광야 그리고 니느웨의 도시(국가) 등은 각 각의 신의 영역이었다. 그 모든 신이 여호와에 의해 지배당한다고 요나서는 강조한다. 여호와는 모든 지역에,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신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 뛰어난 능력의 신이, 요나와 감정싸움을 벌이고 있다. 삐치고 토라지고 하는 존재, 인간과 사랑싸움을 벌이는 존재로 묘사되는 듯하다. 여호와를 섬세한 인격체로 강조하는 성경을 다시 생각한다. 성경은 때때로 마당극이나 창극, 판소리로 들려온다. 서양의 오페라, 뮤지컬처럼 다가온다.

 

민족주의자 요나의 비장한 마음에 공감한다

요나서를 다음의 두 가지 입장에서 다시 읽어본다.

1) 요나 : 온 몸이 물고기의 뱃속에서 죽기 살기로 버텨야 했던 요나, 고기의 소화액 등으로 인해, 온 몸의 살과 뼈가 삭아버리고 녹아버린 요나, 결국 산으로 인해 심각한 화상을 입고 흉측한 몰골로 변해버린 요나, 온 몸에 물고기 썩는 냄새를 가득 아로 새겨졌을 요나, 죽기보다 더 힘든 마음과 몸을 이끌고, 30-4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시리아-이라크 사막과 들판을 지나가야 했던 요나, 게다가 죽기보다 더 싫었던 원수 나라의 호랑이굴 같은 니느웨성을 홀로 찾아가야 했던 요나, 그는 대체 어떤 감정과 정신 상태였을까?

요나 피 끓는 마음, 고통스런 감정을 떠올려본다. 이렇게까지 힘든 몸과 마음을 지닌 채로 끌려가야 했던 것은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바다 깊은 곳까지 따라오는 존재, 큰 물고기 뱃속까지도 따라오는 존재, 바다 위 바람조차 다스리는 존재 그를 피하여 도망갈 곳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였을 듯하다.

유다의 식민종주국이었던 앗수르 대제국의 신민들, 그 수도 니느웨 성의 사람들은 이런 몰골과 처지의 요나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이라 말했을까? 그 몰골도 흉측하고, 그가 내뱉은 말도, 가히 흉측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요나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이라 반응했을까? 요나 편에서가 아니라 니느웨 성 주민의 시선으로도 요나서를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2) 요나, 이스라엘 그리고 니느웨, 앗수르 : 요나, 이미 북 왕국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다 잡아 삼키려고 하는 앗수르 제국과 그 백성들은, 두려운 대상 그 자체였다. 물고기 형상으로 묘사되던 엔키 또는 다간 등으로 불리는 앗시리아 제국의 신은, 요나에게 있어서 앗수르 제국의 그림언어였다. 요나의 앗수르 제국에 의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 큰 물고기 속에 들어가 악전고투 끝에 살아난 요나는,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큰 물고기)에 집어 삼킨바 되더라도 완전히 멸절되지 않고 다시 살아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나서에 담겨있는, 요나를 삼킨 클 물고기, 그리고 그 큰 성 니느웨, 이스라엘을 삼킨 앗수르 제국의 입에서 토해냄을 받듯이 구원받은 요나는 하나의 표적이었다. 하나님은 맹수의 이빨 사이에 끼여 있는 찌끼 같은 존재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내신 것이다. 요나가 바다에, 큰 물고기에, 큰 성 니느웨에 잡아먹히지만, 결코 죽지 않고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요나서는 이럼 점에서 이미 끝이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님을 노래한다.

 

예수 시대 그리고 2018년 요나의 표적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 예수님으로부터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달리 말해줄 표적이 없다는 메시지를 들었던 로마의 식민지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올린다.

마침내는, 요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삼켜졌던 곳에서 토해냄을 받듯이 살아낼 것이라는 요나의 표적을 떠올려본다. 요나의 표적, 개인과 공동체, 양심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사라져가는 작은 믿음의 회복, 다양한 영역의 죽음에서의 승리, 로마제국으로부터 회복으로 각 자에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로마제국에 집어 삼켜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로 포로에서의 귀환의 기억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는, 그 먼 옛날의 애굽에서 나왔던 그 오래된 기억보다 요나의 그림 언어가 더 강한 메시지, , 약속의 언어였을 것 같다역사적 사건과 이야기는 또 다른 절망을 살던 이들에게 하나님이 안겨준 약속이고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2018, 나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맹수처럼 집어 삼킴을 당하는 일상, 여러 권세에 잡아먹힘을 당할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하루하루, 살아내기 위하여 버텨야만 하는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떠올려본다끝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래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님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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